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상 없는 행동, 비전 없는 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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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상 없는 행동, 비전 없는 정치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2.03.14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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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하느님] ,케네스 리치, 청림출판, 2009
Daniel Joseph Berrigan
Daniel Joseph Berrigan

오를레앙에서 태어난 프랑스 작가 샤를 페기(Charles Péguy, 1875~1914)는 잔다르크를 흠모했다고 전해지는데, 그이는 “가치 있는 모든 것은 신비주의에서 시작해서 정치로 끝맺는다”고 했습니다. 도로시 데이의 친구이며 반전평화운동가였던 대니얼 베리건 신부(Daniel Joseph Berrigan SJ, 1921~2016)는 “관상은 전복적인 행위”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관상과 저항, 신비와 예언이 분리될 수 없다는 확신을 얻게 합니다. 이른바 관상가/신비가들이 사회적 예언에서 단절되는 순간 “가장 영적인 것이 가장 강력한 우상숭배가 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사회적 예언과 분리된 관상/신비/영성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버는데 쓸모 있는 상품이 되기도 하니, 드리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토머스 머튼(Thomas Merton, O.C.S.O. 1915~1968)은 ‘사이비 내면성’을 경계합니다. 사이비 내면성/관상/신비/영성은 “충돌을 피하고 긴장을 줄이는 데”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참혹한 세상에서 눈을 돌려 난공불락의 자기애적 안전지대에서 평화를 찾습니다. 이런 태도를 머튼은 <관상적 기도>에서 “거짓자아 안에서 누리는 환각”이라고 비판합니다.

“거짓 자아는 오직 자신만을 위해 살고 또 자신만을 위해 ‘기도의 위안’을 즐기려 한다. 이러한 ‘자아’는 순전히 환각이며, 그러한 환각을 위해, 그러한 환각에 의해 사는 사람은 결국 혐오감이나 광증으로 종지부를 찍게 된다.”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들어갔던 토머스 머튼도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전쟁과 소란을 피해 ‘하느님을 만나러’ 수도원에 들어갔고, 그 회심 과정을 소상하게 <칠층산>(1948)이라는 책에 담았습니다. 이 책은 <명상의 씨>(1949)와 함께 머튼을 베스트셀러 작가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하지만 수도생활이 깊어지면서, 머튼은 <칠층산>의 저자는 죽었으며, 자신은 이미 그 책의 입장을 넘어섰다고 말합니다. 그 시기의 자신을 “피상적으로 경건한, 더 정확히 말하자면 완고하고 편협한 젊은 수도자”로 불렀습니다. 훗날 머튼은 “참된 고독은 세계와 거리를 두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머튼이 방콕에서 행한 생애의 마지막 강의라고 말할 수 있는 <마르크스주의와 수도원주의의 관점들>에서 “실제로 수도자는 세상을 버리기도 한다. 세상의 깊은 곳에서 나오는 가장 심오하면서도 가장 무시되고 있는 소리들을 더욱 잘 듣기 위해서만” 그렇게 한다고 말합니다. 수도자들은 침묵과 고독 가운데 머물며 하느님의 미세한 음성을 듣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차별과 배제로 주변화 된 이들이 흐느끼는 ‘가느다란 목소리’를 듣기 위해 귀를 모으는 사람들입니다. 머튼은 “야수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커져서 말이 사라지거나 왜곡될 위험에 처할 때, 나서서 발언하는 것은 수도자의 의무”라고 했습니다.

강자들의 거짓된 언어가 세상을 삼켜버릴 때, 약자들의 음성을 세상에 다시 들려주는 이가 수도자들입니다. 그이들은 하느님의 백성이며, 그분이 사랑하시는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버림받은 이들이 하고 싶었던 말은 “하느님만이 하느님이시다”라는 말입니다. 어느 누구도 하느님처럼 군림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런 점에서, 수도자란 “인간의 근본적인 경험을 더욱 깊이 경험하기 위해 일부러 사회 주변부로 물러난” 사람입니다.

 

모든 복음은 사회적 복음이다

성공회 신학자였던 케네스 리치는 <사회적 하나님>이라는 책에서 자신을 ‘거룩한 사회주의자’(Holy Socialist)라고 말합니다. 그는 “모든 신학은 사회적이며 사회적 복음은 없다. 왜냐하면 복음 자체가 사회적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리치 신부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병리적 현상이 나타나는 이유는 신비적인 것과 사회-정치적인 것, 관상적인 것과 예언적인 것이 분리되어 ‘하느님이 사람이 되셨다’는 강생신앙이 사실상 사라졌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들 안에서만 생생하게 현존합니다. 이 세상은 하느님께서 활동하시는 발판이며, 그분이 사랑하시는 백성들이 살아가는 터전입니다. 그러니 이 세상을 두고 다른 ‘천국’을 희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니 하느님 나라는 지금여기에 시작되어야 하고, 하느님을 갈망하는 이들은 그분께서 사랑하시는 백성들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정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단적으로 히브리성서와 복음서에서 하느님과 예수님을 당대의 정치적 환경에서 분리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전복적 신앙’입니다. 예수님은 대중적인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당대의 인습을 깨뜨렸고, 멸시받고 거부당한 사람들을 환대하고, 정치적 전복을 꾀했다는 이유로 비난받았습니다. 시메온이 예수 아기를 축복하고서 마리아에게 “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루카 2,34-35)라고 말한 것은 예수님이 세태에 무난하게 영합하는 분이 아님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리치 신부는 관상이란 하느님의 비전을 발견하는 것인데, “예언은 비전의 산물이기 때문에, 비전의 회복과 예언의 회복은 나뉠 수 없다”고 말합니다. 관상이란 하느님과 비전을 공유하는 것이고, 그분의 시선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본다면 당연히 예언자적 저항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 비전을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나누어 가질 수 없을 때, 종교는 세상이 탐하는 우상숭배에 그들 역시 빠져든다고 지적합니다. 결국 종교의 실패는 비전의 실패이며, 비전이 없다면, 복음적으로 행동할 수 없을 것입니다.

관상과 투쟁

하지만 관상과 비전의 발견은 고통스러운 경험을 동반한다고 리치 신부는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관상은 점잖게 내적 평안을 추구하거나 갈등을 피하려는 노력이 아닙니다. 명료하게 세상과 자기 자신을 하느님의 시선으로 읽어내는 자기 정화의 과정을 요구합니다. 이런 급진적 정화의 필요성은 ‘사막’이라는 관상기도의 상징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막은 하느님이 종종 부재하거나 무서운 형태를 취하며 나타나는 투쟁의 장소다. 사막은 영적 저항의 장소이자 악과 대면하는 장소이며, 우리의 영을 정화하는 장소이다. 이는 십자가의 성 요한의 상징인 어둔 밤에도 잘 나타나 있다. 하느님을 찾는 모든 인간 영혼들이 성숙하고자 한다면 반드시 어둔 밤을 통과해야 한다.”

시몬 베유
시몬 베유

그래서 시몬 베유는 “사랑은 위안이 아니라 빛”이라고 했습니다. 베유는 “종교가 위안의 원천에 머물고 있는 한 종교는 진정한 신앙을 가로막는 방해물이 된다. 이런 의미에서 무신론은 하나의 정화 과정이다.” 하고 지적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만만하고 길들이기 쉬운 것으로 만드는 것은 사이비 관상의 결과이다. 전통적으로 유명한 영성서적인 <무지의 구름> 저자는 “마귀에게는 마귀 나름의 관상가들이 있다”고 했다. 그들은 하느님을 향한 영적 투쟁을 고무시키는 대신에 마귀다운 영적 게으름을 부추긴다. 어찌 보면, 사실상 예수님이 전하신 복음은 너무 급진적이어서 현실을 살아가는 신앙인들에게 불편한 요청입니다. 먼저 내 자신부터 살고 보자는 사람들에게 복음은 주변을 돌아보라고 다그치기 때문입니다.

리치 신부는 마른자리만 찾아다니라고, 출세와 성공이 하느님의 축복이라고 속삭이는 영성을 ‘영적 정욕’이라고 비판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열망 가운데. 내적인 흥미와 자신의 영적 회복에만 집착한다. 우리는 이를 영적 정욕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살아있는 모든 사람들 중에서 가장 거룩한 사람이라고 믿지만, 사실 그들은 살아있는 모든 사람들 중에서 가장 사악하고 비열한 사람이다. 거짓 관상은 구도자들을 영적 고치 속에 고립시켜 인간 고통의 고뇌와 갈등으로부터 물러서게 할 뿐 아니라, 의식을 둔화시키고 영적 맹목을 자아내서 실제로 벌어지는 일들을 보지 못하게 한다. 진정한 관상은 인식을 고양시키는 반면에, 거짓관상과 거짓종교는 사람들의 아편이 된다.”

결국 리치 신부는 진정한 영성이란 십자가 중심의 영성이며, 세상의 고통에 대한 민감성을 높여준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지금 발을 딛고 있는 세상은 “악과 선이 함께 빽빽하게 서 있고, 자비와 죄가 함께 자라는 들판”입니다. 이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고, 그리스도인들은 현실을 명료하게 바라보고, 그곳에서 하느님을 선택하는 사람들입니다. 선을 택하고 자비를 살아내는 사람들입니다.

주술, 이성이나 영성

지난 2월 7일 <제20대 대통령 선거에 즈음한 천주교 평신도·수도자·사제 일만오천 인의 호소>가 발표되었습니다. 야당 대통령 후보와 그이의 처가 주술, 점복, 역술인들과 연루되었다는 것입니다. 안개 같은 인생에서 또렷한 앞날을 읽어내고 싶은 심정이야 이해할 만도 하고, 길흉화복을 나보다 더 큰 무당에게 물어보는 것이야 문제 될 것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국가 대소사를 점복에 의존하는 것은 위험천만합니다. 점복이 주로 개인의 액운을 막고 개인의 성공출세를 탐하는 수단이어서 ‘공동선’에 대한 감수성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일신의 안녕과 영달을 바라는 이가 최고권력자가 되는 것은 더욱 위험합니다. 그래서 호소문에서는 “금번 대선은 이성적 평화 세력에게 미래를 맡길 것인가, 아니면 주술 권력에게 칼을 쥐어줄 것인가 하는 선택의 문제”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주술의 지배를 거부하는 것은 신앙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고백적 행동”이라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이런 때일수록 “마귀에게는 마귀 나름의 관상가들이 있다”는 <무지의 구름> 저자의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이번 대통령 선거 과정은 그리스도인에게 아주 유혹적인 영적 투쟁의 시간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당장의 평안과 성공을 명토 박아 주는 편리한 신앙과 고통의 어둔 밤을 거쳐야 한다는 그리스도교 신앙 사이의 투쟁입니다. 명색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모두 십자가 신앙을 지닌 것은 아닙니다. 우상숭배자들의 하느님은 내 입맛에 맞게 음식을 내어주는 요리사이고, 우상숭배자의 하느님은 내 길흉화복을 다스려 주는 해결사일 뿐인 경우가 사실상 많기 때문입니다.

간발의 차이로 대통령에 선출된 운석열은 선거에서 유리한 고지를 얻을 수만 있다면 불교든 개신교든 천주교든, 신천지든 무속이든 닥치는 대로 움켜잡으려 했습니다. 그에게는 대통령이 되겠다는 의지 밖에는 다른 정치적 비전이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권력을 잡아 가족들과 측근들의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권력의지 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이는 대통령 선거를 ‘패밀리 비즈니스’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아치 예전 어느 대통령이 나라를 대상으로 개인사업을 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가 비록 대통령이 되었더라도 그런 이들에게는 옳고 그름이 아니라 유불리가 모든 판단의 잣대이기에 그 인생이 참 불쌍하다, 생각하는 시절입니다. 다 헛되고 헛된 일입니다. 이제 우리는 아주 긴 사순절을 보내게 될 것 같습니다. 

 

* 이 글은 <공동선> 2022년 3월호에 실렸습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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