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요 그대, 라는 소설을 쓰게 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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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요 그대, 라는 소설을 쓰게 된 이유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2.04.25 1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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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요 그대-예수를 만난 사람들], 한상봉, 성서와함께, 2022

사는 게 고달플 때마다, 어깨에 가만히 손을 얹으며 “괜찮다, 괜찮다” 다독거려 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아물지 않은 상처가 덧날 때마다 입김을 불어주고, 말이 앞뒤가 맞지 않더라도 삶의 무게에 휘둘려 하소연할 때 “그래요, 그대” 하며 가만히 들어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살다보면 사람에게 거는 기대가 자꾸 낮아집니다. 그래서 작은 친절에도 명치끝이 아릴만큼 고맙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예수를 만난 사람들은 하나같이 치유를 받았다고 복음서는 전하고 있습니다. 그건 아마도 “그래요, 그대 말이 맞아요”라고 공감해 주는 사람을 만났기 때문이라고 여깁니다. 율법과 전통을 넘어 한 사람의 슬픔과 고통으로 직진할 줄 알았던 분이 예수님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보잘 것 없는 사람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 준 것”이라던 예수님입니다. 예수 자신이 이미 충분히 슬픔 가운데 살았고, 가난과 고통을 경험하신 분입니다. 그분의 공감능력이 무너진 사람을 일으켜 세웁니다. 그들을 치유할 수 있습니다.

 

내 생애 처음으로 ‘소설’을 지어보았습니다. 소설이 아니고서야 그분을 담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서의 행간을 읽으려면 어떤 합리적 추론이 아니라 복음적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납득할 수 없는 그분의 언행을 이해하기 위해, 수용할 수 없는 그분의 죽음을 받아들이기 위해, 그분이 꿈꾸었던 하느님 나라의 비전에 올라타기 위해, 그래요, 어쩌면 문학적 상상력이 필요했던 것이겠지요.

예수님은 우리가 그분을 무조건 ‘주님’으로 고백하기를 원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느님은 길가의 돌멩이로도 아브라함의 후손을 만드실 수 있는 분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죠. 신앙고백 여부가 중요하겠지만, 그것보다 “하느님을 뜻을 알아듣고 그대로 사는 사람”을 기다리시는 분이 예수님이라 생각합니다. 평생 동무들을 기다렸지만 끝내 한 사람의 동행도 얻지 못한 채 죽고서야 자매 형제들을 얻었던 샤를 드 푸코처럼, 예수님의 제자들도 그분이 돌아가시고서야 그 배신과 슬픔과 절망의 한복판에서 다시 예수님을 만났던 사람들입니다. 이처럼 희망을 놓치지 않으려면,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납득할 수 없거든 그냥 사랑하라. 내 생각과 달라도 사랑하라. 사랑하면 결국 알게 되리.

<그래요 그대>를 쓰면서, 염두에 둔 가장 강력한 생각이 있습니다.

복음서에 익명으로 등장하는 인물들에게 모두 출신과 이름을 붙였다는 것입니다. 더 분명히 말하자면 이름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이름을 되돌려 주고 싶었습니다. 그이들은 이 사람 또는 저 사람이 아닙니다. 고유한 자기 삶의 경로를 힘겹게 살아온 뜨거운 목숨들입니다. 가난한 하층민들은 항시 ‘주변부 인생’으로 취급받아 역사에 기록되지 않습니다. 복음서조차 예수님의 제자들과 그분을 따르던 몇몇 여인들을 제외한다면, 회당장 야이로, 자캐오와 바르티메오, 라자로와 마르타와 마리아의 이름만이 분명하게 기억됩니다. 나머지는 나병환자이거나 과부이거나 한 소년이거나 하혈하는 여인이거나 마귀 들린 사람입니다. 그리고 카야파와 빌라도, 니코데모처럼 상류층 인사가 아니라면 모두 군중들 가운데 하나로 기억됩니다.

하지만 ‘예수’라는 이름조차 당시 팔레스티나에서 가장 흔한 이름 가운데 하나였음을 기억한다면, 복음서에 이름이 기록되지 않은 수많은 이들이 복음서의 배경이며 동시에 복음서의 주인공이라고 봐야 합니다. 그들이 상호작용을 하며 얽히고 엮어져 예수님의 얼굴이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정체성은 예수님 홀로 마련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 보고 듣고 만졌던 기억들이 복음서의 예수님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에 대한 자기 경험을 통해 어떤 이는 ‘주님’이라 하고, 어떤 이는 ‘예언자’라 하고, 어떤 이는 ‘라삐’라 불렀습니다. 심지어 어떤 이들은 ‘술보요 먹보’,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고 불렀습니다. 그 모든 발언이 그분을 드러냅니다.

그리고 정작 예수님은 자주 자신을 ‘사람의 아들’이라 했습니다. ‘사람의 아들’이란 묵시문학에서 심판의 날에 찾아올 메시아로 여기지만, 말뜻 그대로 새기자면 ‘참사람’이라는 뜻이겠지요. 참사람이란 ‘사람다운 사람’이겠지요. 종당에는 ‘하느님의 성정을 닮은 사람’이겠지요. ‘사랑 그 자체’이신 분이 하느님이라면, 예수님은 하느님의 자비를 선포하러 지상에 몸을 푸신 분이겠지요. 그러니,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님이 누군지 알게 되고, 급기야 그분을 통해 하느님을 눈 뜨고 보게 되겠죠. 살아서 그분을 만난 사람은 죽어서도 그분과 함께 할 것입니다. 그게 영원한 생명이라 믿는 게 신앙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소설을 쓰면서 당대의 팔레스티나를 이해할 수 있는 자료를 훑어보았습니다. 그들의 생활사를 살피고 재현하면서, 복음서에 관한 현대 성서학자들의 견해를 참고하였습니다. 특별히 “예수님이 선포한 복음은 온전히 사회적”이라는 관점을 유지하였습니다. 당대의 현실 속에서 고통 받던 백성들의 신음소리를 경청하고 응답하려는 모습 속에서 그분을 발견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이 치유자인 까닭을, 그분이 해방자인 연유를, 그분이 구원자인 이유를 찾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요 그대>, 이 소설은 역사적 예수를 재구성하려는 의도로 지은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교리에 얽매어 예수님을 숨통을 막을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 자유롭게 하느님을 살았던 한 사람을 그려보고 싶었을 뿐입니다. 사랑하기 위해서 자유롭게 되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소설에서 말하고 싶었습니다.

이 소설을 읽는 동안, 독자들이 등장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되어 예수님을 만나고, 때로는 예수님의 심정이 되어 사람들을 바라보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여러분이 그분을 만나 다시 사랑을 나누고, 그 사랑으로 고단한 생애를 무사히 건너가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종교와 교회, 신앙과 교리는 그저 그분에게로, 그분의 사랑으로 건너가는 수단이며, 살기 위해 절망 가운데 희망을 건져 올리려는 사람들의 안간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소설 말미에서 담아 놓은 마리아 막달레나의 이야기를 한 자락을 남기면서 여러분의 마음에 가서 닿으려고 합니다.

우리는 타브가 언덕에서 갈릴래아 호수를 바라보며 날마다 “가난한 이들은 행복하다.” 하신 말씀을 되새기고, 길에서 만난 사람들을 위해 기도를 합니다. 선착장에서 어부들이 잡아온 물고기를 나르고, 텃밭에서 채소를 키우고, 마을의 여인들과 바느질하며, 막달라 너머에 사는 나병환자들을 찾아가 돌봅니다. 나자로는 저희에게 토라를 가르치고, 요한과 마리아는 저와 함께 티로와 사렙타와 시돈까지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카이사리아 필리피와 다마스쿠스까지 다녀온 적도 있습니다. 그들에게도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고, 예수님이 바라던 세상을 가르칩니다. 그곳에도 저희를 환대해 주고 우정을 약속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이 아니지만, 저희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을 경외하는 백성입니다. 예수님은 도처에 계시고, 저희는 어디서나 그분을 만납니다.
(<그래요 그대, 488쪽)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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