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들어 있을 때 그리운 것이 많다는 것은 축복이다
상태바
병들어 있을 때 그리운 것이 많다는 것은 축복이다
  • 장진희
  • 승인 2022.04.13 14:1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장진희의 시와 산문
사진=장진희
사진=장진희

자가격리 열하루째.
공식적으로 자가격리는 어제로 풀렸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격리중이다.

"잠 산에 뫼 썼냐?"
어릴 때 엄마한테 듣던 말이다.
형제들은 나를 "잠 자는 숲속의 공주"라고 놀렸다.
기쁜 일이든 나쁜 일이든 나이가 많든 적든 살아간다는 일은 늘 고단한 일이었을 것이다.
주말이면 하루 종일 밥도 안 먹고 어쩔 때는 24시간 이상을 잤다.
나를 지켜본 친구들은
"잠이 보약"이라 말한다.
아닌 게 아니라 잠만 실컷 자면 크게 아픈 데 없이 산다. 그렇지 못하면 탈이 났다.

지금 그렇게 잔다. 하루의 반 이상을.
아침에 눈을 떠도
화장실 한번 다녀온 뒤로는 도로 구들장 신세를 지다
해가 중천에 뜨도록 자다 깨다...
아침 겸 점심을 먹고는 좀 움직이다 어느새 또 잠이 든다.
오후 두 시가 넘어서야 해가 아깝다는 생각을 겨우 해낸다.
신성한 새벽, 아침 해를 맞이하지도 못하는 하루가 미안하거나 좀 우울하지만 그조차도 욕심일 것이다.
몸이 시키는 대로 하자.
코로나 바이러스가 물리적 원인이라 하더라도
내 몸이 이렇듯 한정없이 잠만 자고 싶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평생 이렇게 쫒김없이 원없이 잠을 자는 건 처음일 것이다.
미역장시를 딱 십년 했다. 이런저런 애환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대체로 즐거이 기꺼이 했다.
최근에는 장사 나가는 날을 많이 줄였지만
어찌 됐던 십년을 장바닥이나 천지사방 마을을 다니며 장사를 했다. 풍찬노숙 십년?
그 전에는 어쨌는가? 산으로 들로 바다로 원없이 수렵채취하러 다니고
농삿일, 집 짓는 일, 트럭 끌고 다니며 온갖 노가다일...
돈이 필요할 때면 학교 선생 일...
살아 있다는 것은 쉬임없이 움직인다는 것. 움직이는 물건인 동물의 본분. 몸 움직여 일할 때
기와 기쁨이 흘렀다.
그러나 이제 내 몸이 긴 잠을 원하고 있다.

"와경산수"라는 말이 생각났다.
늙어서 산천구경을 다닐 기운이 없을 때 누워서 산천구경 하라고 그렸다는 그림.
진도에서 투병중인 [몽유진도]의 시인 박남인이 문밖에 거의 나오지 못하고 시를 써서 보낸다. 오자인지 시인의 언어인지 구별하지 못해
다 해독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칭 '뱀시'들이 좋다.
한평생의 그리움이 다 녹아 있다.
각자 동문서답, 마이동풍으로 자기 시만 서로 던진다.
그러다 깨닫는다.
그러니까 사실은 그리움을 공유하고 있는 거구나.
차마 그립다는 말조차 생각조차 하지 못했는데
나도 그리웠던 거구나. 그 시들이 내 그리움을 일깨우고 있었구나.

진도의 바닷가 마을. 박남인의 아내 명수 씨는 우리 마을 한가운데에 있는 보건소 소장이었다. 직원이 소장 한명뿐인 보건소. 나는 바닷가 우리집에서 걸어서 20분 정도 거리의 마을로 마실을 가곤 했다.
태풍으로 바다가 끓어넘쳐 솔숲까지 파도가 덮치던 날
그 바다에 나와 막걸리를 나누어먹던 날들
강계 바다 갯샘 앞
굴회무침 남은 양판에 밥을 비벼주던 청자네
구멍가게 윤경이네
강계 갯벌에서 조개를 캐다가 올려다보던 여귀산
이맘때 그 산 아래 묵은 논자리에서
계곡물소리 새소리 따라 캐던 불미나리, 멍애(머위)...
박남인은 겨울이면 두툼한 내복을 명절선물로 건네곤 했다.
그 내복들은 올겨울에도 나를 춥지 않게 해주었다. 해진 곳은 기워서 따숩게 입고 있다.

늙거나 병들어 있을 때
그리운 것이 많다는 것은 축복이다.
투병중인 시인이 종일 써내는 시들은 와경산수, 그리운 것들에 대한 기록이다.

오후 세 시가 넘어서야 집을 나서 석곡까지 가서 지저분하게
자란 머리를 잘랐다.
그리고 그리운 것들을 따라
봄이 완연한 강줄기를 따라
걷는 건 오늘은 쉬고
차를 몰고 주암댐까지 보성강변을 돌아보고 왔다.

 

장진희
돈 안 벌고 안 쓰고 안 움직이고
땅에서 줏어먹고 살고 싶은 사람.
세상에 떠밀려 길 위에 나섰다.
장터로 마을회관으로.
곡성 죽곡 보성강변 마을에서 살고 있다.

 

종이신문 <가톨릭일꾼>(무료) 정기구독 신청하기 
http://www.catholicworker.kr/com/kd.html

도로시데이영성센터-가톨릭일꾼 후원하기
https://v3.ngocms.co.kr/system/member_signup/join_option_select_03.html?id=hva82041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