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성녀 프란체스, 결혼에서 성소를 발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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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성녀 프란체스, 결혼에서 성소를 발견하다
  • 브랜든 보트
  • 승인 2022.04.04 13: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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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공동체, 그리고 참여에의 초대-로마 성녀 프란체스 1

나는 프란체스 성녀(santa Francesca Romana, 1384-1440)의 비극적인 가족사를 자세히 알기 전에 그에 대하여 쓰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그의 신앙과 불굴의 용기에 대하여 더 알게 될수록 나는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더욱 감명을 받았다. 성녀의 이야기를 읽어가며 당신은 그가 상실을 견디어냈던 것에 감동하고 슬퍼할 것이지만, 또한 시련의 파도 그 너머를 보고 그가 가족과 공동체 생활에 적용했던 지혜와 은총을 깨달으라고 격려한다.

프란체스 부싸가 1384년 태어났을 때 교회는 심각한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교황권은 프랑스 왕조의 영향 아래에 떨어졌고 부패로 악명을 떨치고 있었다. 더 상황이 악화된 것은 비록 합법적 교황이 이미 통치하고 있었는데도, 1378년 주교들 다수가 새 교황으로 제네바의 로베르토를 선출한 것이었다. 이로써 서방의 대분열이 시작되었다. 악폐, 혼란 그리고 갈등이 교회를 조각내었고, 내분과 시민전쟁을 발생시켰다. 프란체스의 전 생애는 40년 동안의 대분열 시기에 전개되었다.

고맙게도, 어린 소녀의 부모는 딸을 종교 분리의 최악의 영향으로부터 보호하였다. 바오로와 쟈코벨라는 각각 로마의 저명하고 부유한 가족에 속했다. 자코벨라는 조용하고 열심한 신자였으며, 바오로는 굳건한 지도력과 단호함으로 주민들의 존경을 받았다. 두 부부는 모두 깊은 종교심을 지니고 있었다. 프란체스가 성장했을 때, 그의 가족은 베네딕토회 수도자들이 맡고 있는 근처 교회, 산타마리아 누오바를 자주 방문했다. 그들은 특히 돔 안토니오라는 수도자와 가까이 지냈다. 이 수도자는 쟈코벨라의 영적지도자가 되었고, 쟈코벨라는 점차 프란체스를 돔 안토니오에게 맡겼다.

프란체스는 매우 신심이 깊은 처녀였다. 고독과 기도 생활에 이끌리면서 그는 하느님이 자신에게 수녀가 되기를 원한다고 결정했다. 그는 이 사실을 부모에게 알리지 않았고, 다만 돔 안토니오에게만 말했다. 현명한 이 수도승은 프란체스에게 생활 규칙을 정해주었는데, 영구적으로 수도생활에 들어가기 전에 금욕적인 수도생활을 실습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프란체스는 그 생활 방식을 사랑했다. 생활 방식은 그가 희망했던 모든 것이었다. 그는 몇 시간을 기도 속에 홀로 보냈고, 하느님과 대화를 나누고, 자기 의지를 확고히 하기 위하여 엄격한 희생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11살에 프란체스는 자기 마음을 정했다. 그는 수녀가 되길 원했다. 그는 부모에게 가서 수도원에 들어갈 허락을 청했다.

그의 어머니는 프란체스의 생각에 근본적으로 열려 있었다. 어머니는 프란체스가 수도생활에 얼마나 기울어 있는지 감지했다. 그렇지만, 그의 아버지는 완강하게 거부했다. 그런 반대만으로 젊은 프란체스가 놀라지 않자, 아버지는 그가 반대하는 이유로 딸을 귀족가문의 젊은 청년, 로렌조 폰지아노와 결혼시키기로 이미 주선했다고 설명하였다. 말을 지키는 사람인 아버지가 그 약속을 취소하도록 만들기는 불가능하였다.

프란체스는 울면서 뛰어나갔다. 그는 하느님께 결혼을 막아달라고 간청하고 돔 안토니오에게 뛰어가, 아버지의 마음을 돌리게 도와달라고 애걸하였다. 프란체스의 슬픔에 귀를 기울이고 나서 돔 안토니오는 대답했다: “너는 하느님의 뜻에 따르고 싶어 울고 있는지, 아니면 하느님이 너의 뜻을 따라주기를 원해서 우는 것인지 알아야 한다.”

이 질문이 프란체스의 흐르는 눈물을 멈추게 하였다. 그는 자기가 수녀가 되고 싶다는 것을 알았으나, 그것이 하느님의 뜻인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비록 마음이 아직 안정되지는 못했지만, 그는 집에 돌아와서 아버지의 결정에 순종하겠다고 공표했다. 그는 아직도 수도공동체에 입회하기를 염원했지만, 로렌조와 결혼함으로써 다른 방식으로 공동체를 발견하게 될 것이었다.

 

가족을 통하여 하느님을 발견하기

얼핏 보면, 결혼은 이상적으로 보였다. 다른 젊은 여성들은 로렌조 같은 남자와 결혼하는 것에 기쁨이 넘쳤을 것이다. 로렌조는 잘 생겼고, 고결하고, 부유하고 마음이 선했다. 로마의 교황 수비대 대장으로서, 그는 큰 존경을 받았고 아낌없이 살았다.

그러나 수줍은 프란체스에게는, 이 생활이 악몽과 같았다. 시어머니, 체실리아는 프란체스를 심하게 몰아세우고, 적극적으로 사교계의 주인공이 되라고 하며 몸치장을 하도록 강요하였다. 우아한 결혼식과 파티와 잔치의 회오리바람 후에, 13살난 이 소녀는 피로에 만신창이가 되어 쓰러졌다. 프란체스는 수개월동안 죽을 고비에 있었고, 먹거나 말할 수도 없었고, 심지어 하느님께 자기를 데려가 달라고 기도했다.

그러던 어느 날 프란체스는 5세기에 살았던 소년인 성 알렉시스의 환영을 보았다. 성인은 프란체스처럼, 원하지 않는 결혼을 하도록 강요를 받았다. 환시에서 알렉시스는 하느님께서 프란체스에게 자기와 비슷한 선택을 제시했다고 말했다. 즉 프란체스가 회복이 되든가 안 되든가 둘 중의 하나였다. 그는 헌신적인 신부가 되든가 아니면 포기하고 이 삶으로부터 도망가든가 하는 선택 앞에 서게 되었다. 결정은 프란체스에게 달려있고 하느님은 그가 무슨 선택을 하든 간에 허락할 것이었다.

비록 완전히 비참한 상태에 있었지만. 프란체스의 신앙심은 자신의 약함을 이겨냈다. 그는 속삭였다, “하느님의 뜻이 나의 뜻이다.” 알렉시스가 대답했다, “그러면 당신은 그분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하여 살아갈 것이다.” 그 대답을 듣고서 프란체스는 일어나 앉았고 즉시 피로에서 치유되었으며, 남편을 보살피기 시작하였다.

이 새로운 결심으로 그의 문제들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프란체스는 여전히 자기가 아내로서 부적절하다고 느꼈다. 프란체스와 로렌조는 들쑥날쑥 뻗어 있는 궁에서 시어머니 체칠리아, 로렌조의 동생 팔루쪼, 팔루쪼의 부인 바노짜 그리고 수 명의 하인들과 함께 살았다. 체칠리아는 프란체스에게 바노짜처럼 허풍스럽고 사교적이지 않다고 잔소리를 해댔다. 바노짜는 우아한 파티에 참석하여 화려한 옷을 뽐내기를 좋아했고, 매우 헌신적인 부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어머니의 불평은 프란체스를 괴롭혔고 수차례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다. 어느 날 바노짜가 정원에서 눈물에 젖어있는 프란체스를 발견했다. 무엇이 잘못되었느냐고 물었을 때, 프란체스는 바노짜에게 온 마음을 드러냈다. 프란체스는 자기의 갈등, 신체적 아픔과 알렉시스 성인에 대한 환시 등을 이야기하였다. 그는 자기의 천박한 오락으로 가득한 삶이 진정한 소명을 추구하지 못하게 했다고 불평했다. 그는 자기를 온통 주님께 바치고 싶어 했다.

프란체스가 슬픔을 그쳤을 때, 바노짜는 몸을 굽혀서 이 젊은 처자를 위로하였다. 그리고 자기 역시 하느님께 온 마음을 다 드리고 싶어 한다고 하면서, 결혼 생활이 자기에게도 쉬운 것은 아니라고 밝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노짜는 결혼을 봉헌생활과 대치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자기를 봉헌하는 하나의 출구로 보기 시작했을 때, 상황은 완전히 바뀐다는 것을 배웠다.

프란체스는 가족 안에서 같은 정신을 발견하면서 생기를 회복하였다. 그와 바노짜는 부인들로서 그들의 소명을 꽃피우는 데에 서로를 돕기로 결정하였다. 그들은 거룩함을 위하여 상호적인 계획을 짰다. 그들은 결혼의 의무를 깊은 결단으로 수행할 것이었다. 주님을 섬기는 것처럼 남편들을 섬기고, 기도, 자선, 그리고 속죄의 행위를 통하여 내적인 지성소를 유지할 것이었다.

그들은 함께 지역 병원들을 방문하고 간호원을 도와 아픈 이들을 돌보고 음식과 의복을 분배하였다. 프란체스는 계속 돔 안토니오에게 가서 매주 고백성사와 영성체를 하였다. 집에서 두 동서들은 한 낡은 건물 안에 비밀 기도소를 만들고 해야 할 일을 끝낸 후 그곳에서 조용히 기도하였다.

바노짜는 아내가 된다는 것이 하느님을 뒤에 남기고 떠나는 것이 아님을 프란체스가 볼 수 있도록 도왔다. 다시 말하자면 결혼의 일상적인 과제들을 통하여 오히려 더 깊게 하느님을 발견하는 것을 의미했다. 후에 프란체스가 다음과 같이 인용한 말에서 단언한 것처럼, 그는 이런 측면에서 가장 기억되고 있다: “결혼한 여성은 부름을 받았을 때, 제단에서 하느님을 섬기는 것을 그만두고, 집안일에서 하느님을 찾아야 한다.”

1400, 프란체스는 네 아이들 중 첫째인 아들, 바티스타를 낳았다. 일 년 후, 시어머니 체칠리아가 세상을 떠나자 폰지아노 장원의 모든 사람들은 프란체스가 비록 16살이고 과묵해도, 안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동의하였다. 그리고 그 결정은 탁월한 결정이었음이 증명되었다. 프란체스는 효율적인 행정가였고 공정하며 자비로운 고용주였다. 그는 특히 하인들의 영적 필요에 주의를 기울였으며 모두가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공동체로 창조되다

그러나 하느님은 사람을 홀로 있는 존재로 창조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시작부터 그분은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기때문이다(창세 1,27). 그들의 동반관계는 최초의 상호인간적인 친교 형태를 만들고 있다. 가장 깊숙한 본질에 의하여 남자는 사회적 존재이므로,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연결시키지 않는다면 살아갈 수도 없고 자신의 가능성을 발전시킬 수도 없다

-기쁨과 희망, 12

<출처> [성인들과 사회정의>, 브랜든 보트
<번역문 출처> [참사람되어] 2017년 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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