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튼 인생은 사랑이잖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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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튼 인생은 사랑이잖어요
  • 장진희
  • 승인 2022.01.15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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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진희의 [가난이 살려낸 것들]

길이 멉니다. 길이 멀수록 잘 닦인 고속도로를 직선으로 달리는 것보다 오래된 이차선 도로를 잡습니다. 기왕에 나선 길이라면 일 처리하듯 달릴 게 아니라 놀듯이 다녀야 몸과 마음이 덜 피곤합니다. 길가 오래된 나무 터널 속을 달리기도 하고 물줄기를 끼고 강을 휘돌기도 하고 가다가 만나는 작은 면소재지에서 그곳 사람들 말소리를 들으며 끼니를 때우기도 합니다.

그렇게 가다가 들른 곳이 임실군 강진면 장터입니다. 빨치산 격전지였던 회문산 자락을 이웃하고 첩첩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산골 작은 면소재지. 장터 앞으로 흐르는 섬진강으로 향하는 물줄기에서는 다슬기를 잡는 아짐들이 펑퍼짐한 엉덩이를 하늘로 쳐들고 있습니다.

장터 옆 샛강을 가로지르며 면사무소나 농협 같은 시설들이 들어선 거리와 이어주고 있는 낡고 오래된 다리가 마음에 들어옵니다. 그것이 처음에 시멘트로 지어진 것이었는지 구별이 안 갈 만큼 까맣습니다. 비록 시멘트 다리일망정 오작교라도 되는 듯이 난간을 전통 양식으로 살짝 멋을 내놓은, 그전에는 흔하디흔했던 다리입니다. 세월은 제 아무리 삭막한 물건이라도 이렇듯 운치를 만들어주는 힘이 있습니다. 마음이 편안해지고 정겹습니다. 아니 낡고 오래된 것, 스러져가는 것을 보면 늘 그렇듯이 눈물이 납니다.

참 가난한 동네인가 봅니다. 번듯하고 새 것 좋아하는 사람들 눈에는 '낙후'의 상징으로 보일 다리, 돈이 많았으면 진즉에 부수고 다시 놓았을 다리. 가난이 살려주고 있는 다리입니다.

 

사진=장진희
사진=장진희

'가는 날이 장날'이면 좋을 텐데 장날이 아니어서 장터는 비어 있고 장터 한귀퉁이에 "왕대포"라고 쓰인 곳이 보입니다. 반갑습니다.

특별히 주방이랄 것도 없이 음식 놓는 조리대를 사이에 두고 왕대포집 한켠에 마련된 씽크대에서 설거지를 하는 주모 아짐은 굳이 뒤돌아보지도 않고 특별히 반길 것도 없이

"뭐 잡술라요?"

하고 묻습니다. 좀 쉬었다 가고 싶은 것이지 저녁 먹기에는 이르고 배는 조금 출출한 것도 같습니다. 먼 길에 운전하는 사람보다 조수석에서 더 몸이 뒤틀렸던, 기계치이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술을 포기해야 하는 상황은 상상도 하기 싫어 절대로 운전을 배우지 않는 것 같은 조수가

"막걸리 한 잔 할라고요."

합니다. 주모 아짐은 손을 헹구고는 그 손으로 나물 두어 가지와 김치를 플라스틱 보시기에 담아 막걸리 한 병과 내옵니다.

한적한 오후입니다. 장터는 비어 있고 왕대포집에는 술꾼도 없습니다. 운전을 해야 하는 사람은 막걸리 딱 반 사발로 아순미만 하고 안주로 나온 나물로 입을 달래고 있는데 조수는 음주단속에 안 걸린다고 홀짝홀짝 잘도 마십니다. 쩝 쩝!

왕대포집 한쪽에 붙은 방문이 열리더니 낮잠이라도 자다 일어났는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아저씨가 나옵니다. 넓고 편편한 얼굴에 주먹코를 달고 있는 아저씨는 한눈에 봐도 사람 좋게 생겼습니다. 근데 아짐 애는 안 녹이는지 뜬금없이 그것이 궁금합니다.

술동무가 없어 애석하던 차에 마침 잘됐다 싶었는지 조수가 아는 체를 합니다.

"아저씨도 계셨네요...... 한 잔 하실라요?"

웃기도 전에 먼저 웃는 모습으로 자리 잡은 인상을 가진 아저씨는 얼굴이 살짝 더 펴집니다.

"아, 예...... 헤에."

아저씨는 주저 없이 탁자로 와서 하얀 플라스틱 사발에다 따라주는 막걸리 한 잔을 쭈욱 들이켭니다. 그리 달게 마시는데 한잔 더 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막걸리 병이 비어 있습니다.

"여기 막걸리 한 병 더 주실라요?"

조수가 싱크대 앞에 서 있는 주모 아짐을 향해 말하자 아저씨가 일어나 냉장고에서 막걸리를 꺼내옵니다.

"한 잔 더 하시지요."
"처음 오신 분들 같은디 이거......"

하면서도 아저씨는 사양은 안 합니다. 어디서 왔느냐, 어디서 왔다, 나도 거기 가봤는데 거기 장터에 누구누구가 내 사돈네팔촌이다, 아 그러시냐...... 제법 사귐이 진전되고 있습니다.

나이는 더 어릴 것이지만 손님이라서 그런지 잔을 받으려고 두 손을 내미는데, 아저씨 왼쪽 손목 가까운 팔뚝에 문신 비슷한 것이 보입니다. 얼핏 '사랑' 어쩌고 하는 글자가 보이는 것 같습니다.

"아저씨, 그게 뭐예요? 그 팔뚝에......"
"아! 이거요? 헤에......"

하고 보여주는데 그제야 글자 문신이 뚜렷이 보입니다.

'인생은 사랑'

환갑은 넘었을 아저씨 팔뚝에 새겨진 '인생은 사랑'!
웃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울 수는 더욱 없는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아저씨는 소년처럼 밝은 얼굴로 말합니다.

"헤에...... 이거 내 첫사랑하고 새긴 거요. 열아홉에."
"예에? 열아홉 살 때요? 그게 아직까지 남아 있어요? 안 지우셨어요?"
"지울 거 뭐 있것소? 좋은디, 헤에......"
"그럼 저 아짐이 그 첫사랑?"
"아아니요오오!"

텍도 없는 소리 하지 말라는 표정입니다. 주방 쪽은 신경도 쓰지 않습니다. 주모 아짐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 별다른 변화가 없습니다.

"암튼 인생은 사랑이잖어요? 사랑, 차말로 좋은 말이제. 헤에......"

슬슬 막걸리가 땡기는데 도리가 없습니다. 그런 심정을 모를 리 없을 텐데 의리 없는 조수는 목구멍으로 술이 술술 잘도 넘어갑니다. 게다가 희색이 만면해서 '술맛 난다!' 싶은지 의자까지 바짝 땡겨 앉습니다. 막걸리가 벌써 세 병째입니다.

주모 아짐은 이래저래 씽크대 앞에서 쉼 없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아저씨가 대낮부터 손님이랑 앉아서 술을 푸고 있는 것이 어째 마음이 불안한데 아저씨는 오히려 석 잔, 넉 잔...... 막걸리가 들어갈수록 의기양양해지는 느낌입니다.

젊은이 하나가 발을 들치며 들어섭니다.

"닭튀김 지금 돼요?"

아저씨는 그제야 당신 할 일이 생겼다는 듯이 총알처럼 튀어나갑니다.

"아, 그라믄! 자암깐만 기달리시게!"
"두 마리요, 두 마리!"

튀김기름 그릇이 올려진 채 한쪽 바닥에 자리 잡고 있는 커다란 가스불판에 불을 틀어놓고 아저씨는 발걸음도 가벼웁게 문밖으로 나갑니다. 그러고 보니 들어올 때 문밖에 닭장이 보였는데 아마 생닭을 잡아 바로 튀겨주는 모양입니다.

"조카들 갖다 줄라고?"

주모 아짐이 닭튀김을 기다리기 위해 건너편 탁자에 앉은 젊은이한테 말을 건넵니다.

"예에. 고 녀석들이 하도 졸라대서...... 오늘은 일당도 받았것다 맘먹고 쏩니다요. 엄니도 잘 잡숴요. 네 식구 먹자면 한 마리로는 텍도 없드라고요."
"산판 일은 끝났는가?"
"예, 어제 끝났구만요."

조카들과 어머니와 젊은이 네 식구...... 그 사연 안 물어봐도 짐작이 갑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술 먹고 집에 들어와 지랄 같은 세상 분풀이를 아내에게 해대는 남자, 그 주먹다짐에 이러다 맞아 죽겠다 싶은 여자는 안 그래도 홀시어머니, 시동생, 새끼들 챙기느라 없는 살림에 등골이 부서지는 것 같은데, 한스럽고 서러운 맘 달래려 모두 잠든 새벽시간 아이들 쓰는 컴퓨터 앞에서 서툰 솜씨로 채팅이라는 것을 해보다, 주먹다짐도 고된 노동도 궁색한 살림살이도 없는 세상의 남자가 한번 만나자고 하고, 결국 생떼 같은 새끼들을 놓아두고 집을 나가고, 남자는 또 그래서 술로 살다 간땡이가 부어 세상을 뜨고, 장가 못 간 동생은 이래저래 어머니와 조카들 가장이 되고......

어느 시골 마을에나 흔히 있는 사연입니다. 까맣게 그을은 얼굴에 눈이 유난히 말갛게 보이는 참 착하고 순한 얼굴의 젊은이를 새삼 훔쳐봅니다. 휴우우! 한잔 안 하고는 못 배기겠습니다. 딱 한잔만 해야겠습니다. '인생은 사랑' 아저씨한테 넘겨주었던 사발을 도로 가져다 제 손으로 막걸리를 따르는데 조수가 째려보는 눈초리가 이마에 꽂힙니다. 그러거나 말거나입니다.

해가 산봉우리 가까이까지 와서 왕대포집 유리문 안을 들여다봅니다. 우리의 삼촌은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을 조카들과 어머니한테 닭튀김을 싸가지고 가고 그 사이 우리 탁자에도 닭튀김 한 마리가 안주로 놓였습니다. '인생은 사랑' 아저씨는 당신이 직접 만드느라 냄새를 실컷 먹어서인지 안주는 안 먹고 막걸리만 한 잔 더 받습니다.

둘이서 먹어봐야 반도 못 먹고 아까운 닭튀김이 식어 가는 참에 아저씨라고 하기에는 나이가 좀 드신 할아버지 한 분이 소주 한 잔 하시겠다고 옆 탁자에 앉습니다. 주모 아짐은 소주 한 병과 나물 두어 가지와 김치 한 보시기를 할아버지 탁자에 놓아 드립니다.

기왕에 남은 닭튀김을 좀 덜어 할아버지 소주안주로 갖다 드립니다. 닭튀김 몇 조각 드렸다고 받는 인사치고는 과하다 싶을 만큼 할아버지는 "고맙네, 고마워"를 연발하더니 어디서 왔느냐, 어디 가는 길이냐, 마음을 쓰십니다.

괜찮으시면 우리 탁자 쪽으로 오시라고 합니다.

"아니, 젊은 사람들 의좋게 한 잔 하는디 나 같은 늙은이가 뭘......"

하면서도 얼굴이 싱글벙글 합니다. 일어나서 소주와 안주를 우리 탁자로 옮겨 드리고 할아버지를 모십니다. 조수가 묻습니다.

"댁이 여기 면소재지예요?'
"잉, 저그 옆에 장의사가 집이여."
"아, 장의사! 힘드시겠네요."
'인생은 사랑' 아저씨가 훈수를 듭니다.
"아, 젊어서는 훈장님이었어, 훈장님! 근동에서 한학 공부를 젤로 많이 한 양반인디......"
"시대가 이런디 뭔 쓸모가 있어야제. 초상집이나 제삿집에 가서 신위, 지방 같은 것 써주다가 이 길로 들어섰는디, 염하는 일이며 뭐며 젊은 사람들이 이런 것 할라고 하는 사람이 있어야제."
"아, 염도 손수! 그 험한 일을......"
"공부의 끝이 가는 사람 잘 보내주는 것이라믄 그도 좋은 일이제."

귀가 번쩍 띄입니다. 공부의 끝이 가는 사람 잘 보내주는 것...... 그러고 보니 이마의 엷은 주름 밑으로 맑고 힘 있는 눈매며 짙은 입술선이며 선비의 모습이 그려집니다. 이거 자꾸 술이 땡겨서 큰일 났습니다.

장의사 할아버지와 조수가 주거니 받거니 하고, 제가 한 잔 올리겠습니다, 아니 멀리서 오신 분을 내가 먼저 따라야 쓸 것인디, 제가 한 병 더 사겠습니다, 아이쿠 이거 초면에 이런 신세를 져도 쓰까, 하며 공자 맹자 노자 순자 흑자 묵자 두루 거쳐 채근담에 초발심자경문으로 오랜만에 말벗 만났다 싶은 술꾼들이 세월 가는 줄 모릅니다.

'인생은 사랑' 아저씨는 주인인지 술꾼인지 주거니 받거니 하다, 이미 술값이고 뭐고 따질 계제가 지난 조수가 술을 한 병 더 달라고 하면 그 넓은 엉덩이가 가비얍게 술을 날라 옵니다. 목소리도 당당하게 주모 아짐을 보고 "여기 한 병 더여어!" 하는데 술병이 쌓여갈수록 이 왕대포집 경제에 보탬을 주고 있다는 자부심이 서린 표정이 되는 것입니다. 술집에 가면 매상을 올리기 위해서 아가씨가 술을 퍼마셔야 한다더니 왕대포집 아저씨는 '순전히 매상을 위해' 대낮부터 막걸리를 마시고 있는 것입니다. 믿거나 말거나.

아이고, 가던 길은 언제 다 갈지, 벌써 날이 저물었습니다. 조수에게 이제 그만 가야 하지 않겠냐고 자꾸 눈치를 줘도 못 알아채는지 안 알아채는지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운전수라고 술을 못 하는 사람도 아니고 면전에서 그렇게도 맛나고 재미나게 술을 마시는데 아주 고문이 따로 없습니다.

학교 다닐 때 저는 술 한 방울 입에 못 대면서 끝까지 술자리에 남아 술꾼들 다 챙기고 집에 가던 동기생이 있었습니다. 피는 끓는데 독재와 억압의 서슬이 퍼렇던 날, 새벽이고 날 샐 때까지고 술 아니면 살 길이 없는 사람들처럼 퍼마시는 술자리를 그렇게 끝끝내 지켰던 친구입니다. 그 심정이 어쨌을지 술꾼 입장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입니다.

그러고 보니 그 친구 고향이 여기 회문산 밑이었습니다.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의붓어머니 밑에서 자랐다는 그 친구 무슨 마음에 한이 많은지 고향을 뜨고는 그 뒤 단 한 번도 고향을 찾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친구 시 제목이 열에 아홉은 '전라선'이었습니다. 전라선 1, 전라선 2, 전라선 3...... 전라선 19, 전라선 20...... 그렇게 한도 끝도 없이 전라선 제목으로 시를 쓰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날은 완전히 어두워졌습니다. 밖에서 두런두런 소리가 들리더니 젊은 사람 둘이 왕대포집으로 들어섭니다.

"아이쿠, 아제 여기 계셨는가요?"

하고 장의사 할아버지한테 아는 체합니다.

"잉, 어서들 오게. 저녁들은 먹었는가?"
"예! 일 끝나고 집에서 저녁 먹고 나오는 길이어라우. 아제는요?"
"여기 귀한 양반들을 만나서 이라고 한정없이 대접을 받고 있네이."
"대접은 뭔...... 괜찮다면 여기들 같이 앉으시지요."

인심 좋은 조수는 아직도 남아 있는 닭튀김 몇 조각을 밀며 막걸리사발을 건넵니다.

"예에......."

눈이 좀 작은 젊은이가 잔을 받으려 하자 눈이 좀 큰 젊은이가 정색을 합니다.

"아, 초면에 어떻게 술을 얻어먹는다요? 저희 술값은 저희가 내는 걸로 하고 앉것습니다요. 저희는 소주로."

주모 아짐이 소주잔 두어 개를 더 가져옵니다. 조수도 술을 더 시킵니다. '인생은 사랑' 아저씨가 또 얼른 일어나 냉장고에서 소주 맥주 막걸리 골고루 술을 내오며 맥주잔을 들이밉니다.

"기왕지사 이라고 됐는디 우리 싸모님, 그라고 있지 말고 맥주라도 한 잔 받으시요!"

듣던 중 반가운 소립니다. 근데 오늘 길을 마저 갈 수 있을지 없을지 판단이 안 섭니다.

"아, 저 사람은 운전해야 되니까 안 돼요."

얄밉기 짝이 없는 조수의 말입니다. '자기는 기탄없이 술을 마시면서. 으으으, 씨이...... 이따 보자!'
'인생은 사랑' 아저씨가 이제야 생각났다는 듯이 벌떡 일어납니다.

"아, 좋은 것이 있지라우."

하고 주방 쪽으로 갔다 옵니다.

"이거 한 잔 마시씨요."
"이게 뭐예요?"
"아, 이거 헛개나무 달인 물인디 술 마시고 이거 먹으면 알콜이 다 맹물로 변해분다는 그 나무 아니요. 아 이 동네 사람들 이거 먹고 음주단속 걸린 사람 한 사람도 없구만이라우. 자, 자, 음주단속 안 걸릴 텐게 이거 마시고 술 한 잔 해부쇼."
"예, 맞어요. 내가 지난번에 산에 가서 이따만큼 큰 나무 해온 것이어라우. 한 번 잡숴보시요."
"여그 사람들은 간에 좋다고 술 마시는 사람이면 다들 해먹어라우."

젊은이들도 맞장구를 칩니다. 귀가 솔깃해집니다. 술 마시고 운전해도 음주단속에 안 걸린다니 이같은 구세주가 또 어디 있습니까? 좋아서 입이 째지는데 표정관리가 안 됩니다. 흠흠!

그래도 안심이 안되니까 딱 한 잔만! 하고 맥주 한잔을 받습니다. 살 것 같습니다. 취할 만큼 취한 정신에도 기사 단속은 해야겠는지 조수 눈이 뱁새눈이 됩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제 하는 수 없습니다.

이제 젊은이 둘과 장의사 할아버지와 '인생은 사랑' 아저씨와 그 아저씨 말마따나 '싸모님'과 이 술판 물주인 조수, 이렇게 여섯이 술동무가 되었습니다. 두 젊은이는 아직 장가를 못 간 노총각들입니다. 도시로 나갈 재주도 배운 것도 가진 것도 빽도 없이 이 외진 산골에서 짝도 없이 젊은 날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아, 시골에 큰애기가 있어야 말이지라우."
"지금 촌에서 장가간 사람들은 전부 도시 나가서 꿰차고 온 사람들이지라."
"그것도 열에 한둘이고 나머지는 다 돈 주고 수입해온 각시들 아니요."
"인자 보쇼만 몇 년 안에 시골 초등학교 학생들 열에 아홉은 외갓집이 베트남, 캄보디아 이런 딜 것이요."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정입니다. 괜히 맘이 짠해져서 술이라도 한 잔 더 따라줍니다. 소주병이 비었습니다. 조수가 또 자기가 사겠다고 소주를 달라고 합니다.

"아! 왜 이러신다요?"

갑자기 눈이 좀 큰 총각이 소리를 버럭 지릅니다. 깜짝 놀라 빈 소주병을 들었던 손이 허공에 멈춰 섭니다. 그제서야 좀 심했다 싶었는지

"아아니! 술은 저희가 사겠다고라우......"

하고 꼬리를 내리는 총각 표정이 좋지를 않습니다. 좀 썰렁해지기는 했지만 또 그런 대로 술판은 굴러갑니다. 아무래도 활짝 펴지지 않는 총각 표정에 신경이 쓰입니다. 그래도 그 나물에 그 밥이라고 맨날 보는 술꾼들하고만 살다 낯선 타지 사람과 술자리를 같이 하는 것이 나쁘지는 않은지 자리를 뜰 생각을 하지는 않습니다.

눈이 좀 작은 총각이 자리에서 일어나 화장실 쪽으로 들어갑니다. 그 틈을 타서 눈이 좀 큰 총각이 작은 소리로 얼른 속삭입니다.

"죄송해요. 갑자기 화를 내서. 아저씨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고라, 저 친구가 이날 이때까지 술값 내는 것을 못 봤거든이라? 같이 술 마시러 가자고 해놓고도 꼭 이리 빼고 저리 빼고 다른 사람이 술값 낼 때까지 개겨요 개겨. 아까 지가 먼저 술 한잔 하러 가자 하길래, 그래 오늘은 니 술 한번 얻어먹어 보자 하고 왔어라우. 아무리 타지 사람이라도 그라제 염치없이 누구한테나 얻어먹을 생각만 하믄 안 되지라우. 말씀은 고마운디 술값은 저희가 낼라요."

순간 정신이 확 깹니다.

막걸리값은 천 원이고 소주값은 천오백 원입니다. 돈 안 벌고 안 쓰고 돈 없이 산다고 한달 생활비 오만 원, 십만 원 가지고 살 때도 막걸리, 댓병 소주 아쉬움 없이 살았습니다. 요새 벌이를 좀 한다고 있는 대로 기분 내며 한정없이 술을 샀던 조수가 미워집니다.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요새 젊은 사람들 어딜 가나 술값 일이 천 원은 돈도 아닙니다. 볼펜 팔러 다니는 아이 볼펜 사줄 돈 천 원은 아까워도 제 술자리 기분 내는 데는 일이 만 원, 아니 일이십 만 원도 돈이 아닙니다. 심지어 이미 만땅으로 취해 다리도 가누지 못할 지경이 되었는데도 또 마담 근사한 집에 들어가

"이 집에서 젤로 비싼 술 내와!"

하고 소리치는 구역질나는 놈들도 볼 만큼 봤습니다.

아픔인지 안쓰러움인지 척척함인지 애정인지 모를 무언가가 속에서 올라와 목울대를 컥 막습니다. 말 그대로 '울 컥' 해서 그냥 그대로 이 총각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싶은 심정입니다. 나도 모르게 술잔으로 손이 갑니다. 술이라도 목울대에 부어넣어야겠습니다. 이제 남은 길은 이미 될 대로 되라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술판이 끝났는지, 눈이 좀 큰 총각이 따라나옵니다. 딱히 할 말이 있는 것 같지는 않은데 그냥 밖으로 나와 우리가 가는 길을 지켜봅니다. 마음과 기운이 전해져서일 것입니다. 눈물 나는 심정으로 그 총각들을 축복합니다. 부디...... 백미러에 안 보일 때까지 어둠 속에 그 총각이 서 있는 자리를 가늠하며 축복의 기운이 가닿기를 빕니다.

기사는 술을 마셨고, 차는 가야 합니다. 가야 하니까 갑니다.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십리도 못 가서 음주단속 경찰차가 보입니다. 서라니까 서고 부라니까 붑니다. 내리라니까 내립니다. 차는 내비두고 경찰서로 가자니까 갑니다. 조서를 쓰라니까 씁니다.

"면허취소입니다."
"옙! 고맙습니다!"

첫사랑에 실패만 하지 않았어도 그만한 아들이 있을 것 같은 나이의 경관이 놀라 눈이 휘둥그레집니다.

예, 고맙습니다. 이제 더 이상 술이냐 운전이야 고민하지 않아도 됩니다.

경찰서를 나오니 낯선 읍의 풍경, '24시편의점'이 보입니다. 막걸리, 소주 골고루 삽니다. 새벽 반달이 중천에 떠 있습니다. 걷습니다. 아까 그 다리 같은 낡고 오래된 다리가 보입니다. 난간에 걸터앉습니다. 개울에도 반달이 떠 있습니다. 조수에게는 막걸리를 따라주고 조수는 나에게 소주를 따라줍니다. 이제 공평해졌습니다. 건배를 합니다. 캬! 소주맛이 일품입니다.

 

장진희
돈 안 벌고 안 쓰고 안 움직이고
땅에서 줏어먹고 살고 싶은 사람.
세상에 떠밀려 길 위에 나섰다.
장터로 마을회관으로.
곡성 죽곡 보성강변 마을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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