앎: 알면 앓고, 앓으면 통하고, 통해서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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앎: 알면 앓고, 앓으면 통하고, 통해서 아름답다
  • 이연학
  • 승인 2022.04.24 23:55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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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연학 신부의 [영성의 우물에서 길어 올린]

말씀을 바탕으로 걷는 영적 여정에 ‘앎’ 또는 ‘지식’이란 주제는 영적 생활의 한 급소와도 같이 치명적으로 중요하다. 성경에서 ‘관상’(觀想)이란 단어를 대체할 수 있는 말을 하나만 대라면 그게 바로 앎(gnosis) 또는 지식이기 때문이다. 사실 성경 전체를 통틀어 통상 쓰는, 예수님께 눈길을 떼지 않고 하느님 말씀을 경청하며 거기 고요히 머무르는 기도라는 의미로는 관상(theoria)이란 단어가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앎과 앓음과 아름다움

성경에서 말하는 ‘앎’은 통상의 관점을 여러모로 배신한다. 그것은 먼저 ‘머리’에서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 경험에서 생기는 앎이다. 약간 과장해 말하자면, 그것은 머리보다 ‘배’에서 벌어지는 사건이다. 여자가 남자를 ‘알면’ 배가 불러오고 열 달쯤 뒤엔 새 생명이 탄생하기 때문이다. ‘(요셉은) 아들을 낳을 때까지 아내를 알지 않았다.’(원문 직역, 마태 1,25 참조)나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루카 1,34) 등의 구절에서 성경의 이런 용법을 확인할 수 있다.

우리 옛말에서 ‘앎’과 ‘앓음’과 ‘아름다움’은 서로 넘나드는 말마디였다고 한다. 아프지 않다면 상대를 아직 제대로 ‘알지’ 못한 상태다. 앓으면서 상대를 알아가는 사람의 얼굴은, 궁극의 의미에서 ‘아름답다.’ 자식 남편 돌보고 집안 건사하느라 앓고 닳아 버린 우리네 어머니들 얼굴처럼. 또는 십자가에 어리석고 무력하게 매달려 망가진 우리 하느님의 얼굴처럼. 알면 앓고, 앓으면 통하고, 통해서 아름답다.

지식[知]과 고통[痛]과 소통[通]과 아름다움[美]은 이처럼 뜻의 원천에서 한두름에 꿰인 굴비처럼 얽히고 엮여 있다. 필경, 성경에서 지식과 사랑(또는 관계)은 다른 말이 아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런 특별한 지식(epignosis)에 삶과 죽음 전부를 걸었노라 고백한다(필리 3,8 참조).

 

사진출처=artuk.org
사진출처=artuk.org

앎과 힘

“아는 것이 힘이다.” 영국이 식민지 경영을 염두에 두고 1916년 런던에 설립했다는 ‘동방아프리카연구소’(School of Oriental and African Studies) 입구 현판에 적혀 있는 글귀다. 세상에서 앎의 목적이 결국 ‘힘’이라는 사실이 이보다 더 뻔뻔스럽고 효과적인 직설로 표현될 수 있을까. 한국 부모들 교육열이 그토록 높은 이유도 결국은 지식이야말로 돈과 권력에 이르는 첩경이기 때문일 터.

그러나 바오로 사도 복음 선포의 정점인 ‘십자가의 말씀’(ho logos toustaurou, 1코린 1,18-31 참조)은, 세상의 관점과 날카롭게 대조되는 전혀 다른 ‘앎’의 견지로 우리를 초대한다. 힘을 가져다주기는커녕 힘의 상실을 초래하는 하느님의 앎 또는 사랑으로. 하느님께서 과연 사랑이시라면(1요한 4,8 참조), 또는 우리를 참으로 ‘아시는’ 분이라면, 이 사랑과 지식의 낙처(落處)는 십자가일 수밖에 없다.

깊이 알면 늘 다친다. 더 사랑하는 이가 늘 약자일 수 밖에 없다. 세상에서 없는 취급당하게 하고 마침내 완벽하게 없어지게 되는 지점으로(그러니까 십자가로!) 이끄는 이런 지식 또는 사랑은 과연 세상 상식의 견지에서는 어리석고 미친 짓으로까지 보인다. 그러나 하느님의 이 어리석음이 세상이 떠받드는 지혜보다 더 지혜롭다. 하느님의 이 무력함이 세상 권력보다 더 힘세다(1코린 1,23-25 참조).

앎과 알려짐

그렇다면 이런 앎의 과정은 실제 어떻게 진행되는가. 여기서도 성경은 우리의 상식을 뒤집어엎는다. 거두절미하고 말하면, “알려질 때 안다.” 나타나엘은 애초 필립보가 나자렛 예수님에 대해 말할 때 그분을 몰랐다. 필립보가 그를 데리고 예수님께 갔을 때, 예수님께서 먼저 그를 알고(보고) 계셨다. 그는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을 때부터 (그러니까 영원으로부터) 자기가 그분께 알려져 있다는 것을 불현듯 알아차렸다. 그리고 깜짝 놀란 그 순간에야 그분의 참모습을 알아뵙고 고백하였다(요한 1,46-49 참조).

‘내가 지금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내가 하느님께 온전히 알려져 있듯(원문 직역) 나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1코린 13,12 참조)라는 말씀이나 ‘(여러분이) 지금은 하느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니, 여러분은 하느님께 알려졌습니다.’(원문 직역, 갈라 4,9 참조)라는 말씀도 궁극에는 같은 이치를 말해 준다.

‘찾는 자’는 이 자리에서 자신이 ‘찾아진 자’임을 깨닫는다. ‘아는 자’이기 전에 ‘알려진 자’임을 보게 된다. 이제부터는 그가 말씀을 읽는다기보다 말씀이 그를 읽으신다. 이리하여 비로소 그는 하느님을 조금씩 ‘알아 가기’ 시작한다.

이 주객전도 체험의 충격만이 비로소 눈에 덮여 있던 ‘비늘’을 벗겨 내어(사도 9,18 참조), 영적 여정의 주도권이 하느님께로 넘어가기 때문이다. ‘빛으로 빛을 뵙는’(시편 36,10 참조) 여정은 이런 식으로만 시작된다.

 

사진출처=news.providence.edu
사진출처=news.providence.edu

알면 닮는다

“진리를 실천하는 이는 빛으로 나아간다.”(요한 3,21)라는 말씀도 이 맥락에서 더 잘 알아들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느님 현존의 빛 앞에서 제 살림살이의 진실이 있는 그대로 노출되고 비추어질 때 진리 또는 진실은 ‘실천’된다. 이렇게 제 진정성의 극진한 자리에 들어서게 될 때, 비로소 사람은 하느님과 자기의 본래면목을 ‘감 잡게’ 된다. 그리고 놀랍게도, 빛 앞에 환히 드러난 죄스럽고 남루하고 구차한 진실은 빛을 받아 같은 빛으로 ‘거룩한 변모’를 이룬다.

“밖으로 드러나는 것은 모두 빛으로 밝혀집니다. 밝혀진 것은 모두 빛입니다”(에페 5,13-14). (옛 라삐들과 교부들은 한 성경 구절에 전혀 다른 구절을 자유로이 이어 붙여 묵상하곤 했는데 이를 ‘미드라시’라 불렀다.-필자 주)

우리 안에 잠재한 하느님의 모습(imago)은 이런 방식으로 실현되어 점차 하느님을 닮기(similitudo)에 이른다. 이를 교부들은 ‘신화’(神化, deificatio)라 불렀다.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1요한 3,2)라는 말씀의 뜻이 환해지는 것도 이 대목에서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을 알아가는 이 여정이 자기 인식의 여정과 온전히 겹칠 수밖에 없다는 이치도 더 잘 알아듣게 된다.

우리의 앎은 이 지점부터, 14세기 어느 영국 신비가가 ‘무지의 구름’(Cloud of Unknowing)이라 일컬은 관상의 여정에 본격적으로 들어선다. 그리하여 다음호 우리의 주제어는 ‘모름’ 또는 ‘무지’(無知)가 될 것이다.

 

* 이 글은 <경향잡지> 2022년 3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이연학 신부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도회 수도자.
수도원 창설 소임을 받고 미얀마 삔우륀에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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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로사 2022-05-04 23:31:57
아!
감사합니다.
두고두고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