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주의자는 참된 그리스도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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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자는 참된 그리스도인이다
  • 최태선
  • 승인 2022.01.10 1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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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선 칼럼
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칼 바르트(Karl Barth)는 젊은 시절 그가 목회하던 자펜빌(Safenwil)의 교우들이 처한 상황을 보고, 공장과 기업을 경영하던 장로와 싸우며, 교인들과 노동자들을 위해 노동법을 공부해 가며 노동조합을 세 개나 만들어 주고, 노동자들의 집회에 강연하러 다녔습니다. 그런 그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사회주의자이고, 사회주의자는 참된 그리스도인이다!"

한 번 그가 한 이 말을 잘 생각해보십시오.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아마도 대부분의 한국 교인들은 마음이 부글부글 끓어오를 것입니다. 사회주의자라는 말만 들어도 부아가 치밀도록 학습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가가와 도요히코 목사님이 생각납니다. 그분 역시 협동조합을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습니다. 저의 기억이 정확한지 모르겠지만 그분은 베스트셀러가 된 자신의 책 <사선을 넘어서>로 들어온 당시로서는 천문학적 금액이라 할 수 있는 일억 원을 모두 협동조합 운동에 쏟아 부었습니다.

일본에는 야마기시공동체나 와파공동체를 비롯하여 많은 공동체들이 있습니다. 그 공동체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하느님 나라와 비슷한 모습이 들어 있습니다. 저는 그 이유를 가가와 도요히코 목사님의 협동조합 운동의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위의 칼 바르트가 한 말을 잘 음미해보십시오. 참된 그리스도인은 사회주의자라는 말은 그래도 받아드릴 수 있지만 사회주의자가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은 수용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제 경우는 오히려 사회주의자가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는 바르트의 깨달음이야말로 복음을 제대로 아는 사람의 깨달음이라고 생각합니다.

복음은 그리스도인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고, 인간만을 위한 것도 아니고, 온 세상을 넘어 모든 피조세계를 위한 것입니다. 복음에는 목표가 있다는 말을 자주합니다. 제 이름으로 출판되지는 않았지만 제가 가장 오래도록 번역하느라 씨름했던 책이 바로 에페소서 주석입니다. 에페소서의 주석을 번역하면서 제 뇌리에 뚜렷하게 새겨진 것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모든 지혜와 총명을 넘치게 주셔서, 그리스도 안에서 미리 세우신 하느님이 기뻐하시는 뜻을 따라 하느님의 신비한 뜻을 우리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계획은,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통일시키는 것입니다.”

제가 번역하던 주석에서는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온 우주의 가장 가장자리까지”라는 의미로 해석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생각을 해보십시오. 온 우주의 가장 가장자리까지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통일이 된다면 거기에서 제외되는 것들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까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적이나 박멸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 동성애자들이나 무슬림들 역시 복음에서 제외될 수 없는 것입니다. 사회주의자 역시 제외될 수 없습니다. 복음은 모두를 끌어안아야 가능한 하느님의 경륜입니다. 칼 바르트의 깨달음이 바로 이런 맥락이라는 사실을 볼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저는 일본의 공동체들이 복음이나 신앙을 앞세우지 않는 공동체들이 된 것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복음이란 그런 것입니다. 복음의 정신이 살아 있기만 하다면 그것은 정말 세상을 변화시키는 촉매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들이라는 사람들이 복음이 마치 자신들의 전유물이거나 자신들이 지켜내야 할 허약한 것으로 여기게 된 것은 그리스도교의 가장 큰 비극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제대로 이해했습니다.

순교자 유스티누스는 그 문제를 보다 큰 선교의 관점에서 바라보았습니다.

“유스티누스는 교회의 성장은 적들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독특한 접근법의 산물이었다고 확언한다. 어째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적들을 사랑하고 위해서 기도하고 설득했던 것일까? 그렇게 함으로써 그 적들이 형제가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해서 그들[우리의 적들]은 그리스도의 공정한 명령을 따라 살면서 우리와 더불어 모두의 주인이신 하느님으로부터 [우리가 얻게 될 것과] 동일한 것을 얻으리라는 좋은 소망을 공유하게 될 것이다.’”

유스티누스가 한 말을 잘 생각해보십시오. 그가 에페소서의 말씀을 잘 이해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으십니까.

유대인들은 하느님께서 이방인들을 지옥의 불쏘시개로 쓰기 위해 만드셨다고 말하면서 이방인들을 적대시하고 미워했습니다. 요나서는 그들의 그런 사고를 가장 잘 보여주는 책임과 동시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방인들을 구원하시는가를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을 하찮게 여기면서 유대인들을 답습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을 모조리 적으로 만드는데 몰입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믿지 않는 사람들이나 자신들과 같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그리스도인들의 적대감은 그야말로 과거 유대인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졌습니다.

그래서 온누리교회를 비롯한 한국의 유명짜한 대형교회 모두에서 차별금지법 반대에 자신의 사활을 걸겠다는 목사들이 즐비한 것입니다. 그들은 복음이 그리스도인들만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교는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원수를 만들어내느라 여념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회주의자는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는 바르트의 말이 얼마나 귀중한 깨달음인지를 아시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의 사고에는 결코 차별과 배제와 혐오가 자리할 수 없습니다. 복음이 온 세상을, 아니 우주의 가장 가장자리까지 모든 피조세계를 망라하여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경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사랑입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면서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산상수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제물을 드리려고 하다가 네 형제나 자매가 네게 어떤 원한을 품고 있다는 생각이 나거든, 너는 그 제물을 제단 앞에 놓아두고, 먼저 가서 네 형제나 자매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제물을 드려라.”

물론 형제는 그리스도인들이 된 사람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그러나 유스티누스의 말에서 보듯이 적들 역시 형제가 되어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예배는 먼저 모든 이들과의 화해가 이루어진 후에 가능해진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습관적으로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을 적으로 만들거나 관계를 단절하는데 익숙해져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아무리 예배를 드려도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는 이유입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느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취게 하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리우심이니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 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세리와 이방인들과 같다는 사실을 볼 수 있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임하기를 바랍니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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