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연합예배, 도깨비들의 잔치는 아니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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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연합예배, 도깨비들의 잔치는 아니었는지
  • 이원영
  • 승인 2022.04.19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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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영 칼럼

부활절연합예배의 다른 모습

교회력으로 2022년 4월 17일(일)은 부활절이었다. 부활절은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가 3일만에 다시 살아난 날이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이 날을 기념하고 함께 기뻐하며 예배를 드린다. 특별히 지역마다 교회들이 모여 연합예배를 드리고 기쁨의 교제를 나눈다.

코로나로 묶였던 집회가 완화되어 올해는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부활절연합예배로 모였다. 대형교회에서 모인 만큼 교계를 대표하는 목사들과 정관계 지도자들, 문재인 대통령의 축하메세지, 그리고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이 참석했다. 한 언론은 이 날의 전체적 풍경을 이렇게 적고 있다.

‘부활의 기쁜 소식, 오늘의 희망’을 주제로 성대하게 드려졌다.

같은 날 혜화동 거리에서 또 다른 부활절연합예배가 진행되었다. ‘고난받는 이들과 함께하는 부활절연합예배’로 주제는 장애인 이동권 투쟁과 함께 했다. 야외무대를 설치하고 플라스틱 간이의자를 깔고 예배를 진행했다. 교계를 대표하는 이들은 없었으나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로마 12,15)’의 말씀을 실천하려는 신자들이 모여 평화의 인사를 나누고 장애인들의 장벽을 허물기 위해 기도했다.

마로니에광장에 있는 야외무대를 빌리고 싶었지만 먼저 공연이 잡힌 것인지 아니면 여의도순복음교회의 부활절예배에 참석한 서울시장의 불허인지 허가를 받을 수 없었다고 한다. 서울시에 집회신고를 하고 혜화동 2개 차선을 점유하고 모인 예배여서 교통체증을 일으켰다. 몇몇 운전자들은 불만을 표하기 위해 가속패달을 밟거나 경음기로 소음을 내며 지나갔다.

두 모임은 부활절연합예배라는 같은 이름으로 모였지만 너무도 다른 풍경이었다. 이들은 다른 종교의 사람들이 아니었다. 모두 기독교(개신교)였다. 같은 종교인들이 같은 부활을 기념하는데 극명한 차이를 보인 것일까?

 

부활은 어떤 의미인가?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설교한 소강석 목사는 부활에 대해 이렇게 언급했다.

“예수님은 장사한 지 사흘 만에 세마포에서 나오셨다. 세마포에서 나오신 예수님은 무덤 문을 박차고 나오셨다. 예수님의 부활은 어떤 사건으로서의 부활이나 의미로써의 부활이 아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상 팩트로서의 부활이요, 역사적 사실로서의 부활이었다”

소강석 목사는 부활이 사건으로서 의미보다 역사적 사실이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다시 말해서 어떤 해석의 여지도 없이 예수는 육체적 부활을 했다는 객관적 사실이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들린다. 의미없는 사실은 힘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실임을 강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성서는 예수의 부활을 언급할 때 사람의 아들에서 하느님의 아들로, 사람에서 신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를 통해 초기 그리스도교는 마르코의 다락방 사건 후 두려움 없이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 이를 문자적으로 받은 한국교회는 부활의 역사성을 그리스도교의 절대성을 담보하는 것으로 여긴다. 부활의 종교인 그리스도교가 절대적 진리이기에 모두가 예수를 믿고 교회 안으로 들어와야 하고 타종교나 이성적 사고를 백안시한다.

하지만 인간세상에서 절대성이란 존재하지 않다. 아무리 예수 십자가를 앞세워도 절대적이란 이름을 내거는 순간 영적 권위란 그늘 속에 위계와 폭력 낳고 신의 임재는 사라진다. 그것이 중세교회의 모습이었고 명분 뿐인 십자군 원정이었으며 서구중심주의의 선교정책이었다. 타락한 부활 신앙은 너와 나를 구분짓고 편을 가르고 너를 밟고 올라가는 성공, 성장, 승리가 최고의 가치다.

반면 거리에서 고난받는 이들과 함께하는 부활절 연합예배에서 옥바라지선교센터 하민지 님은 이렇게 기도했다.

“하느님, 이 세상에 후순위로 밀려나도 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인간의 기본권 보장에 관한 법과 정책이라면 없는 돈도 만들어 와서 예산을 편성하고 기본권을 보장해야 합니다. (중략) 책임 있는 자들은 장애인의 권리를 나중으로 미루고 있습니다. (중략) 하나님, 저는 인수위가 장애인권리예산 보장을 약속하도록 해달라고 기도하고 싶지 않습니다. 투쟁하고 저항할 힘을 달라고 기도하고 싶습니다. (중략) 우리가 더 꿋꿋이 투쟁하도록 힘을 주소서. (중략) 모든 멸시와 모욕과 혐오와 조롱과 차별 한가운데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힘으로 매일을 싸울 수 있게 하시고 하느님 당신께서 이 싸움에 함께하소서.”

죽여도 죽일 수 없는 부활의 주님이 함께 하시는 기도다. 부활을 믿기에 멸시와 조롱받아도 멈추지 않고 하느님 나라 운동은 계속 된다. 성서의 언어는 정제된 언어다. 신앙인은 성서를 읽을 때 초기 그리스도인의 투쟁과 저항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기득권을 향한 투쟁과 저항이 없었다면 예수의 십자가도 초대교회의 핍박도 없었을 것이다.

부활의 핵심

나는 예수 부활의 역사성과 함께 반드시 사건의 의미를 함께 가져가야 한고 확신한다. 예수의 부활은 예수의 하느님 나라 운동과 맥을 같이 하기 때문이다. 예수는 공생애 초기부터 하느님 나라를 이야기하고 온 몸으로 살아내었다. 하느님 나라 운동은 권력자들을 불안하게 했다. 하느님 나라란 새 세상이 도래하면 그들이 가진 모든 것을 빼앗길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권력자들은 예수를 죽여 하느님 나라 운동의 행진을 막으려 했다.

그들의 생각처럼 예수의 죽음과 함께 많은 무리들, 심지어 그의 제자들까지 숨고 흩어졌다. 예수처럼 죽을 것이라 생각해서다. 하지만 예수는 죽고 다시 살아났다. 하느님 나라 운동은 예수의 부활과 함께 다시 시작되었다. 제자들은 확신하게 되었다. 예수처럼 사는 하느님 나라 운동은 결코 죽일 수 없다는 사실을.

물질과 권력을 섬기고 추구하던 이들이 부활 이후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하느님 나라 운동으로 가난하고 억눌린 이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기쁨을 맛보게 되었고 새로운 가치관으로 하느님 나라라는 대안적 세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것이 부활의 표징이요 부활의 핵심이다.

부활마저 타락한 그리스도교

부활절연합예배의 두 얼굴을 통해 부활마저 타락한 것은 아닌지 의심스럽다(정확하게 말하면 부활이 타락했다기 보다 부활을 해석하고 이용하는 이들이 타락했다고 해야 옳겠다). 부활마저 타락한 그리스도교,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올해(2022년) 1월에 입적한 틱낫한 스님의 책 <소를 찾아가는 열가지 이야기> 중 ‘무사의 돋보기’라는 이야기가 있다.

산에서 오랜 수련 후 세상으로 내려가 도를 실천하고 백성들을 돕고 싶은 무사가 있었다. 그는 스승의 허락을 받고 세상으로 내려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으나 실상은 갖가지 탈을 뒤집어 쓴 악귀를 물리쳤다. 악귀를 물리치고 사람들에게 도를 전파할 수 있었던 것은 스승에게 받은 칼과 돋보기 덕이었다.

“마귀들! 당장 물렀거라!”

무사의 돋보기는 거룩한 노스님, 존경심이 우러나는 용모의 관리, 정결하고 아름다운 사람의 본 모습을 보여주었다. 돋보기로 본 이들은 실천없는 도깨비, 탐관오리, 사람의 마음을 유혹하는 몸뚱이에 불과했다. 그는 스승이 주신 칼로 본 모습을 밝히고 혼을 내주었다. 그는 도시와 마을을 떠돌며 보검과 돋보기로 마귀를 물리치고 개도(開導)했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 갔다.

세월이 꽤 흐른 어느날 그는 언제부턴가 돋보기를 사용히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일까? 참된 성자를 보고도 기쁘지 않았고 마귀를 보고도 분노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귀나 괴물들이 친근하게 보였다. 이런 연유를 알기 위해 스승을 만나려고 산사에 올랐다. 하지만 산사의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아무리 힘을 쓰고 담을 넘어려 해도 도리가 없었다.

물가에서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던 중 수면에 비친 자신을 보게 되었다. 세상에 나가 한번도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지 않았던 사실을 알고 돋보기를 들여다보는 순간 그는 놀라 쓰러졌다. 두 눈이 깊고 시커먼 우물 속 같고 기다란 송곳니가 넓적한 턱 아래로 휘어져 내린 마귀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 얼굴은 죽은 자의 얼굴빛을 하고 있었다. 무사는 어떻게 해서 그 자신이 마귀로 변한 것일까?

그는 하산할 때 스승이 한 말을 잊고 있었다.

“너에게 특별히 당부할 게 있구나. 너 자신에게든 남에게든, 현재에든 미래에든 고통을 초래할 짓을 해서는 안 된다. 너 자신과 남들을 완전한 깨달음으로 인도하는 길로 두려움을 떨치고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행복과 고난, 자유와 미망을 가름할 규범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그것이 없으면 너는 도를 실천하지 못할 것이고 누구에게도 도움을 주지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절대적 진리를 담은 성서와 하느님의 뜻을 깨닫는 기도와 분별할 수 있는 신앙공동체를 갖고 있다. 성서, 기도, 신앙공동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일구는 돋보기와 칼일 것이다. 하지만 자신을 성찰하지 못하면 하느님 나라를 구현하기는 커녕 ‘너나 잘 하세요’란 비난과 조롱거리가 된다. 한국교회는 성서라는 돋보기로 자신을 성찰해야 한다. 우리가 얼마나 주님의 부활과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똑똑히 봐야 한다.

부끄러운 사실은 돋보기 없이도 세상은 교회의 민낯을 이미 보았다는 점이다. 대형교회에서 있었던 부활절연합예배가 돈과 권력에 물든 도깨비들의 잔치는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이원영 
노동이 기도요 기도가 노동인 삶을 추구하는
포천 사는 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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