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녀 앤 마리, 노예들을 시민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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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녀 앤 마리, 노예들을 시민으로
  • 브랜든 보트
  • 승인 2022.05.16 19: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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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1828년, 앤 마리는 그에 관하여 가장 잘 알려진 모험을 시작하였다. 다시 프랑스 정부의 초대를 받아서, 그는 남아메리카의 상부 해안에 자리한 식민지인 프랑스령 기아나로 배를 타고 갔다. 프랑스인들은 이 풍요로운 나라를 식민지로 만들려고 수차례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많은 사람들은 그곳이 너무 덥고, 너무 습기 차며, 너무나 바위 투성이고 무엇을 키워 생산하기에는 너무 병이 많다고 여겼다. 그래서 식민지에는 기결수들, 도둑들 그리고 암흑의 투기꾼들이 들끓었다. 일찍이 수년 전에 프랑스 정부는 160명의 숙련공들과 농부들을 이주시켜 식민지를 재생시키려고 시도하였다. 앤 마리가 착륙했을 즈음에는, 이 그룹 중 단지 한 가구만이 남았다.

견문이 넣은 이 활동가는 자기가 어디로 들어가고 있는지 아무런 망상이 없었다. 여정이 끝나자, 앤 마리는 함께 동반해서 온 36명의 수녀들과 86명의 평신도들 앞에 서서 경고하였다, “나는 여러분을 연옥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그러나 도착하자, 걱정들은 사라지고 계획은 시작되었다. 앤 마리의 목표는 지역지도자들과 함께, 이전의 시도들보다 더 안정적이고 자립적인 새 식민지를 만드는 것이었다. 앤 마리가 그렇게 칭한 새 앙굴렘(Angouleme)은 공동생활을 하기 위하여 모든 농부들과 모든 숙련공들을 필요로 할 것이었다. 그들은 새벽 4시에 일어나 미사를 하고 오전 10시까지 일을 한다. 해가 떠서 너무 더우면 견딜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식사를 함께 한다. 수녀들은 모든 지역 아이들을 교육한다 – 유럽인들과 원주민들 그리고 아프리카인들을.

그러나 1831년, 앤 마리가 아직도 새로운 거류지역을 준비하고 있었을 때, 프랑스가 모든 노예들을 해방시키는 법령을 통과 시켰다는 뉴스를 받았다. 소식은 빨리 퍼져나갔고, 며칠 사이에 프랑스령 기아나의 농원에서 600명의 노예들이 걸어 나가 수도인 카옌을 향해 갔다. 그들이 도착했을 때, 앞에는 준비가 안 된 정부가 있었다. 즉각적인 노예 해방은 식민지를 경제적으로 황폐시킨다는 것을 알고, 프랑스 지도자들은 7년의 유예 기간을 두었다. 그 기간 동안 노예들은 자유를 적절하게 누릴 수 있는 그들의 가능성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는 동안 이전에 많이 해왔던 것처럼, 지도자들은 그들을 도와줄 수 있는 한 사람에게 돌아섰다. 그는 여성으로서 성공적으로 수년 동안 노예들을 가르쳤으며, 수개의 풍요로운 공동체들을 세웠다.

이렇게 하여 1835년, 앤 마리는 생애에서 가장 탁월하고 도전적인 과제를 받아들였다. 600명의 노예들은 해방에 준비되고 시민사회의 방식을 훈련 받을 필요가 있었다. 앤 마리는 인근의 고원지역에 새로운 거주지를 시작하겠다고 제안하였다. 계획된 길들, 경당, 병원, 수녀들을 위한 수녀원, 그리고 미혼모 여성들을 위한 쉼터가 있는 거주지로서 마나에 세워질 것이었다. 더 중요하게는, 노예들에게 유연한 변화를 그는 마련해주길 원했다. 각 가족이 해방되어 새로운 거주지로 투입되므로, 앤 마리는 그들에게 약간의 돈과 정원이 있는 작은 오두막집, 그리고 곡식을 키우기 위하여 마을 너머에 약간의 땅도 마련해주었다. 그는 또한 정부가 관개 시설을 설치하도록 설득했고 바나나와 쌀을 심어 해방된 남자들과 여자들이 그들의 새로운 농장에 도착했을 때, 이미 곡식을 수확할 수 있도록 했다.

마침내, 그날이 왔다. 1838년 5월 21일, 걱정스러운 지도자들이 185명의 노예들을 해방하였다. 그들 대부분이 첫 번째로 했던 것은 앤 마리에게 감사를 표현하는 것이었다. 해방된 노예들은 그들의 자유인 증서를 앤 마리에게 건넸다. 그들이 믿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들 중 하나가 이렇게 인정했다: “우리는 지금 자유이지만, 당신에게 진 빚으로부터 우리는 결코 자유롭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이 약속으로 당신께 그 빚을 갚을 수 있습니다: 당신이 결코 우리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으로.”

지역 지도자들이 놀랍게도, 그 약속은 사실이 되었다. 처음의 185명의 노예들은 유연하게 사회에 정착했고, 다음 3년 동안 앤 마리는 3백 명의 노예들을 그렇게 똑같이 도왔다. 마나 식민지에는 경찰이 없었지만 실제로 아무런 범죄도 발생하지 않았다. 모든 성인들은 읽을 수 있었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쓸 수 있었으며 학교에는 아이들이 꽉 찼다. 프랑스 지도자들도 매우 흡족할 수밖에 없었다.

1843년, 수년 동안 성공적으로 식민지를 운영한 후, 앤 마리는 마침내 프랑스로 돌아가야 했다. 슬픈 이별이었다. 그가 탄 배가 바다로 나가자, 가벼운 카누들이 배를 에워쌌다. 카누에서 자유를 찾은 남자들 여자들이 앤 마리에게 인사하고 노래로 고마움을 표현하였다.

아마도 앤 마리는 배가 항해를 계속할 때에, 일찍이 보았던 비전을 기억했을 것이다. 비전에서 앤 마리 주위에는, 일찍이 예언한 것처럼, 검고, 고동색이며 구리빛 사람들이 모두 “사랑하는 어머니!”라고 외치고 있다.

세네갈에서 시에라 레오네로, 감비아에서 인디아로, 뉴 앙굴렘에서 마나까지, 앤 마리는 세계를 돌아다니며,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섬기고 도와주었다. 물론, 그는 이 일을 혼자 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수녀들, 동료일꾼들, 그리고 불란서 정부의 항시적인 후원이 있었다. 그러나 그의 행동주의와 조직화 기술은 교종 비오 11세의 말대로, “첫 번째 여성 선교사”가 되도록 도왔다. 그는 공적인 참여의 모범 성인이었다.

도덕적 의무

“가톨릭 전통에서는, 책임 있는 시민됨이 덕이며, 정치 생활의 참여는 도덕적 의무다. 이 의무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우리가 하는 모든 것에서 그리스도인다운 증언을 표현하는, 세례 때의 약속에 뿌리를 두고 있다. 가톨릭교회의 교리서가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것처럼, ‘모든 사람이 다 참여하는 것이 필요한데, 각자의 지위와 역할에 따라, 공동선을 증진하면서 참여한다. 이러한 의무는 인간 존재의 존엄성에 내재한다 … 시민들은 할 수 있는 껏 공공생활에 적극적인 역할을 맡아야 한다.’”

-충실한 시민됨을 위한 양심 키우기, #13

복녀 앤 마리 쟈부에이가 주는 교훈

우리는 앤 마리의 삶에서 몇 가지 교훈을 배울 수 있다. 먼저, 문제들에 한탄하는 대신 해결하는 가치에 대해서 배운다. 앤 마리는, “당신이 해결하고 싶지 않는 것들에 대해서는 불평을 하지 말라”는 대중적인 속담을 듣지 못했을지도 모르지만, 이 속담을 그대로 실천했다. 어떤 필요를 볼 때마다, 그의 첫 번째 본능은 그대로 뛰어들어 그것을 해결하도록 돕는 것이었다. 교육, 의료, 혹은 사회복지 등 그 어떤 것이든 간에.

우리의 세계는 앤 마리의 문제들보다 더 적은 것도 아니고, 문제들을 비난하는 분석도 모자라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앤 마리 같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소매를 걷어 올리고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최고의 방법을 찾기 위하여 일에 착수하는 사람들이다. 다음번에 어떤 특정한 문제에 사로잡히면, 그때에 우리는 물을 수 있다: “아무리 작은 걸음이라도, 이 일을 해결하기 위하여 나는 무슨 단계를 밟고 있는가?”

두 번째로, 앤 마리는 정치적 참여의 모형을 마련해준다. 그의 경우, 이것은 프랑스 정부와 직접적으로 일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 동반 관계는 수개의 풍성한 공동체를 설립하고 수천 명의 가난한 시민들을 교육하도록 이끌었다. 우리에게는 상황이 다를 수도 있다. 우리들 대부분은 앤 마리의 경우처럼 기회들을 얻지 못할 것이다 –나는 대통령이 나를 초대하여 새 거류지역을 시작하라는 것을 기대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들은 다른 방식으로, 특히 투표로서 우리 공동체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충실한 시민됨을 위한 양심 키우기라는 문서에서, 미국 주교들은 모든 가톨릭들이 공공생활에 참여하는 권리뿐만 아니라 의무를 갖고 있다고 가르친다: “책임있는 시민됨은 덕이고, 정치생활에의 참여는 도덕적 의무다.” 투표 의무를 진지하게 받아들임으로써 –국가와 지역 차원 모두에서– 우리는 실제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세 번째로, 앤 마리의 일은 다른 사람들이 그들 자신의 운명을 형성해 가도록 힘을 강화시켜 준다. 앤 마리는 해방된 노예들이 새로운 형태의 노예 제도의 먹이로 떨어지는 것을, 예를 들면 경제적 의존 같은,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그들에게 집과 땅을 주선하여 그들이 스스로 인격적으로 풍요를 이룩하도록 했다.

오늘날 앤 마리를 따르는 한 가지 길은 지역 차원의 경제 계획에 참여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는 냄비와 팬을 필요로 하는 탄자니아의 빵 굽는 사람을 발견할 수 있다. 혹은 옷감이 조금 필요한 멕시코의 재봉사와 알게 될 지도 모른다. 사회복지기관을 통하여 이들에게 작은 기부를 할 때에 우리는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을 그들 스스로가 일을 함으로써 가난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다. 우리는 단지 돈만 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자신의 운명에 참여하는 선물도 마련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앤 마리로부터 정부 측 활동의 특혜와 한계를 배울 수 있다. 프랑스 정부의 격려와 지지가 없었다면 앤 마리는 많은 계획들을 실행에 옮길 수 없었다. 예를 들면, 해방된 노예들의 새로운 거류지를 세우는 일은 앤 마리 혼자서는 불가능했다. 또한 동시에, 정부도 그만큼 앤 마리를 필요로 했다. 거대하고 관료적인 정부기관은 앤 마리의 영적인 양육과 개인적이고 존엄성을 주는 사랑을 마련할 수 없었다. 그의 모범은 우리가 두 가지 극한점들을 피해야 한다고 보여준다. 하나는 정부가 모든 우리 문제의 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정부가 아무 역할도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국가기관들은 “사랑의 문명”을 세우는 데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지만, 그들은 결코 개인 시민들, 공공조직들, 수도회 그룹들,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예수 그리스도를 대체할 수 없다.

 

<출처> [성인들과 사회정의>, 브랜든 보트
<번역문 출처> [참사람되어] 2017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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