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가는 길, 그리스도인은 앨라이가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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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가는 길, 그리스도인은 앨라이가 되어
  • 최태선
  • 승인 2021.11.21 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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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선 칼럼

<너에게 가는 길>은 성소수자 자녀의 커밍아웃을 마주한 두 엄마의 성장 여정과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살아가는 그의 자녀들, 성소수자 부모모임의 활동 모습을 담은 다큐멘터리다.

다큐는 자녀의 커밍아웃을 들은 부모들의 솔직한 반응을 그대로 보여 준다. 나흘을 펑펑 운 이도, 자녀에게 "네가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한 이도, '언젠가는 돌아오겠지'라고 생각한 이도 있다. 하지만 이들의 작은 균열은 '성소수자부모모임'을 만나면서 봉합되고 연결된다. 성소수자 가족을 받아들이는 낯선 경험이 세상에서 자신과 아이 단둘만 겪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오랫동안 고통스러운 자기부정의 시간을 겪었을 자녀에게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앨라이(Ally·성소수자를 지지하는 사람)가 돼 주겠다는 마음을 품게 된다.

(뉴스엔조이 “이토록 든든하고 세상 강력한 '앨라이들'”에서 인용)

이 다큐의 시사회에 가톨릭 사제와 수도자들 32명이 참관했다. 다른 종교 인사 19명도 참석했다. 목사가 몇 명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 시사회에 참여한 목사가 대형교회 목사가 아닌 것은 분명하다.

이 다큐 영화가 과연 얼마나 많은 상영관에서 상영을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많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오래 상영되지도 않을 것이다. 특히 이 영화가 상영되는 영화관에 피켓을 든 개신교 신자들이 등장할 것이다. 물론 동성애 혐오의 내용이 피켓의 내용일 것이다.

사실 동성애를 반대하는 입장은 가톨릭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전향적으로 32명의 성직자와 수도자들이 시사회에 참여하여 이 영화를 관람했다. 이것만으로도 놀라운 진전이다.

 

시사회에 참여했던 조진선 수녀(성가소비녀회)는 “이 영화는 성소수자만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이야기였다”면서 “나와 가족 또는 친구, 이웃 등 하느님이 주신 선물인 모든 존재들과의 관계에서 다른 존재에게 건너가기 위한 이야기이며 그 과정에서 나 자신도 만나게 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이는 타인을 존중하는 법, 타인과 함께 살아가는 법, 이를 위해 자기 자신의 고유함도 이해하는 것”이라며 “하느님의 신비란 매우 다양하고 넓어 우리로서는 헤아릴 수 없고, 우리 짧은 소견으로 존재를 구분하고 나누는 것이 얼마나 폭력인가, 그것이 가족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다는 것 등을 매우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고 했다.

수녀님의 이야기에 저절로 귀가 기울여진다. 맞다. 동성애자들 역시 인간이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죄인들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냥 인간이다. 그들은 우리의 가족이며 친구이며 이웃이며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다. 엄청난 발상의 전환이다. 조수녀님이 이전에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가 궁금해진다.

또 다른 참여자인 박상훈 신부님(예수회)은 “타인의 고통을 공감하고 싶어도 구체적 삶의 모습을 보지 못하면 이해하기 쉽지 않은데, 이 영화는 삶의 아주 구체적 질감을 표현하고 있어 매우 좋다”면서 “어느 면에선 누구나 소수자이지만 성소수자만큼 제도, 문화, 시스템에 의해 모멸받고, 차별받지는 않기 때문에 영화를 보면 성소수자에 훨씬 가깝게 다가갈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서 “두 어머니의 노력은 그저 부모 자식 사이에 머무르지 않고 확장된다. 이는 김용균 씨의 어머니나 세월호 참사 희생자의 어머니들의 모습에도 동시에 나타난다”면서 “사회적 재난이나 고통 속에서 다시 한 번 가족과 인간관계를 생각할 수 있는 영화”라고 말했다.

조수녀님과는 결이 다르다. 그러나 박신부님의 말을 통해 영역이 넓어졌다. 세월호 참사와 산업재해 현장으로 소수자의 범위가 넓어졌다. 이 또한 매우 중요한 진전이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이 교회와 가정의 울타리를 넘지 못한다면 그건 무의미하다. 아니 신앙 자체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박신부님의 말을 통해 자기 자신과 자기 교회에 갇혀 있는 자신의 신앙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런 그리스도교 신앙이란 없다. 그리스도교 신앙이란 울타리를 넘어 다른 이들이 온전히 자신의 이웃이 되는 것이며 나아가 자매와 형제가 되는 것이다.

나는 오늘날 수많은 목사들의 일탈이 바로 교회 안에 갇힌 신앙 탓이라는 것을 오래 전부터 지적해왔다. 대형교회일수록 그 증상은 심각하다. 그들의 우월감만큼 그들 개인의 신앙은 우월하지 않다. 오히려 그들의 우월감만큼 그들 개인의 신앙은 허약하기 이를 데 없다. 대형교회에서 해마다 한 두 차례씩 특별새벽기도회가 열려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들의 허약한 신앙 때문이라는 것을 이제는 깨달아야 한다.

허약한 신앙이란 자기 자신에 ‘올인’하는 신앙이다. 더 쉽게 자기밖에 모르는 신앙이다. 혹자들은 이런 말을 듣고 자신이 헌금을 많이 한다든가 교회의 봉사활동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내세울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 없이 행해지는 그런 활동들은 자신의 의만을 높여줄 수 있을 뿐이다. 진정한 사랑은 ‘앨라이’가 되는 것이다. 엘라이는 단순히 성소수자들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단어가 아니다. 앨라이는 동맹국, 연합국, 동맹자, 협력자를 의미하고 동류[동족, 동종]의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이란 자기 자신을 타인에게 내어주는 사람이다. 특히 그 대상이 자기 자신을 위한 타인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되돌려줄 수 없는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다. 물론 지금 내가 성소수자들이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그들은 우리 시대에 박해받는 소수자들이다.

시사회에 참가했던 또 다른 분인 이제희 수녀님(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은 “영화 마지막 성소수자 부모님들의 커밍아웃 장면에서 눈물이 나면서, 힘겹지만 당당하게 자신을 찾아가는 저 여정에 동참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면서 “이제 교회가 성소수자들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좀 더 진지하고 구체적으로 고민해야 할 때이고, 이 영화가 그 고민과 논의의 출발점이 될 수 있겠다”고 했다.

맞다. 그들의 이야기는 우리 자신의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 교회에서 드리는 대표기도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이 무엇인가. “벌레만도 못한 죄인”이다. 원죄론을 믿던 안 믿던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죄인 됨을 인정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런데 벌레만도 못한 죄인이 벌레 같은 성소수자들을 혐오한다는 것은 스스로 자신이 한 말을 부인하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 모두는 죄인이다. 이수녀님이 말하는 것처럼 그래서 성소수자들의 앨라이가 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에 동참하는 것이다.

나는 이 기사들을 읽으며 특히 ‘앨라이’라는 단어에 내 마음이 꽂혔다. 그것이 곧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전에는 소수자들의 앨라이가 되어야 한다는 내 주장을 사형수의 어머니들을 통해 이야기해 왔다. 사형수의 어머니들은 모든 범죄자들을 이해한다. 왜 사형수의 어머니들이 그렇게 되는가. 어머니의 자식에 대한 사랑이 가장 진정한 사랑이기 때문이다. 사형수인 자식을 통해 어머니들은 다른 모든 죄수들을 이해할 수 있는 넓은 마음이 되었다.

성소수자들의 경우도 동일했다. 성소수자들의 어머니들은 과정을 거쳐 마침내 앨라이들이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앨라이가 되어 ‘연대’할 수 있게 되었다. 가장 힘들고 어려운 이들의 연대가 이렇게 이루어졌고 그들은 소외받던 성소수자들의 든든한 후원군이 되었다. 그들이 존재하는 한 성소수자들은 더 이상 외롭지 않을 것이다. 특히 자신들의 창조의 모습으로 생생하게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얻을 것이다. 이렇게 되는 세상이 바로 하느님 나라이다. 하느님 나라는 모든 사람들이 사람답게 사는 나라이다.

절대로 그럴 리 없겠지만 나는 차제에 대형교회 목사님들께서 이 다큐 영화를 관람하시게 되기를 원한다. 반대를 하셔도 좋다. 그러나 우선 이 영화를 좀 보셨으면 좋겠다. 그리고 자신의 교회 교인들이 이 영화를 못 보게 막지 말았으면 좋겠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누군가의 앨라이가 되는 것이다. 성소수자들뿐만 아니라 세상 사람들의 이해 밖으로 쫓겨난 모든 사람들의 앨라이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온 우주의 가장 끝까지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시키는 하느님의 경륜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하느님의 계획은, 때가 차면,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통일시키는 것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누군가의 앨라이들이 될 때 이 일은 이루어질 것이다. 엘라이는 ‘너에게 가는 길’이다. 그 길은 사랑의 길이기도 하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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