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는 실천을 부르는 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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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는 실천을 부르는 언어
  • 한상봉
  • 승인 2016.07.28 0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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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시대 자비를 생각한다>, 서공석 외, 분도출판사, 2016

프란치스코 교종이 자비의 특별희년을 선포하면서 ‘자비’에 관한 책들이 여러 나왔지만, 대다수가 번역서여서 우리 현실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 이참에 분도출판사에서 19명의 필자가 자비에 관한 종교적 사회적 성찰을 담아서 책을 출간했다.

<고통의 시대 자비를 생각한다>는 400쪽이 넘는 책을 보면서, 편집자의 말대로 “고통의 현실이야말로 자비의 언어가 가장 요청되는 이유”라고 한다면, 그만큼 우리의 겪고 있는 고통이 무겁다는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자비는 실천을 부르는 언어”임을 새삼 확인해야 한다.


가난한 이를 축복하시는 하느님

서공석 신부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느님의 자비’라는 글을 통해, 하느님 나라의 전망 안에서 세례자 요한과 예수를 대조한다. 세례자 요한은 하느님으로 인해 열리는 미래를 다소 위협적인 언어,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에 닿았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 나무는 모두 찍혀서 불 속에 던져진다”라는 말로 가르쳤다면, 예수는 같은 미래를 가르치되 자비로운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열리는 미래를 강조한다. 예수는 심판보다는 하느님의 자비를 먼저 가르친다. 이제 고통과 죄를 거스르는 힘으로 하느님께서는 우리 가까이 계신다는 뜻이다.

예수는 모든 형태의 차별에 반대한다. 에세네 사람들은 ‘빛의 자녀’와 ‘어둠의 자녀’를 구분하고, 바리사이들은 ‘거룩한 자’와 ‘거룩하지 못한 자’를 구분했지만, 예수는 이런 이분법을 거절한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말 가운데 사필귀정, 인과응보, 약육강식, 입신양명, 부귀영화 등이 다 이런 차별적 언어다.

당시 유다교 파벌은, 하느님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우리가 사랑하고 하느님이 버린 사람들을 우리도 외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죄인들과 세리들은 하느님이 버린 사람들이고, 그들과 사귀는 것은 같은 죄인이 되는 것이라고 가르쳤다. 장애인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이런 쿰란공동체와 예수는 달랐다. 그분은 아무도 버리지 않으시는 하느님을 선포했기 때문이다. 오히려 예수는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부르러 왔습니다.”(마르 2,17)라고 말했다.

“예수의 지상 생애 자체가 하느님에 대한 비유”라고 서공석 신부는 말한다. 이를테면 행복선언은 강자에 대한 축복이 아니라, 가난하고 굶주리고 슬퍼하는 사람들을 위한 축복선언이다. 하느님의 미래는 소외된 이들에 대한 예수의 축복선언으로 이미 시작되었다. 그러니 세속적 재물을 쌓지 말고, 세속 일에 신경 쓰지 말며, 맘몬을 섬기지 말라고 예수는 당부한다.

불교, 무차별한 평등한 사랑

이 책에서는 힌두교와 유교와 도교, 무교, 이슬람에서 말하는 자비에 대해 설명하고 있지만, 특별히 불교의 자비 개념이 돋보인다. 불교는 “지혜와 자비를 양 날개로 삼는 종교”라고 전하는 오지섭은 먼저 자(慈)와 비(悲)의 의미를 구분한다. ‘자’는 상대방에 대한 비난과 원망의 마음, 공격적인 적개심을 버리고 다른 사람의 이익과 행복을 바라는 사랑이다. ‘비’는 남의 불행과 고통을 덜어주려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다. 이러한 자비는 “나에게 중요하고 의미 있는 사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향한 인간적 감정과 상관없다.” 대상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 무차별한 ‘평등한’ 사랑이다.

“아무런 감사나 되갚음도 바라지 않고 다만 스스로 온 세상에 하나로 평등하게 빛나는 태양처럼, 나도 그렇게 일체중생을 자비로 감쌀 수 있어야 하리. 설령 그들이 잘못으로 악을 저지른다 해도 내 굳게 세운 서원을 저버리지 않으며, 혹 그들 가운데 한 중생이 악하다 하여 그들 모두를 저버리지 않아야 하리.”(화엄경)

더 나아가 진정한 자비는 베풀어준다는 의식조차 없이 행하는 베풂이다. 그리고 “일체중생이 병이 있으므로 내 병이 있나니, 만일 일체중생이 병을 여윈다면 내 병도 나을 것”이라는 <유마경>의 말처럼, 고통 받는 이들과 한 몸이 되어 고통을 함께 느끼고, 이 고통을 없애려고 실천하는 것이다. 이를 두고 오지섭은 신영복 선생이 <감옥으로부터 온 사색>에서 “함께 비를 맞으며 걷는” 공감(共感)을 불교적 자비의 현대적 용법으로 제시했다.

비참의 시대, 자비로운 사목

한편 ‘자비로운 사목’이 무엇인지 참구하는 김인국 신부는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 오늘 특히 가난한 사람들과 고통당하는 모든 이들의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 제자들의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라는 <사목헌장> 1항을 자비와 관련해 진지하게 고민하고 실천방법을 제시했다. 김 신부는 <매일미사> 책에 인쇄된 보편지향기도를 그대로 바치기가 송구스러워, 2015년 11월 14일 이런 기도문을 준비해 미사 때 전례 맡은 분에게 넘겼다고 한다.

“경찰이 쏜 물대포를 맞고 농민 한 분이 사경을 헤매고 있습니다. 힘이 정의가 되는 오늘의 풍경을 가슴 아프게 바라봅니다. 하느님 아버지, 이런 때일수록 시비를 가려주실 성령의 지혜를 간절히 청합니다. 정의는 언제나 당신 손에 달려 있으니, 그렇잖아도 시름에 겨운 저희를 위해 거짓은 엄하게 꾸짖어 주시고 진실은 환히 드러나게 해 주소서.”

돌아온 것은 “성당에서조차 세상 문제에 시달리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며 미사 때 이 기도문을 읽지 못하겠다는 답이었다. 사람은 좋은데 시국문제에는 전혀 개입하고 싶어 하지 않는 신자들 앞에서 앞이 캄캄해졌다는 사제의 고백이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어느 누구도 종교를 개인의 내밀한 영역으로 가두어야 한다고 우리에게 요구할 수 없습니다. ... 교회는 정의를 위한 투쟁에서 비켜서 있을 수 없으며 그래서도 안 됩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또 사목자들은 더 나은 세계의 건설에 진력하라는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라고 <복음의 기쁨>에서 전했지만, 아랑곳없는 신자들이 많은 게 우리 교회의 현실이다.

김인국 신부는 시국강론 때문에 성당에서 자꾸 소란이 벌어지면 사목자들은 강론에 앞서 자기 검열에 빠져들고, ‘자비의 사목’은 여지없이 쪼그라들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예수에게도 회당과 성전은 모욕과 봉변의 자리였으며, 적대자들이 살해를 결심하고, 공모하게 만든 자리였다”는 글에서는 자못 당혹스럽다. 교회가 가난한 이들을 위한 복음을 설파할 수 없는 공간이라면, “눈을 뜨고 세상의 비참함을, 존엄을 박탈당한 우리 형제자매들의 상처를 보도록 하자”(자비의 얼굴, 15항)는 교종의 간절한 호소는 무색해진다. 김 신부는 교종의 절박한 심정을 헤아릴 때마다 “눈물이 날 지경”이라고 했다. 하느님 백성인 교회가 복음을 반대하기 때문이다.

“국가와 자본이 노동자들을 벼랑 끝으로 몰고 있다면 교회는 무엇을 해야 할까?” 묻는 김인국 신부는 “언제까지 한국의 자본독재를 질타하는 목소리를 로마의 주교에게서만 들어야 하는지 묻고 싶다”고 했다. 교회는 잔잔한 호수의 파란 혀가 뱃전을 보드랍게 핥아주는 화선에서 뱃놀이 하는 귀공자가 아니라, 난폭한 파도의 머리를 짓밟으며 “잔잔하라!”고 호령하는 씩씩하고 늠름한 모습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줄곧 국가를 거슬러 하느님 나라를, 돈을 거슬러 하느님을 추구하도록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헬조선’이라는 삭막한 현실에서, 자비로운 사목이란 “약자들의 연대에 힘을 보태는 일”이라고 김 신부는 말한다. 교회는 노동조합과 시민단체와 사귀고, 자선 구호만큼 정의평화 기금도 책정해야 한다. “우는 사람들이 있는 곳에 가 보면 언제나 신부와 수녀들이 기도하고 있었다”는 정혜신 박사의 말을 교회가 알아 들어야 할 ‘영예로운 찬사’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이게 ‘자비의 사목’이다. 그래서 성지를 따로 찾을 것 없이, 세상에서 가장 고통 받는 사람들이 있는 현장으로 신자들이 성지순례를 가자고 격려한다.

“레지오와 꾸르실료, 성령쇄신운동 할 것 없이 교회의 모든 활력은 강자동맹에 맞설 시민들의 에너지로 전환되어야 한다. 한국교회의 사목이 한국사회의 폭력을 치유할 약이 되고 싶다면 말이다.”

이런 측면에서, 김인국 신부는 “새 길을 닦는 자가 사목자”라고 말한다. 억강부약(抑強扶弱), 너무 강한 것은 내려 주고, 너무 약한 것은 올려주면서 반듯하고 평평한 길을 내야 한다. 여기서 깎여야 하는 족의 저항과 반격이 만만치 않을 것이기에, 이 어려운 일을 맡은 이가 사목자라 부르고, 그런 일꾼을 키우는 일을 사목이라 했다.

“뭇사람을 참사람 되게 하는 처소가 교회라면, 교회야말로 새 하늘 새 땅을 세울 동량들이 빽빽하게 무럭무럭 자라나는 산림이어야 한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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