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이 필요한 곳은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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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이 필요한 곳은 교회
  • 최태선
  • 승인 2022.01.03 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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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선 칼럼

“<세계 불평등 보고서 2022>에 따르면 한국의 불평등 정도는 끔찍할 정도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상위 10%와 하위 50%의 부의 차이가 52배다. 피케티(학자)가 제시한 불평등지표 중 베타지수에 따르면 자본주의 역사상 가장 불평등했던 시기가 프랑스혁명이었다. 그때 프랑스의 베타지수 7.2, 현재 한국 베타지수는 9다. 한국 불평등이 자본주의 역사상 가장 심각하다. 이 정도 불평등이면 역사상 많은 나라에서 혁명이 일어난다.”(이은탁 님의 글에서 인용)

그렇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불평등이다. 그러나 이 자료는 ‘자본주의 역사상’이라는 단서가 달려있다. 그 이전의 사회는 이보다 더 큰 불평등이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로마시대가 바로 그런 시대 가운데 하나이다. 1%와 99%라는 말은 월가(Wall street)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미 로마시대가 그런 시대였다.

그러나 위의 필자가 말하는 대로 혁명이 일어나지 않았다. 혁명이 안 일어난 것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아는 ‘스팔타커스의 난’과 같은 일종의 항거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혁명이라고 하지 않고 내란이라고도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로마의 힘이 강했기 때문이다. 로마라는 제국의 힘이 너무도 강하고 또 무자비했기 때문에 그 어떤 항거도 허용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막강한 로마를 무력하게 만든 신흥종교가 있었다. 바로 그리스도교다. 그리스도교는 로마의 많은 종교 가운데 정말 지극히 작은 하나의 신흥종교에 지나지 않았다. 로마는 당연히 자신에게 항거하는 그리스도교를 핍박했다. 우리는 그것을 박해라고 부른다. 박해는 그리스도교의 전제조건이었다. 누구든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하는 이는 로마의 박해를 감수해야 했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종교탄압 정도가 아니라 적발 즉시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의 사형이었다. 십자가형은 그 중 하나이다.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어떻게 그런 두려움을 이기고 박해의 종교인 그리스도교가 성장할 수 있었는가.

생명의 종교이기 때문이라는 상투적인 대답을 하지 말라. 다른 모든 종교 역시 영원한 생명을 말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이교도라고 불렀던 다른 종교인들은 그러나 로마에 협조적이었다. 그것은 곧 그리스도교와 다른 모든 종교가 로마가 주장하는 PAX ROMANA를 존중하고 지지했음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들이 그런 다른 종교들과 달리 박해의 대상이 된 것은 다양한 로마의 종교를 인정하지 않고 특히 로마의 황제를 신으로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들의 주님이 로마의 황제가 아니라 그리스도이기 때문이지만 그것이 상징하는 의미는 로마의 통치방식이었던 PAX ROMANA를 인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리스도교의 주님이신 그리스도는 평화의 왕이시다. 로마의 황제와 달리 평화의 왕은 폭력을 평화의 도구로 사용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교는 철저히 비폭력적이었다. 그럼에도 그리스도교가 흥왕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비폭력으로 이루어내는 평화가 폭력으로 이루어내는 로마의 평화를 능가했기 때문이다.

로마의 평화는 철저한 희생의 산물이었다. 99%가 다 죽어도 희생양들은 아무런 저항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폭력이 이루어내는 질서였기 때문에 그만큼 절대적이었고 또 그만큼 안정적이었다.

그러한 로마의 평화에 균열을 낸 것은 더 큰 힘이 아니라 사랑이었다. 특히 사회의 가장 하층을 구성하던 가난한 사람들이 존중을 받는 그야말로 역사상 다른 어떤 혁명보다도 더 급진적인 혁명을 소리 없이 이루어냈던 것이다.

그리스도인 지원자들은 대부분 가난한 사람들이었지만 때론 부유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스도인 지원자들이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작정하는 데에는 무엇보다도 로마라는 사회(그들에게는 온세상이었던)에 대한 절망이 선행되어야 했다. 그 절망을 바탕으로 삼아야 복음이라는 말 그대로 좋은 소식, 다시 말해 복음이 희망이 될 수 있었다. 그리스도인 지원자들이 본 것은 바로 그 희망이었다.

내가 우리 시대의 불평등을 이야기하다 로마의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교가 성장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가 로마라는 사회가 역사상 가장 어두운 사회였기 때문임을 확인해보기 위함이다. 로마라는 폭력적인 불평등 사회가 어두웠던 만큼 복음과 복음대로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은 빛으로 드러났고 희망으로 다가갈 수 있었던 말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불평등이 심화되고 청년들은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이 암울함을 느끼는 상황은 복음의 복음 됨을 드러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교와 교회는 쇠퇴일로에 있다. 팬데믹으로 상황이 어려워지자 그 실상이 더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다. 복음은 희망의 좋은 소식이 아니라 절망의 변주곡 내지는 썩음의 상징이 된 것이다.

그리스도교와 교회가 세상보다 더 불평등한 사회, 능력주의가 가장 자연스러운 곳, 돈이 폭력이 되어 지배하는 사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비폭력으로 이루어지는 평화가 아니라 폭력적인 권위가 판을 치는 곳이 되었기 때문이다. 성직자의 권위는 사랑과 도덕적 권위가 아니라 폭력적인 권력과 힘의 경쟁을 통해 강화되는 곳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교에서 그리스도교로 회심한 락틴티우스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자신을 동일시했다.

“그 공동체는 아주 다양한 배경을 지닌 사람들, 즉 함께 ‘하늘의 길’을 걷는 ‘모든 성별, 인종, 연령에 속한 사람들’을 한데 모은다. 그들과 함께 그는 사람들을 환대하는 것, 포로들을 속량하는 것, 고아와 과부들을 부양하는 것, 그리고 병자들을 돌보는 것을 배웠다. 그들과 함께 그는 원치 않는 아기를 낙태하거나 유기하고 전장에서 사람들을 죽이는 성급한 행위를 포함한 모든 폭력과 살인을 거부하는 것을 배웠다. 그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서두르지 않는 법을 배웠다.”

이것이 서기 300년 경 그리스도교의 이야기이다. 나는 이런 신앙의 자유(313)를 얻기 이전의 그리스도교의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억장이 무너진다. 어떻게 진리의 종교이자 생명의 종교였던 그리스도교가 진리와 생명을 함께 잃고 말았는가. 한탄이 나올 수밖에 없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오늘날 우리 사회의 불평등 정도는 혁명을 유발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심각하다. 그런데 그런 상황 속에서 희망이 되어야 할 그리스도교와 교회는 오히려 암울한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을 정도로 부패하고 타락했다.

혁명이 일어나야 할 곳은 사회이기 이전에 그리스도교가 되었다.

방법이 없지 않다. 그리스도인들이 다시 ‘하늘의 길’을 함께 걸으면 된다. 그리스도인들이 걸었던 ‘하늘의 길’의 내용을 묵상해보라. 그것을 오늘날의 상황에서 재해석해보라.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해야 할 일이 명확해지지 않는가.

아무리 법과 제도를 정비해보라. 세상의 관성은 멈추지 않는다. 그것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사람이 바뀌는 것이다. 그래서 복음은 그리스도인들을 새 사람이라 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예수 안에 있는 진리대로 그분에 관해서 듣고, 또 그분 안에서 가르침을 받았으면, 여러분은 지난날의 생활 방식대로 허망한 욕정을 따라 살다가 썩어 없어질 그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마음의 영을 새롭게 하여, 하느님의 형상을 따라 참 의로움과 참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십시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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