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일 선물, 탐욕은 사랑의 반대
상태바
생일 선물, 탐욕은 사랑의 반대
  • 최태선
  • 승인 2022.05.10 09:2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최태선 칼럼

 

“인간은 합리적 동물이기보다는 합리화하는 동물이다.”

알베르트 카뮈가 한 말이다. 탁월하다. 그래서 나는 실존주의자들을 좋아한다. 그런데 이 말을 한 카뮈는 합리화로부터 자유로웠을까. 잘 모르겠다. 인간은 객관적이지 않다. 따라서 하느님 이외에는 누구도 다른 사람을 판단할 수 없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이 말씀 앞에서 나는 괴롭다. 내가 쓰고 있는 거의 모든 글들이 이 말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어떤 분들이 비록 나를 예언자 같다는 말을 해주지만 정말 내가 예언자일까. 분명 그런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하지만 예언자로서의 나도 카뮈가 한 말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만일 내가 세습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면 정말 나는 세습을 하지 않았을까. 내가 가진 위력에 눌려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아름다운 여인이 있을 때 과연 나는 성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을까. 내가 유용할 수 있는 헌금이 있었다면 나는 정말 그 헌금을 유용하지는 않아도 내 사사로이 사용하지는 않았을까. 사람들이 모두 나를 칭찬할 때 나는 정말 우쭐거리지 않고 겸손하게 하느님과 동행할 수 있었을까.

모른다. 그 상황에 처하지 않고 하는 대답은 의미가 없다. 그래도 굳이 가정을 해본다면 적어도 내가 지적하는 사람들처럼 자신들이 하는 일을 모르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인간은 합리화하는 동물이다. 나는 인간의 합리화할 수 있는 능력에는 제한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에게 자기를 부인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생명이 붙어있는 한 자기를 부인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어제도 나는 화가 많이 났었다. 물론 화가 날만한 일이었고 화를 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내가 정말 자기를 부인한 예수의 제자였다면 그렇게 불같이 오래도록 화를 낼 수 있었을까. 물론 나는 주먹을 내지르지 않았다. 화가 난 대상에 대해서도 긍휼한 마음을 가지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지나고 보니 미흡했다. 오늘 아침에는 그렇게 화를 냈던 나 자신이 너무 한심해 보인다.

마음을 추스르고 보니 그 일이 하느님의 선물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어제는 내 생일이었다. 어쩌면 그래서 더 화가 났는지도 모른다. 생일은 즐거워야 한다는 생각이 나쁜 생각은 아니다. 그래서 화가 난 나에게 딸이 오늘 행복하게 지내시라는 문자를 보내왔다. 참는데 도움이 되었다.

하느님은 나를 시험하셨다. 물론 하느님은 누구도 시험하지 않으신다. 하지만 시험이 내게 필요하다. 시험은 내 마음의 탐욕에서 비롯된다. 인간은 누구나 탐욕의 존재이다. 그 탐욕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시험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그 시험에서 어제 나는 화를 냈다. 정말 많이 화가 났다. 그리고 그렇게 화난 내 모습을 보고 내 자기부인이 미흡하다는 사실을 확인해야만 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내게 주신 생일 선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탐욕은 모든 죄의 근원이다. 그래서 십계명의 마지막 결론은 “아무것도 탐내지 말라.”이다. 이것은 마지막 결론임과 동시에 종합이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예수님의 선언은 탐심과 관련이 있다. 특히 마음이 가난해야 하는 이유는 탐심 역시 비워야 한다는 의미이다.

자끄 엘륄은 “너희는 하느님처럼 되어서 선과 악을 알게 된다.”는 뱀의 유혹이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는 절대적인 탐욕이라고 말한다. 역으로 생각하면 인간이 저지르는 모든 죄들이 바로 여기에서 파생되어 나온다. 우리는 이런 예들을 늘 목격하게 된다.

범죄한 대형교회 목사들은 그것을 우리에게 잘 보여준다. 그들은 명백하게 악한 것을 선한 것으로 선포한다. 그리고 하느님이 선이라 한 것을 악한 것으로 선포한다. 그런 일들을 하면서 이들이 하는 말이 무엇인가. 자신을 지적하거나 반대하는 사람들을 향해 이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있다. “마귀”도 아니고 “마귀 새끼들”이다. 그러나 이런 말을 하는 자신이 하느님처럼 된 자신을 역설적으로 선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들은 인식하지 못한다.

이러한 탐욕이 타인을 향해서는 극대화된다. 교회 건축을 하면서, 집 있는 사람은 집을 팔아 건축헌금을 드리고 전세로 가고, 전세 들어 있는 사람은 전세금을 빼서 건축헌금을 하고 월세로 가고, 월세를 내고 있는 사람은 보증금을 헌금으로 드리고 더 작은 집으로 이사를 간 후에 몇 년이 지난 후 어떻게 되는가를 보라고 하는 설교를 나는 실제로 들었다. 정말 잔인한 목사들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탐욕이 사랑의 반대라는 사실이다. 탐욕은 타인을 지배하려 하게 만든다. 잘 보고, 잘 생각해보라. 오늘날 교회의 목사들이 교인들을 지배하고 있지 않은가. 교인들을 지배하면서도 뻔뻔하게 교인들을 섬기고 있다고 주장하지 않는가. 그런 교회가 무한정 커지고, 커질수록 지배가 당연해지지 않는가. 화려한 이벤트와 프로그램은 그것을 가리는 가림막이다. 그런 것들이 이루어내는 성과는 지배를 합리화하고 사랑을 소멸시킨다.

마음속에 탐욕이 없다면 누구를 만나더라도 변할 것이 없다. 하지만 탐욕은 기회가 없으면 드러나지 않는다. 나의 탐욕이 드러나지 않는 것은 내게 기회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일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오롯이 가난만을 지향할 수 있다면 기회가 오더라도 그것이 시험이 되지 않고 흔들릴 필요가 없어진다. 나는 항상 육과 영을 구분 짓기를 싫어한다. 육과 영은 내 생명이 끝날 때까지 분리되지 않으며 서로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내 인간이해이기 때문이다. 또 그것이 전인구원의 의미이기 때문이다.

돌고 돌았지만, 어제의 나의 긴 분노는 내 마음속에 자리한 탐욕을 드러냈다. 부끄럽다. 나는 부끄러운 존재이다. 그래서 그것을 보게 하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린다. 이젠 정말 더 잘 살아야 한다. 언제 주님이 부르시더라도 손을 털고 바로 갈 수 있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 임종 때 십자가고상과 성서 한 권만이 남았던 한 신부님처럼 나도 그 비슷하게 되어야 한다.

이제 내 비움의 대상이 마음이 되어야 한다는 주님의 메시지이다. 특히 내 마음속의 탐욕이 그 대상이다. 탐욕이 없어야 제대로 사랑할 수 있다. 그것이 어제 내 생일에 주신 주님의 메시지이다.

“아무것도 탐내지 말라.”

어쩌면 이것도 내 합리화일 수 있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그래서 내가 믿을 수 있는 것은 주님의 사랑밖에는 없다. 주님은 내 마음의 중심을 보시고, 내가 하지 못하는 일을 행하게 하신다. 그래서 나는 가난이 복이고, 가난이 행복이라는, 이 시대 아무도 믿으려 하지 않고 받아드리려 하지 않는 복음을 전해야 한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종이신문 <가톨릭일꾼>(무료) 정기구독 신청하기 
http://www.catholicworker.kr/com/kd.htm

도로시데이영성센터-가톨릭일꾼 후원하기
https://v3.ngocms.co.kr/system/member_signup/join_option_select_03.html?id=hva82041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