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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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 최태선
  • 승인 2022.05.22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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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선 칼럼
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나는 내가 쓰는 글들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그런 내 글이 몇몇 매체에 칼럼이라는 이름을 달고 실리고 있다. 벌써 거의 이십 년 가까이 실리고 있는 곳도 있다.

내가 쓰는 글이지만 내 글이 칼럼으로 실리는 것은 내 일이 아니다. 아전인수로 들릴지 모르지만 그 일은 하나님의 일이다. 그래서 나는 내 글을 기고하지 않는다. 칼럼으로 올려 달라는 부탁을 해본 적도 없다. 또 내 글을 널리 알리고자 선전을 한 적도 없다. 그럴 수가 없다. 나는 늘 내가 쓰는 글들이 주님이 내게 주시는 가르침들을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 마디로 내 글들은 졸글들이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에는 위대한 사람들의 걸작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보잘 것 없는 이들의 졸작이 필요하다. 아마도 그래서 주님이 편집장들이나 발행인들의 마음을 움직이신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일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게 글을 쓰는 것은 아버지를 알아가는 수단이 된다. 글이란 묵상을 기본으로 한다. 물론 직관과 통찰이 필요하다. 다른 이들의 책을 읽고 그런 깨달음이 오는 수도 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나는 내게 주어지는 직관과 통찰이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서 오는 주님의 가르침이라는 생각을 한다. 주님께 ‘나 같은 것’이라는 표현은 주님의 걸작을 스스로 폄훼하는 잘못일지도 모르지만 나는 정말 나 같은 것을 사용해주시는 주님께 늘 송구한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내가 글을 쓰는 일은 내 일임과 동시에 아버지의 일이 된다고 믿는다. 나는 내 일로서의 글쓰기에 최선을 다하지만 내 글쓰기는 결코 내게 절대적인 것이 될 수 없다. 특히 글의 내용은 더더욱 그렇다. 내가 사람들이 내게 하는 예언자라는 말에 현혹되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은 나는 언제나 잘못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나를 통해 아버지께서 일하신다면 그 부분에 있어서 나는 예언자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예언자의 역할은 외로운 일이다. 특히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매우 섭섭한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시선은 우리의 시선과 달리 중심을 보신다. 누구라도 다른 이에게 중심이 파악 당하는 일보다 두려운 일은 없다. 그 일을 지적하는 것은 치부를 드러내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예언자의 역할은 다른 이의 치부를 지적하는 일이 많다. 특히 가까운 사람의 그런 치부를 지적하는 일은 관계의 단절을 불러온다. 그래서 예언자의 삶에서 가장 힘들고 어려운 일은 주님이 내게 보게 해 주시는 사람들의 중심을 지적하는 일이다.

결과적으로 나는 내게 다가왔던 사람들, 특히 나에게 존경심을 표했던 사람들에게서 차단 당하는 아픔을 계속해서 겪고 있다. 아무리 반복되어도 좀처럼 익숙해질 수 없는 아픔이다. 하지만 주님이 내게 예언자로서의 삶을 요구하시는 한 그것은 내가 지고 가야 할 주님의 멍에이다. 언젠가는 회복이 기다리고 있는 일시적인 단절일 것이라고 믿고 다시 만남과 회복의 시간을 고대한다. 글을 쓴다는 것은 그래서 내게 예언자의 삶임을 끊임없이 일깨워주는 도구이다. 내가 필화를 두려워한다면 나는 내게 주어지는 사명을 등한시하거나 외면하는 것이다. 이제 나는 필화가 오히려 내가 아버지의 일을 하고 있음을 확인시켜주는 은혜의 방편이라는 것을 알고 오늘도 글을 쓴다.

어제 나는 요셉에 관한 어떤 분의 글을 읽었다. 그는 요셉이 자신에게 '넘사벽'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그의 못마땅한 부분을 지적했다.

“요셉이 이처럼 곡물을 이용해서 기아에 처한 백성의 재산을 마구 빼앗지 말고 차라리 그냥 무이자나 낮은 이자로 7년 간 곡물을 빌려주고, 나중에 기근이 끝났을 때 조금씩 갚게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당시 요셉의 막강한 직위와 권력을 고려할 때 그렇게 못할 이유가 별로 없었다. 만일 그랬다면 백성들이 저처럼 무일푼의 농노로 전락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분이 처음 이런 지적을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전에도 이런 지적을 하면서 요셉을 비난하는 사람들을 많이 보았다. 어떤 사람은 지적을 하며 분노하며 요셉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이도 있었다. 사실 누구나 지적할 수 있는 내용이다. 하지만 분노하고 부정하는 일은 또 다른 일이다. 거기에는 다른 요소가 가미된다. 자신의 판단에 절대성을 부여하려는 가인의 후예들의 원죄가 역할을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나는 가능하면 내가 지적하는 일에 담겨 있는 아버지의 뜻을 찾아보려고 노력한다. 하나님은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는 분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악, 역시 하느님의 손 안에서 선의 도구가 될 수 있다.

이제 요셉의 불의를 생각해보자. 요셉이 기아에 처한 백성들을 무일푼의 농노로 만든 것이 정말 잘못된 일이었을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요셉은 바로의 총리일 때뿐만이 아니라 보디발의 집사 일을 할 때도 오직 보디발을 대변하고 보디발의 이익을 위해 일했다. 만일 그가 자신을 강조하거나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부분이 있었다면 보디발의 절대 신임을 얻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절대 신임을 얻었음에도 그는 보디발의 아내의 모함에 지위를 잃었다. 그래야 했기 때문이다. 그가 감옥에 갇히고 꿈을 해몽하여 애굽의 총리가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보디발의 아내의 모함이라는 악은 하느님의 손에서 선의 도구로 변한 것이다.

마찬가지다. 요셉이 기근을 이용해 바로에게 이집트의 온 땅을 바로의 손에 넘긴 것은 백성들을 무일푼의 농노로 만들었지만 결국 그것을 통해 이집트에 이스라엘 민족의 인큐베이터를 만들기 위함이었다. 물론 하느님은 요셉에게 그 일에 대해 설명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요셉은 그 일을 통해 아버지의 일을 한 것이다. 이스라엘이 중대한 민족이 되는 데 그 일은 필수적이었다.

백성들이 농노가 된 것 역시 이스라엘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이스라엘은 목축을 하는 민족이다. 그런 이스라엘에게 바로가 고센 땅을 줄 수 있었던 것도 이집트의 온 땅이 바로의 것이 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또 그곳에서 이스라엘이 노예가 된 것도 이집트의 온 백성이 농노가 되었기에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이스라엘은 ‘하비루’가 되어 비참한 삶을 경험해야 했다. 그래야 온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경륜의 도구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요셉의 일을 못마땅하게 생각하시는 분의 생각대로 요셉이 선한 정치를 했다면 하느님의 이런 일들이 일어날 수 있었겠는가. 내 생각이지만 아마도 요셉은 그 일로 바로의 신임을 잃거나 경계의 대상이 되어 얼마 지나지 않아 직을 잃고 쫓겨나거나 사형을 당했을 것이다.

“하늘이 땅보다 높듯이, 나의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나의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다.”

“하느님의 어리석음이 사람의 지혜보다 더 지혜롭고, 하느님의 약함이 사람의 강함보다 더 강합니다.”

나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계몽주의 이후의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늘 기억한다. 인간 중심의 사회에서 우리는 내가 지금 인용한 말씀들을 간과하기 쉽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림자가 없으신 분이시다. 그분의 악을 선의 도구로 만드실 수 있는 능력에는 제한이 없다. 나는 그 하느님을 믿는다. 그래서 나는 다른 이들을 판단하는 글을 쓸 수 있고, 그 결과가 내게 비난과 외로움을 선사해도 그것을 감사함으로 받을 수 있다. 그 어떤 불이익과 힘든 일을 당할지라도 나는 오늘도 주님처럼 아버지의 일하심을 바라보고 나도 일할 수 있기를 기도한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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