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를 떠나는 사람들, 누구의 책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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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를 떠나는 사람들, 누구의 책임인가?
  • 이원영
  • 승인 2022.01.10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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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영 칼럼

미국 사회의 세속화가 가파르게 진행되고 있다. 여론조사기관 <퓨리서치>는 지난 12월 14일 '현재 미국 성인 열 명 중 세 명은 무종교'라는 제목의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무종교 인구가 상승하는 반면 기존 종교인은 점진적으로 감소하고 있으며, 특히 기독교 인구는 감소 폭이 더욱 커지고 있다. (https://news.v.daum.net/v/ke6ur8MLPA)

위의 글은 <무종교인 증가, 개신교인 추락.. 종교 떠나는 사람들>이란 제목의 기사 중 한 부분이다. 종교이탈현상은 어제오늘의 일도, 미국에 국한된 일도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도 벌어지는 현실이다. 사람들은 더 이상 종교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왜 그럴까?

체험없는 종교

이어령 교수는 어느 강연에서 과학은 보이는 것을 설명하고, 철학은 보이지 않는 것을 설명하고, 종교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려고 한다는 말을 했다.

종교는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을 다룬다. 이해할 수 없다는 말은 특별한 체험이 있어 부정할 수 없지만 일회적이고, 규칙이나 일관성이 없어 설명하기 어렵고 반복해서 재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분명한 체험은 있지만 언표불능해서 종교를 신비로 표현한다.

신비란 베일에 싸인 종교를 뜻하는 ‘religion’의 어원은 라틴어의 ‘religio’에서 왔는데 초자연적인 존재에 대한 외경의 감정과 그것을 표현하는 의례 등의 행위를 의미한다. 종교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신에 대한 경험과 신에 대한 의례가 있어야 한다.

명칭은 다르지만 모든 종교는 예배란 의례를 갖고 있다. 사람들은 예배 속에서 신을 만나는 종교체험을 기대한다. 종교체험 없이 종교적 예식만 진행된다면 신기없는 무당집에 파리만 날리듯 신비(하느님 체험)가 없는 종교로부터 이탈은 당연한 수순이다.

 

종교의 사유화

종교가 사람들로부터 설득력을 얻는 신비는 신비체험을 가진 사람의 변화 때문이다. 다양한 신비체험으로 무엇이라고 정의를 내리기는 어렵지만 공통된 특징이 있는데 신과 하나됨(신일합일)이다. 신인합일의 체험으로 무한한 기쁨을 느끼고, 이타적 사랑을 실천하게 된다.(그리스도교 영성에서는 이를 일치, 정화, 성화로 표현한다.)

하지만 신비체험은 정화에서 성화의 과정을 통해 이타적 사랑으로 확대되기 전에 타락하기도 한다. 금인숙은 자신의 책 <신비주의>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신비체험의 해석은 자아에 의해서 행해지는 것이다. 자아는 모든 것을 자기중심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자기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한다. (중략) 조금이라도 유리하다 싶으면 무엇이든지 이용하여 자기를 돋보이게 하고, 드러내고자 하며, 높아지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이 자아의 속성이다.”

자기성찰이 약하거나 상실한 종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유화하고 물질적 이익과 세속의 명예, 권력에 집착하고 자신을 신격화, 절대화, 교조화한다.

앞서 종교를 떠나는 사람들이 많다는 기사를 언급했다. 무종교인이 증가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종교를 통한 신일합일의 신비보다 종교의 폐해를 더 많이 만나기 때문이다.

종교보다 영성

간디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리스도를 좋아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리스도와 같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종교(그리스도교)를 떠난다고 해서 종교를 추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엄밀히 말하면 종교단체(교회)를 떠난 것이지 종교의 가르침을 떠난 것은 아니란 말이다. 무종교인들은 종교보다 영성을 추구하는 순례자가 된 것이다.

종교보다 영성이란 무엇인가? 오늘날 종교는 신일합일의 신비체험도 없고 이타적 사랑의 실천도 없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날선 비판 뒤에 현대인들이 추구하는 영성의 방향이 드러난다. 신을 만나고 신과 하나되어 사랑을 실천하고 정의와 평화를 실현하고 싶다는 말이다. 이들은 종교단체를 떠났지 종교를 버리지 않았다.

안과 밖을 교차하는 영성

영성은 종교의 본질이다. 하지만 종교는 의식이란 껍데기만 남게 되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영성은 신비체험을 동반한다. 신비체험은 희열을 동반한다. 그 결과 한때 영성이란 단어는 열광주의란 비판과 함께 감정에 취한 비이성주의로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신과의 합일을 통해 자기중심적인 자아(에고)가 사라지고 신의 뜻으로 충만한 상태를 추구하는 것이지 황홀경에 빠진 상태는 아니다.

에밀 뒤르켐은 인간을 ‘호모 두플렉스(이중적 인간)’라고 했다. 인간은 개별적인 동시에 사회적이기 때문이다. 뒤르켐에 따르면 개인적인 존재가 사회적인 존재에 의해 길들여지지 않을 때 사회는 아노미(무규범 상태)에 빠진다고 했다.

영성은 개인이나 특정 집단으로 게토화될 수 있다. 개인적 영성만 추구하면 종교를 사유화하거나 사익화하게 된다. 반대로 사회적 영성만 추구하면 종교의 이름으로 타민족과 종교를 몰살했던 전체주의로 전락하게 된다. 기독교 영성이란 측면에서 예수닮음이란 개별적 영성과 함께 하느님 나라 건설이란 사회적 영성의 균형이 중요하다.

 

종교를 떠나는 사람들, 누구의 책임인가?

가나안 성도란 말이 있다. ‘가나안’을 거꾸로 하면 ‘안나가’가 된다. 가나안 성도란 교회에 안 나가는 성도를 지칭한다. 교회에 안 나가지만 성도로 불리는 이유는 교회만 안 나가지 예수는 믿기 때문이다. 가나안 성도가 100만이 된다고 한다.

교회 밖 신자가 많은 이유는 교회 안에서 하느님을 만날 수 없어서다. 왜 하느님 체험이 교회에서 사라질까? 기도와 찬양 소리가 작기 때문일까? 예배의 횟수가 부족하기 때문일까?

교회는 하느님 나라의 가시적 표현이다. 사도 바울은 하느님 나라는 정의, 평화, 기쁨이라고 했다. 정의 없는 평화와 기쁨은 존재하지 않는다. 정의보다 정치적 이익에 움직이고 이익을 위해 평화보다 분쟁을 일으키고 혐오를 일으키니 하느님 나라의 기쁨을 잃은 신자들이 교회 밖 가나안 성도가 되는 것은 아닐까?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모신 몸, 신자 한 사람이 교회다. 그렇다면 신자라 자처한 우리는 자기 삶의 자리에서 하느님 나라를 일구며 살았나? 정의를 세우고, 평화를 만들었는가? 오래 참고, 온유하고, 겸손하고,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않고, 성을 내지 않고, 원한을 품지 않고, 불의를 기뻐하지 않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덮어주고, 믿고, 바라고 견디며 사랑했는가?

 

이원영 
노동이 기도요 기도가 노동인 삶을 추구하는
포천 사는 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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