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 복인가 저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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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 복인가 저주인가
  • 이원영
  • 승인 2021.11.07 2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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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영 칼럼

은혜란 무엇인가?

일요일이면 교회에서 자주 목격할 수 있는 모습 하나를 소환하려고 한다. 엄숙한 분위기로 시작되는 예배, 아름다운 선율의 성가대 찬양, 목사님의 감동적인 설교, 다짐의 기도와 예배를 마무리하는 축복기도. 교인들은 유달리 상기된 표정으로 자신이 앉았던 좌석에서 일어서서 주중에 보지 못한 교회 사람들과 서로 인사를 나누고 설교하신 목사님께 이렇게 말하고 교회 밖을 나서려고 한다.

“김OO 집사님, 오늘 성가대 찬양, 정말 은혜롭지 않나요?”
“목사님, 은혜로운 설교 감사합니다.”

은혜. 교회 안에서 참 많이 사용하는 말이다. 그런데 ‘은혜’라는 말의 뜻은 무엇인가? 교회 안 풍경을 보면 설교나 찬양를 통해 ‘감동을 받았다’는 의미의 감정언어로 은혜란 말을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은혜란 말이 정말 그런 뜻인가?

국어사전에서는 은혜를 아래와 같이 설명하고 있다.

1)사랑으로 베풀어 주신 신세나 혜택

예문) 어렵던 시절에 내게 베풀어 주신 그분의 은혜를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이다.

2)인류에 대한 신의 사랑

예문) 그녀는 신의 은혜와 축복으로 모든 일이 잘 해결될 것이라고 믿는다.

누구나 한번쯤 읽어 본 동화 중에 ‘은혜 갚은 까치’가 있다. 구렁이에게 잡아 먹힐 뻔한 새끼 까치를 구해준 선비가 죽음의 위협을 받을 때 어미 까치가 선비를 살려준 이야기다. 여기서 말하는 은혜는 ‘죽음의 위기를 피하도록 도운 행위’다. 1번의 예문처럼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물질적 도움을 받은 것도 은혜라고 할 수 있다. 은혜란 누군가로부터 받은 도움을 말한다.

 

현대인들은 은혜라는 말을 잘 사용하지 않지만 사극에서는 자주 들을 수 있는 말이다. 왕의 선택을 받은 궁녀가 ‘소녀, 왕의 은혜를 입었습니다’라고 한다. 그리고 그 궁녀는 왕의 아내가 된다. 왕의 선택으로 궁녀에서 왕비로 신분이 급격하게 상승된 것이다.

왕의 은혜(승은)를 받기는 얼마나 어려울까? 전체 궁녀 중 왕의 여자로 선택받을 확률을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 궁녀의 수는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었고, 궁중 내의 사정에 따라 가감되었으며, 제도적으로 그 수가 확정되어 있지 않았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대체로 궁녀의 수가 많지 않았다. 그러나 시대가 내려옴에 따라 궁녀의 수는 일반적으로 증가하는 추세를 보였다.

초기인 성종 때에는 대왕대비전 29명, 왕대비전 27명, 대전 49명을 합하여 105명인 데 반해, 고종 때에는 관제개혁과 함께 대전 100명, 대비전 100명, 중궁전(中宮殿) 100명, 세자궁 60명, 세자빈궁 40명, 세손궁(世孫宮) 50명, 세손빈궁(世孫嬪宮) 30명으로 480명이 되었다.

궁녀가 왕의 은혜를 입으려면 100:1에서 480:1의 경쟁률을 뚫어야 한다. 그런데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이것은 순수한 경쟁률일 수 없다. 궁녀는 자신의 소임에 따라 평생 왕을 보기 어려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왕의 은혜를 입으려면 한마디로 하늘에 별따기다. 이런 측면에서 은혜는 갚을 수 없는 일방적 시해와 선택의 성격을 띄고 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이 은혜를 베푼 이로 인해 기뻐하거나 감격에 벅찬 눈물을 흘릴 수 있다. 하지만 은혜를 받은 이후의 감정상태가 은혜는 아니다. 감정은 은혜란 행위 이후의 결과다. 그렇기 때문에 은혜를 배푼 이에 대한 감사의 마음, 은혜를 받은 후의 감격(감정)을 은혜라고 표현하거나 이해하는 것은 오류다.

앞의 의미들을 종합해 보면 은혜란 감정을 표현하는 언어(감정언어)가 아닌 어떤 사실을 표현하는 언어(사실언어)다. 은혜가 설명하고자 하는 사실은 ‘자신의 의지나 노력과 상관없이 누군가로부터 갚을 수 없는 도움’의 행위이다.

 

성서 속 은혜

성서에서 은혜란 단어를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위에서 살펴본 사전적 의미처럼 전능하신 하느님의 도움으로 물질적, 경제적 혜택을 입을 때 등장하는 단어로 대부분 긍정적 의미를 갖고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마리아의 수태고지가 그렇다.

여섯째 달에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보내시어,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천사가 다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루카 1,26-31)

마리아는 하느님의 은혜를 입었다. 그런데 은혜를 받은 자는 평안하지 않다. 천사의 말에 오히려 놀라고 무서워한다. 이유가 무엇일까? 하느님의 은혜는 풍년이나 빚으로부터 해방되는 경제적 도움, 또는 불치병으로부터의 회복이 아니었다. 정혼을 앞 둔 처녀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는다는 소식이다. 이것은 은혜가 아니라 저주다. 율법으로 볼 때 약혼한 여자의 임신은 혼외정사를 의심받을 수 있다. 그리고 이는 투석형이란 사형에 해당되는 일이다.

과거 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혼외임신은 저주의 씨앗이 되어 아이와 엄마의 삶을 어렵게 만든다. 출생부터 환영을 받지 못할 뿐 아니라 사회적 편견에 맞서야 하기 때문이다. 성서 외 문서에 따르면 마리아의 나이를 12세라고 언급한다. 이런 상황이 어찌 은혜일까? 성서는 계속해서 이렇게 이어지고 있다.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리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 마리아가 천사에게,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말하자, 천사가 마리아에게 대답하였다. “성령께서 너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너를 덮을 것이다. 그러므로 태어날 아기는 거룩하신 분, 하느님의 아드님이라고 불릴 것이다. (루카 1,32-35)

마리아가 잉태할 아이는 ‘하느님의 아들’이고 이 예수라는 아기를 통해 하느님의 통치가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한다. 사회적 통념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는 아기와 산모는 이 소명을 사실로 믿고 저주에서 은혜로 전환시킨다. 마리아는 이렇게 말한다.

마리아가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러자 천사는 마리아에게서 떠나갔다.(루카 1,38)

여기서 볼 수 있는 은혜는 어려운 생활 중에서 이익을 주는 혜택이 아닌 감당하기 어려운 소명이다. 모두가 거부하고 싶은 은혜, 소명, 하느님의 선택을 마리아는 온 몸으로 받았다. 아들의 성장을 보면서 늘 노심초사해야 했다. 성인이 된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3년 후 십자가에서 최후를 맞이할 때까지 근심과 고통의 시간을 보냈어야 했다. 이것이 성서가 말하는 은혜다.

하지만 마리아가 받아들인 은혜는 하나님 나라의 겨자씨가 되어 전지구를 뒤덮을 만큼 크게 자라서 그 아래에 거하는 자는 누구나 정의, 평화,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종교개혁으로 본 은혜

하느님의 은혜가 아니면 모든 사람은 구원받을 자격이 없는 죄인이다. 사람이 죄인인 이유가 무엇인가? 인간은 모두 이기적이어서 자기 생존을 위해서 악마의 심성을 발현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은혜를 받아도 이런 심성은 늘 꿈틀거려서 자신과 타인을 괴롭힌다.

마르틴 루터는 자기 속의 악마를 뚜렷하게 본 사람이었다. 그는 죄의 사슬을 끊고 의의 열매를 맺기 위해 무릎이 깨지도록 수도원의 돌계단을 오르고 올랐지만 악의 본성을 지울 수 없었다. 자기부인과 영적 수련으로 성인이 되려고 했기 때문이다.

영적 계층을 나누던 암흑기는 사회적 계층의 정당성을 부여했고 인생의 불평등을 죄에 대한 인과응보로 여기게 했다. 죄의 판단은 신에게 있지 않았고 신의 대리자와 사회의 권력자에게 있었기에 종교인과 귀족에게 아부하는 자만이 신의 은총과 축복을 받은 자로 여겨질 수밖에 없었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인간의 고통을 죄의 문제로 제한하고 사회적 부조리에 눈감고 천국으로 직행하는 구원열차 티켓판매에 몰두한 종교 타락을 질타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암흑기의 현실을 볼 수 있는 눈과 이를 전환하려는 목소리를 갖게 된 것이 루터에게는 은혜였다.

루터는 하느님의 은혜를 통해 영혼의 자유를 얻었지만 목숨의 위협을 받게 되었다. 이렇게 볼 때 그리스도인들에게 은혜란 하느님 나라의 관점에서는 복이지만 세속사회의 관점에서는 저주요 반역이다. 이것은 루터만의 은혜 이야기가 아니다. 예수의 열 두 제자를 비롯해 사도행전의 집사들, 그리고 바울도 그런 은혜를 받았다.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은 뒤 자신의 삶을 이렇게 회고한다.

그들이 히브리 사람입니까? 나도 그렇습니다. 그들이 이스라엘 사람입니까? 나도 그렇습니다.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입니까? 나도 그렇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입니까? 정신 나간 사람처럼 하는 말입니다만, 나는 더욱 그렇습니다. 나는 수고도 더 많이 하였고 옥살이도 더 많이 하였으며, 매질도 더 지독하게 당하였고 죽을 고비도 자주 넘겼습니다. 마흔에서 하나를 뺀 매를 유다인들에게 다섯 차례나 맞았습니다. 그리고 채찍으로 맞은 것이 세 번, 돌질을 당한 것이 한 번,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입니다. 밤낮 하루를 꼬박 깊은 바다에서 떠다니기도 하였습니다. 자주 여행하는 동안에 늘 강물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에게서 오는 위험, 이민족에게서 오는 위험, 고을에서 겪는 위험, 광야에서 겪는 위험, 바다에서 겪는 위험, 거짓 형제들 사이에서 겪는 위험이 뒤따랐습니다. 수고와 고생, 잦은 밤샘, 굶주림과 목마름, 잦은 결식, 추위와 헐벗음에 시달렸습니다. 그 밖의 것들은 제쳐 놓고서라도, 모든 교회에 대한 염려가 날마다 나를 짓누릅니다. (2코린 11,22-28)

 ‘오직 은혜’를 고백하려면

종교개혁주간이 되면 한국교회는 루터의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은혜’를 외치며 핏대를 세운다. 하지만 정말 성서를 이해하고 따르는가? 믿음의 내용은 무엇인가? 하느님 나라를 이루기 위해 인내로서 믿음의 경주를 쉬지 않는가? 은혜를 받은 자로 소명에 따르고 있는가?

감동이나 감격이란 언어를 은혜란 종교언어로 왜곡하고 노력이 아닌 은혜라 곡해하며 하느님 나라를 이루어야 할 소명에 응답하지 않는 한국교회는 세속사회보다 더 물신의 지배 속에 개혁의 대상이 된지 오래다.

오직 은혜를 외치려면 오직 소명을 따르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바울은 자신처럼 죽을 죄인에게 하느님께서 은혜를 베푸신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내가 하느님의 자비에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고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은총에 힘입어 여러분 모두에게 말합니다. 자신에 관하여 마땅히 생각해야 하는 것 이상으로 분수에 넘치는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저마다 하느님께서 나누어 주신 믿음의 정도에 따라 건전하게 생각하십시오.

우리가 한 몸 안에 많은 지체를 가지고 있지만 그 지체가 모두 같은 기능을 하고 있지 않듯이, 우리도 수가 많지만 그리스도 안에 한 몸을 이루면서 서로서로 지체가 됩니다. 우리는 저마다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총에 따라 서로 다른 은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예언이면 믿음에 맞게 예언하고, 봉사면 봉사하는 데에 써야 합니다. 그리고 가르치는 사람이면 가르치는 일에, 권면하는 사람이면 권면하는 일에 힘쓰고, 나누어 주는 사람이면 순수한 마음으로, 지도하는 사람이면 열성으로,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면 기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사랑은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악을 혐오하고 선을 꼭 붙드십시오.
형제애로 서로 깊이 아끼고, 서로 존경하는 일에 먼저 나서십시오. 
열성이 줄지 않게 하고 마음이 성령으로 타오르게 하며 주님을 섬기십시오.
희망 속에 기뻐하고 환난 중에 인내하며 기도에 전념하십시오.
궁핍한 성도들과 함께 나누고 손님 접대에 힘쓰십시오.
여러분을 박해하는 자들을 축복하십시오. 저주하지 말고 축복해 주십시오.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이들과 함께 우십시오.
서로 뜻을 같이하십시오. 오만한 생각을 버리고 비천한 이들과 어울리십시오. 스스로 슬기롭다고 여기지 마십시오.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에게 좋은 일을 해 줄 뜻을 품으십시오.
여러분 쪽에서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평화로이 지내십시오.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경에서도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 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그대의 원수가 주리거든 먹을 것을 주고, 목말라하거든 마실 것을 주십시오. 그렇게 하는 것은 그대가 숯불을 그의 머리에 놓는 셈입니다.”
악에 굴복당하지 말고 선으로 악을 굴복시키십시오. (로마  12,1-21)

세상의 가치관을 뒤로하고 하느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로 ‘오직 은혜’(하느님 나라의 소명) 가운데 살아가는 교회개혁을 소망한다.

 

이원영 
노동이 기도요 기도가 노동인 삶을 추구하는
포천 사는 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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