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용불량자가 되면서 희년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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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불량자가 되면서 희년을 떠올렸다
  • 최태선
  • 승인 2022.05.03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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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선 칼럼

나는 신용불량자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신용불량자를 보면 마치 그 사람의 신용이 정말 불량한 것처럼 생각한다. 신용불량자를 보면서 그 사람이 불의의 사슬에 매여 있다는 생각을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없다. 혹시 가까이 했다 덤터기라도 쓸까봐 지레 거리를 둔다는 사실을 나는 보아왔다.

내 글을 보고 내게 가까이 다가왔던 사람들도 내가 신용불량자라는 사실을 내 글을 통해 알게 되면 도대체 그게 무슨 자랑이라고 떠벌리냐는 생각을 한다. 내가 신용불량자라는 사실을 늘 밝히는 것은 내 신용이 불량하지 않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나는 내가 한 말을 반드시 지킨다. 내가 지키지 못할 말은 내가 의식하는 한 하지 않는다.

특히 돈에 대해서는 철저하다. 약속을 하고 만나는 경우도 내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약속을 한다. 내가 감당하지 못할 장소에서는 아예 약속을 하지 않는다. 내 처지를 아는 상대방이 비용을 담당할 것이라는 생각은 절대 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 신용불량자가 된 이후 남에게 돈을 빌려본 적이 없다. 내게 경제적인 도움을 주려는 분들의 경우에도 가급적 거절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남을 돕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내 주머니를 비운다. 나는 누구와 경제적인 약속을 할 수 없다. 내가 가진 것이 없고 생길 것을 기대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파산한 후 내가 한 일은 갚아야 할 돈을 갚는 것이었다. 그러나 나를 신용불량자로 만든 은행의 채권에 대해서는 갚을 생각이 없다. 그들은 내 부동산을 담보로 대출을 해주었다. 대출금은 내 부동산 금액보다 높지 않았다. 하지만 내 부동산을 경매하는 것으로 상계되지 않았다. 대출 이자를 상환하지 못하게 된 순간부터 그들이 고율의 이자를 선이자로 제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경매가 된 후에도 경매가 진행되는 몇 년 간의 이자를 먼저 상계했기 때문에 원금이 남았고, 더구나 악성채무로 남은 원금을 채권관리 회사에 팔았다.

이런 일이 얼마나 불의한 일인지 지적하는 이들을 나는 아직 보지 못했다. 특히 정치가들은 이런 체제의 불의에 대해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는다. 더구나 내게 남은 채무는 상속까지 된다. 물론 한정승인과 같이 상속을 포기하면 갚지 않아도 되는 길이 있지만 자칫 슬픔에 빠져 망각하거나 시기를 놓치면 그 채권이 그대로 자식들에게 대물림된다.

 

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물론 나는 오래도록 가난하게 해주십사는 기도를 드렸고 기도의 응답으로 가난해진 것을 감사한다. 그러나 내 채무가 내 아내나 딸들에게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 그들에게 얼마나 미안한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내가 죽으면 제일 먼저 한정승인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이들에게 몇 번이고 확인시켰다. 이제 내게 남은 숙제는 내가 죽은 후 장례비용을 마련하는 것이다. 신용불량자가 되는 순간 거의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가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큰 아이의 결혼식에 내가 청첩을 보낸 사람은 정확하게 여덟 명이다. 그만큼 신용불량자의 위력은 크다.

그러나 나는 나를 신용불량자로 만드신 주님께 감사하고 또 감사한다. 그것은 나에게 하느님 나라 관점으로 복음과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귀중한 도구였다. 세상이 얼마나 불의한 곳인지, 사람들이 대부분 그런 세상의 불의를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것과 오히려 그런 세상의 질서를 얼마나 존중하려는 지를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사실들을 통해 성서가 말하는 희년이라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하느님의 정의 구현인지 마음깊이 공감하고 지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희년은 깨어진 사람들, 공동체, 창조계를 다시 하느님 앞으로 불러 모아 모든 것을 재구성하는 대담한 실천이다. 7년마다 땅은 안식해야 했고, 부채는 탕감되었으며, 노예는 자유함을 얻었고, 가난한 자들에게는 먹을 것이 주어졌다. 희년을 선포하는 주빌리 나팔소리야말로 하느님의 살아계심과 그분의 사랑이 곧 정의임을 만천하에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역사에서 희년에 관한 기록은 확인할 수 없다. 희년이 선포된 경우가 거의 없었다는 사실만이 언급될 뿐이다. 하느님은 그런 이스라엘에게 하느님의 정의를 실현하도록 촉구하는 예언자들을 보내셨지만 예언자들의 소리는 번번이 땅에 떨어지거나 예언자 자신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그것을 우리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 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것이 다 이 세대에게 돌아가리라.”

오늘날 그리스도교 역시 예수님의 이 말씀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 말 안 듣는 이스라엘에는 메시아가 필요했다. 그리고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사랑과 정의와 평화의 시대를 여는 하느님 나라를 가져오셨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예수님께서 메시아로 오셔서 마침내 이스라엘이 하지 못했던 은혜의 해(희년)를 직접 선포하셨다. 그것이 어떻게 실현되었는가가 궁금하다면 사도행전의 초기교회의 기사를 보라.

“많은 신도가 다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서,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사람들은 모두 큰 은혜를 받았다. 그들 가운데는 가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팔아서, 그 판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고, 사도들은 각 사람에게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었다.”

초기교회의 모습이 바로 희년의 생생한 증언이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그런 초기교회를 다시 피안의 세계로 돌려보냈다. 오늘날 교회 가운데 이 모습이 재현되는 곳이 있는가. 있다. 나는 이제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의 사람들을 제도권 혹은 정통이 아닌 곳에서 발견했다. 그것은 역사 속의 흔적만이 아니라 지금 현재도 진행형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내가 신용불량자가 되지 않았다면 나 역시 굳이 그런 꺼림칙한 사실을 외면하는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오늘날 조직이 되어버린 그리스도교는 “불의와 어느 정도 안전거리를 유지하면서 적절한 자선을 베풂으로써 그들이 갖고 있는 죄의식을 묻어버린다. 이러한 자선의 모습은 하나의 작은 빵, 몇 개의 구급약통, 폭탄이 터지고 난 후 나누는 과자 등 작은 물품, 기부 및 보조금을 통해 드러난다. 사람들은 양심에 대해 침묵하려고 이렇게 무기력한 자선 행위를 필요로 한다. 이러한 자선은 공포와 죽음으로 더렵혀진 악취를 씻어내면서 달콤한 향내를 풍겨낸다. 다른 모든 자선단체처럼, 기관의 하나가 된 그리스도교 또한 더욱 많은 군중, 돈, 권력, 전쟁들을 좋아한다. 이러한 조직으로써의 기독교에게 전쟁은 ‘하느님의 뜻’이다. 이들은 총을 축복하면서 동시에 전쟁미망인들과 전쟁고아들에게 빵 살 돈을 보낸다.”(<정의 프로젝트>, 브라이언 맥클라렌 외 편집, 김복기 옮김, 대장간, p.66)

그렇다. 오늘날 그리스도교 안에서 사라진 것은 예수님이 선포하신 희년이다. 우리는 더 이상 그리스도교(정통이라는) 안에서 희년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런 그리스도교에서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없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누룩에 비유하셨다. 적은 누룩이 반죽 전체를 부풀게 한다. 그래서 나는 절망하지 않는다. 주님이 내게 신용불량자로서의 삶을 경험하게 하신 이유는 희년이야말로 복음의 알짬이며 하느님의 정의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자 사명임을 알려주시기 위함이다. 이제 내가 할 일은 바로 그 누룩이 되는 것이다. 나는 이제 희년의 선포를 통해 정의의 찬가를 부를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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