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을 이기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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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을 이기는 방법
  • 이원영
  • 승인 2021.11.27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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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영 칼럼

영화를 봤다. 영화 <악마를 보았다>는 범죄 스릴러 영화로 이병헌(김수현 역)과 최민식(장경철 역)이 주연을 맡은 김지운 감독이 연출한 2010년 작품이다. 영화가 완성된 후 영상물등급위원회로부터 두 차례 제한상영가를 받았을 정도로 폭력성이 짙은 영화다. 제작사가 수정을 거듭한 뒤 세 번 만에 청소년관람불가 판정을 받아 가까스로 개봉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국정원 요원 김수현의 약혼녀 장주연은 어느 다리 밑 저수지에서 온몸이 토막난 시체로 발견됐다. 수현은 불과 며칠전에 주고받았던 주연과의 통화가 마지막 통화였다는 것을 깨닫고 끝없이 절망한다. 수현은 주연을 화장하는 동안 약혼녀를 살해한 자를 똑같이 만들어주겠다고 복수를 다짐하고 용의자가 장경철이라는 사실을 알아낸다.

장경철은 학원차량 운전기사 일을 하는 평범한 아저씨로 보이지만 성폭력과 살인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고 다니는 사이코패스다. 어두운 밤, 차가 고장나서 견인차를 기다리던 주연을 납치해 살인한 경철의 짓임을 알고 약혼녀가 느꼈을 두려움과 고통을 고스란히 되갚아주려고 조금씩 고통과 죽음으로 몰아간다.

감독은 복수극이란 소재로 잔인한 폭력성과 극중 인물의 세밀한 심리적 반응을 담아 악의 실체가 얼마나 사람을 고통스럽게 무너뜨리는지 설명하고 싶었던 것일까?

 

선악이 뒤엉킨 세상

누구나 악을 걷어내고 선으로 가득한 세상을 만들고 싶어한다. 하지만 쉽지 않다. 선과 악이 태극의 소용돌이처럼 뒤엉켜있다. 선과 악을 선명하게 구분할 수 없다. 수많은 유태인을 학살한 아이히만은 성실한 공무원이었고 한 가정의 따뜻한 아빠였다. 성서에도 태초의 지상낙원 에덴 중앙에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가 있다고 말한다. 도대체 선과 악이란 무엇인가?

선과 악이란 무엇인가?

먼저 선(善)은 첫번째 도덕적 의미로 ‘착하다’는 뜻이다. 무엇이 착할까? 갑골문에 나온 善자를 보면 양과 눈이 함께 그려져 있었다.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답은 ‘양의 눈망울과 같은’이다. 양의 눈망울이 왜 착하다는 의미로 해석될까?

양은 되새김질을 하는 반추동물이다. 양, 염소, 소와 같은 반추동물은 사람이 길들인 가축이다. 이 동물들의 특징은 순하고 사람에게 순종한다. 한마디로 사람의 말을 잘 듣는다. 이렇게 볼 때 사람이나 조직의 뜻에 순종하는 모습을 착하다고 표현한다.

두번째 기호(嗜好)적 의미로 ‘좋다’는 뜻이다. 기호는 절대적이기보다 상대적이다. 누군가에게 좋은 것이 누군가에게 나쁠 수 있다. 선의 회의적 뜻과 연결해서 생각해 보면 사람이나 조직에 순종하는 양이 좋은 것이다.

그렇다면 악은 어떤 의미인가? 회의문자인 惡(악)자는 亞(버금 아)자와 心(마음 심)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亞자는 사면이 요새처럼 지어진 집을 그린 것이다. 惡자는 이렇게 사방이 꽉 막힌 집을 그린 亞자에 心자를 결합한 것으로 ‘갇혀있는 마음’이라는 의미에서 ‘악하다’를 뜻하게 되었다고 한다.

한자로 惡(악)은 악하다, 나쁘다는 뜻과 함께 ‘오’라는 음으로 읽히며 ‘미워하다’, ‘남을 헐뜯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미워하다’는 말은 미워하는 대상이 있을 때 쓰인다. 미움을 받는 대상은 상대의 말을 듣지 않아 소통이 불가하거나 집단과 다르게 개별행동을 한다.

선이 첫번째 도덕적으로 ‘착하다’ 두번째 기호적으로 ‘좋다’란 갖고 있다면 반대개념인 악의 뜻은 명확하다. 첫번째 도덕적으로 ‘악하다’, 두번째 기호적 의미로 ‘나쁘다’는 뜻이다.

선악의 기준은 어디에 있는가?

그렇다면 선악을 구분하는 기준은 어디에 있을까? 첫번째로 도덕적 입장에서 볼 때 선이란 글자를 통해 유추해 보면 양을 기르고 관리하는 사람, 사람으로 볼 때 다수의 의결(권력)이나 집단의 권력자가 선악을 기준이 된다. 결국 힘을 가진 자가 선악을 판단하는 결정권자다.

두번째로 기호적 입장에서 좋고, 나쁨을 판단하는 기준은 개인에게 있다. 한 개인이 자신의 판단에 따라 대상을 호불호로 가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A에게 좋은 것은 B에게 나쁠 수 있고 C집단에게 좋은 것은 D집단에게 나쁠 수 있다.

결국 선악의 판단은 개인이나 집단의 가치관을 담고 있고 개인의 결정과 집단의 합의에 따라 기준이 달라질 수 있다. 선악은 절대적이지 않고 상대적이다. 사람에게는 선이란 빛과 악이란 그림자가 공존한다. 시대에 따라 선이 악으로, 악이 선으로 판단된다. 그래서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선악은 한 곳에 있다

선은 행복과 만족을, 악은 불행과 불만족을 준다. 선과 악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선악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사람들은 같은 음식을 두고 싫어하거나 좋아한다. 예를 들어 홍어를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 젊을 때 싫었던 맛인데 나이가 들어서는 없어서 못먹거나 그 반대인 경우도 있다. 그런데 홍어에 대한 호불호의 지점은 동일하다. 코끝을 때리는 삭힌 홍어의 냄새다. 누구는 이 냄새에 침이 고이고 누구는 비위가 상한다.

이처럼 선악은 상대적이고 가변적이다. 사람마다 다양하고, 집단마다 다르며, 시대마다 다르게 해석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악을 가르는 지점은 같다. 선악이 만나는 지점은 언제나 동일하다. 다만 선악을 판단하는 개인이나 집단이 다르고 나뉠 뿐이다.

이렇게 볼 때 선악은 한 개인이나 동일집단의 외부에 있지 않다. 악은 우리를 공격하는 객관적 대상이나 적이 아니라 우리가 싫다고 생각하는 개념과 기호다. 선악을 판단하는 개인의 내부, 집단의 가치규정 속에 존재한다. 선악은 모두 우리 속에 있다. 깊이 생각해 보면 무엇을 호불호로 나누고 그 대상에 마음이 닫고 적대시하는 우리 자신이다. 내가 선이며 내가 악이다.

악의 가능성

내 자신이 왜 선이고 악인가? 악은 세상 속에 존재하며 사람에게 고통을 주고 있다. 우리는 그 악의 영향으로 힘든 삶을 살고 있다. 악은 우리를 공격하는 객관적 실체이며 우리 내부에 있는 대상이지 않는가? 그 악을 미워하고 벌주는 건 당연하지 않을까?

영화이야기로 다시 돌아가보자. 살인자 경철이 수현에게 잡혀 고문을 당하고 단두대에 묶여있을 때 이렇게 말한다.

이제 그만큼 갖고 놀았으면 그만해라 00ㅅㄲ야!
어이. 0까는 소리 좀 그만하세요.
넌 이미 졌어.
니가 날 여태까지 데리고 논 것 같지.
난 고통같은 거 몰라. 두려움. 그딴 것도 몰라. 니가 나한테 얻을 수 있는거 아무것도 없어. 그러니까 넌 이미 졌어. 알아?

영화는 살인자의 말을 통해 악의 특징을 분명하게 말한다. 악은 고통과 두려움을 모른다. 자신이 고통을 모르기 때문에 타인의 고통을 인지하지 못한다. 그래서 죄책감없이 타인에게 고통을 가한다. 공감능력의 상실, 타인에게 닫혀있는 마음이 악의 본성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두 악의 가능성을 갖고 있다. 사람은 모두를 위한다는 ‘전체성’, 정의라는 ‘정당성’, 하느님을 위한다는 ‘거룩’이란 깃발을 걸고 타인의 고통에 눈을 감는다. 그래서 세상은 무자비한 폭력을 반복하고 악이 사라지지 않으며 인류는 고해의 늪 속에서 허우적대는 것이다.

 

인식의 전환

<달마야 놀자>란 영화가 있다. 세력다툼에서 진 조폭의 무리가 산사로 도피하면서 영화가 시작되는데 산사에 머물려는 조폭과 쫓아내려는 스님들의 대립이 이야기를 끌어간다. 조폭과 스님의 대립을 해결하기 위해 산사의 주지가 ‘밑 빠진 독에 물 채우기’란 과제로 혜안을 낸다.

밑이 빠진 독에 물을 채우기 위해 깨진 부분을 몸으로 막기도 하고 빠지는 물의 속도보다 빨리 물을 채우려고 서로 애를 쓴다. 결국 조폭의 우두머리가 계곡물에 독을 빠뜨린다. 인간은 깨진 독과 같아서 선을 아무리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다. 그래서 늘 악에 바친다. 선의 근원 속으로 들어가 헤엄쳐야 한다. 그때 악이 녹아내린다.

악은 싸움의 대상이 아니라 세상에서 상처받은 우리 자신이다. 그래서 멸시하고, 조롱하고, 배제하기 보다 사랑하고 품어야 한다.

악을 이기는 방법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 12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을 박해하는 자들을 축복하십시오. 저주하지 말고 축복해 주십시오.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이들과 함께 우십시오. 서로 뜻을 같이하십시오. 오만한 생각을 버리고 비천한 이들과 어울리십시오. 스스로 슬기롭다고 여기지 마십시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해 줄 뜻을 품으십시오. 여러분 쪽에서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평화로이 지내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경에서도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 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그대의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하거든 마실 것을 주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은 그대가 숯불을 그의 머리에 놓는 셈입니다.”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

예수는 산상수훈에서 제자공동체를 향해 이렇게 말한다.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그래야 너희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분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 사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세상은 말한다, 악을 이기는 방법은 선악을 판단하고 구분해서 악을 벌주고 모욕하고 도려내는 것이라고. 하지만 성서는 원수(악)을 축복하고 사랑하라고 말한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온전하시기 때문이다.

하늘 아버지의 온전성은 선과 악에 대한 구분없이 골고루 비를 주심으로 표현된다. 이는 나를 사랑하는 사람 뿐 아니라 나를 미워하고, 욕하고, 고통스럽게 하는 사람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악을 사랑하라는 건 감정이 아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오래 참는 행위요 악인이 배고플 때 밥을 주고 모욕을 친절로 응대하는 신앙적 실천이다.

예수의 제자는 악에 대적하고 반응하기보다 즐거워하는 자와 즐거워하고, 우는 자와 함께 울며, 내 속에 있는 선의 불씨를 일으켜야 한다. 악의 겉옷은 선악을 판단하는 태풍으로 벗길 수 없다. 따뜻한 사랑의 햇살이 비췰 때 스스로 떨쳐버린다. 이것이 악을 이기는 유일한 방법이다.

오늘도 해는 떠올라 차별없이 모두에게 빛과 온기를 준다. 우리는 스스로 빛을 낼 수는 없지만 빛을 반사시킬 수는 있다. 빛을 잘 받아 잘 비춰줄 수 있는 반사체가 되도록 말씀으로 마음과 행동을 깨끗하게 닦아야겠다.

 

이원영 
노동이 기도요 기도가 노동인 삶을 추구하는
포천 사는 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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