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롭게 고통당하고, 자유롭게 섬기는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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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롭게 고통당하고, 자유롭게 섬기는 삶
  • 최태선
  • 승인 2022.05.16 1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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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선 칼럼
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정의는 하느님의 성품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정의를 옳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하느님도 정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것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이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금과옥조로 알고 있는 대속의 원리다. 인간이 범죄하였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범죄를 그냥 용서하시면 그것은 옳을 수가 없다. 그래서 독생자 예수를 대속의 제물로 드리셨다. 하느님은 옳지 않은 일을 하실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의의 하느님이라는 말은 종종 분노의 하느님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나는 이러한 하느님 이해가 인간의 자기 이해라고 생각한다. 하느님은 무엇에도 제한을 받지 않으신다. 옳음 역시 마찬가지다. 그분이 그렇게 하실 수 있는 것은 그분이 전능하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어떠한 불의도 선의 도구로 만드시고 사용하실 수 있다. 인간의 죄 역시 마찬가지다. 인간의 죄를 그분이 그냥 용서하셔도 그분의 선하심은 변하지 않는다. 그분의 정의 역시 마찬가지다. 비록 인간들이 그것을 이해할 수 없어도 상관없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물로 바치라고 하셨다. 어떤 각도로 생각을 해보아도 이것은 정의롭지 않고 선하지도 않다. 이해할 수도 없다. 하지만 하느님은 그런 명령을 내리실 수 있다. 물론 하느님은 이삭을 죽게 하지 않으셨고 당신이 손수 다른 제물을 준비하셨다. 히브리서에서 말하는 것처럼 다시 살리실 수도 있다. 어떠한 경우도 하느님의 정의와 선은 절대적이다.

하느님의 정의는 평화로 드러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의 평화 이해가 중요하다. 하느님 나라의 평화는 사람들이 알고 있는 평화와 다르다.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평화는 대부분 PAX ROMANA다. 이것은 힘(폭력)에 의한 평화를 의미한다. 그러나 힘에 의한 평화는 힘을 가진 자의 입장에서의 평화일 뿐 폭력의 희생자들에게는 평화가 아니라 침략과 수탈과 일방적인 피해를 의미한다.

그러나 하느님의 평화는 그런 힘에 의한 일시적인 질서있는 상태가 아니라 결핍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 가난, 억압, 공포, 소외, 부조화와 같은 것들이 결핍의 대표적인 예들이다. 하느님의 평화는 그런 모든 결핍이 사라진 상태를 의미한다. 샬롬은 하느님의 통치로 인해 모든 결핍이 사라진 상태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 부족한 것이 없고 필요한 모든 것이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들과 피조세계가 창조의 뜻대로 존재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게 평화가 이루어지는 것은 하느님의 정의가 구현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평화와 정의는 동전의 양면과 같다.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시다. 그래서 인간의 눈에는 하느님의 정의가 (일시적으로) 불의해보일 수도 있고, 무질서로 인식될 수도 있다. 때론 자유를 침해하는 것으로 인식될 수도 있고, 심지어 불의해보일 수도 있다. 하느님의 정의가 그렇게 보일 수 있는 것은 인간 또한 어느 정도 선악을 구분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느님의 정의와 인간이 생각하는 정의에 불일치가 있을 때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믿음이다. 인간은 어느 때에도 자신의 옳음을 절대적으로 주장할 수 없다. 위의 예로 들었던 아브라함의 경우도 그랬고, 예수님의 십자가 역시 그렇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이 하느님의 정의를 분별할 수 없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 온 율법을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에 압축해주셨던 것처럼 예수님의 이 말씀에 하느님의 정의가 온전히 드러나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라면 당연히 가난한 사람, 억압받는 사람, 학대당하는 사람, 소외된 사람,병 들거나 옥에 갇힌 사람들과 같이 일반적으로 사회와 경제 영역 모두에서 지독한 불평등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단순히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필요를 만족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하느님의 정의가 사회를 재형성하고 재구성하여 구조적 불의를 영원히 제거할 것을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한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들에 대한 어떤 특별한 긍휼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이것은 자선이 아닌 하느님의 정의에 대한 호소다. 자선은 우리가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이 자비로움에서 행한 무언가일 수 있음을 전제한다. 그러면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자선을 행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감사해야할 의무가 생긴다. 그러면 그것은 선물이 될 수 없다. 선물이란 그 어떤 부채의식도 가지게 해서는 안 된다.

자선이 가난하고 억압받는 이들이 자신들을 돕는 이들에게 감사해야 함을 암시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 하느님의 정의는 그러한 도움이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임을 상기시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선의 수혜자라고 느끼게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은 단지 자신들이 받아야 할 것을 받는 것이라는 인식을 가지게 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불의의 편이 아니라면 이러한 하느님의 정의에 반대할 수 없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복음이 약속하는 구원과 자유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된다. 복음이 약속하는 구원은 고통이나 수고에서 자유로운 삶이 아니라 자유롭게 고통당하고 자유롭게 섬기는 삶이다. 이처럼 자유롭게 고통당하고, 자유롭게 섬기는 삶이 바로 하느님 나라의 삶의 속성이자 특징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기꺼이 가난해지고, 기꺼이 고통을 나누고, 손해를 감수하는 것을 넘어 희생에 이른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의 삶이 그리스도인의 자유라는 사실은 오늘날 그리스도교와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가.

그렇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자유롭기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쓰임받기를 구한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자유는 오직 섬김을 통해서만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섬김은 단순한 하느님 나라의 삶의 방식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삶을 이루어내는 만능키와 같다. 섬김이 변질되거나 의미를 잃는다면 하느님 나라는 결코 임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자율적이 되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자발적으로 받아들인 것을 제외한 어떤 주장으로부터도 자유롭게 되는 상태가 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자신의 자기 집착이 다른 이들의 필요에 도전받을 때에야 비로소 오는 것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시장의 자유를 그리스도인의 자유로 인식하는 것은 아이러니 가운데 가장 큰 아이러니이다. 시장의 자유는 그리스도인의 자유가 아니라 탐욕의 자유이며, 그런 자유를 주장하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들이 아니라 맘몬의 하수인이라는 주장과도 같다.

하느님의 정의는 하느님의 성품이며 하느님의 백성인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정의를 통해 하느님과 동행하며 그분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될 수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아니라 타인을 위해 사는 존재들이 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우리 교회에서 공동으로 드리는 기도인 서 로벨또 신부님의 기도를 소개한다.

주여, 나날이 제 자신을 잊으면서 살도록 하여주소서.

당신을 향해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에도 나의 기도는 타인이 되도록 도와주소서.

주여, 내가 모든 일에서 진지하고 진실되게 행하게 하여 주시고, 당신을 위해 한다고 생각하는 모든 일들이 모두, ‘타인’을 위한 것이 되도록 나를 도와주소서.

내 몸이 박해받아 죽고, 또 광야에 깊이 묻혀, 그래서 모든 것이 허사가 되더라도, 나의 수고는 ‘타인’을 위한 삶이 아니라면 다시 살아나지 않도록 하여주소서.

그리고 지상에서 내 일이 끝나고 천상에서 나의 새로운 일이 맡겨졌을 때, ‘타인’을 위한 생각으로 내가 받은 완관을 잊도록 하여주소서.

주여, ‘타인’, 예 ‘타인’입니다.

이것이 내 삶의 전조가 되게 하여주소서.

‘타인’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당신을 위해 살아가는 것이 되도록 하여주소서.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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