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로 내 인생의 전쟁도 잠시 쉬어 가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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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내 인생의 전쟁도 잠시 쉬어 가는가
  • 이슬
  • 승인 2021.10.25 0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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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 칼럼-살면서 한 마디

“가위 가져와!” 총괄 점장이라는 자가 소리를 질렀다. 정말 순식간에 주먹이 날아오는 듯 한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뺨을 맞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머릿속이 하얘지더니 바로 옆에 있던 가위를 두고 주방 한 바퀴를 돌고서야 찾아 왔다. 한 바퀴를 도는 그 짧은 시간 동안 이대로 밖으로 나가야하나, 생각했다. 나를 얼마나 봤다고 저렇게 소리를 지르는지. 도대체 평소에 어떤 생각으로 직원을 대했으면 저런 말투가 나오는 거야. ‘저 아세요? 왜 그렇게 말하세요? 왜 반말로 제게 소리 지르냐고요?’가 입 안에서 맴돌았지만 결국 배식대 앞에 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떠올라 입을 꾹 다물고 가위를 가져다 줬다.

점장은 그 순간도 놓치지 않고, “가위가 어디 있는지도 몰라?”라고 다시 귀를 찢는 듯 한 소리로 지적했다. 막말하는 그 여자는 꼭 어딘가에 미쳐 제정신이 아닌 사람 같기도, 이미 사람이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아무 대꾸도 하지 않고 자른 소스를 들고 나갔다. 배식 하는 내내 쨍쨍 거리는 그 말투가 귀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 때 어떻게 했어야 했는지 하나씩 생각이 났다. ‘니가 가져와!’ 내지는 ‘자, 여기 가져왔다.’ 정도로 대답해 줬어야 하지 않았는가. 너무 멍청했구나. 그 자는 내가 일 시작한지 벌써 반년이 지나가는데 의례적으로 잠깐씩 딱 세 번 마주친 여자였고 사십대 초반의 비혼녀다. 아무래도 지난 면담 때 그 자리에서 퇴사를 결정하면서 그 자 마음에 어떤 부분을 건드린 듯 하다.

 

원래 그렇다는 것. (그림=이슬)
원래 그렇다는 것. (그림=이슬)

원래 그런 게 있을까

점심시간에 아주머니들께 잠깐 그 일을 이야기 했더니, 돌아오는 말은 “걔, 원래 그래.”였다. 자주 있던 일처럼 별일도 아니라고, 원래 그렇단다. 이 곳은 환자와 직원을 따로 나누어 식당을 운영하는 곳인데, 이 두 곳을 다 책임지고 있는 점장이고 특히 환자를 상대로 일하는 쪽은 특성상 음식 알레르기와 먹지 말아야 하는 음식을 일일이 체크하고 신경 써야 하기 때문에 항상 예민해져 있다고 했다.

사람이 필요할 때마다 양쪽 일을 번갈아 다니시는 아주머니는 환자식 일이 반찬 하나만 잘 못 놓아도 생명과 직결되어서 큰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고 했다. 그렇게 신경 쓰이고 힘든 일인 걸 알아서 그런지 주로 환자식 일을 책임지는 이들은 점장이 그렇게 소리를 질러도 그러려니 한다고 했다. 책임진다는 것은 얼마나 무거우냐고, 그 화와 스트레스를 저렇게 표현하는 것이니 어떻게 보면 불쌍한 사람이라고 했다. 아주머니 이야기를 듣고 있으니 얼어붙은 마음이 아주 조금은 노곤해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어 슬픔 같은 감정이 밀려들었다.

아주머니들은 배운게 없어서 할 수 있는 일이 이것 밖에 없다고 그래도 이 나이에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건 얼마나 좋으냐고 하신다. 몸도 사리지 않고 시키는 일은 다 하시면서 자식같이 새파랗게 젊은 애한테 그런 말투로 한 소리 듣는데도 그래도 괜찮다 괜찮다고 이해한다고 하신다. 그리고 되려 그 사람을 불쌍한 사람이라고, 안됐다고 걱정해 주신다. 아, 정말 '원래 그래' 라는 것이 그런게 처음부터 있기나 한 걸까. 어떻게 그렇게 말하는 것이 원래부터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더 착하고 더 너른 마음들이 그러려니 하며 덮어주고 넘어가 주기 때문이 아닌가. 그렇게 넘어가 주니 어라 이렇게 말해도 되는구나. 이렇게 말하니 더 쉽고 더 높아 보이는 구나 얼씨구나 해서 계속계속 악순환만 반복되는 것은 아닌가.

당신은 관리자이고 우리는 노동자지만

아무리 시끄러운 곳이여도 아무리 바쁘고 힘든 일이여도 그것과 사람을 존대하는 일은 엄연히 다르다. 구분 할 수 있다. 바쁘고 힘든 일 속에서도 존대는 충분히 할 수 있다는 말이다. 마음 너른 분들 덕분으로 여태껏 ‘점장님’ 소리를 들으며 그 위치에 있는지도 모르고 원래부터 자기가 잘났다고 더 활기를 치고 어르신들 머리 위까지 올라가 소리치고 춤을 추고 있는 건가. 사람은 지위가 올라가면 올라 갈수록 당연한 것이 그렇게도 많아지는가. 약자 앞에서 혹은 죽어 가는 사람 앞에서 ‘원래 그렇다’는 말은 ‘그래서 어쩔 수 없다’는 그런 말은 너무도 가혹하고 비겁하지 않은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잠도 오지 않을 정도로 마음이 불편해져 갔다. 무섭기도 귀찮기도 해서 그 누구 하나 정확하게 꼬집어 말해주는 이 없었고, 너무나도 오래 굳혀져 온 습관이라 본인이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직접 들려주지 않는 이상 점장은 앞으로도 계속 모르고 살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여기를 나가기 전에 꼭 말해야겠다.

“당신은 흔히들 말하는 사람 위에 사람 없다고 하는 말을 아십니까? 당신은 관리자이고 우리는 노동자로 하는 일이 다를 뿐이지 어느 누구도 하대 받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대 받고 있다고 가장 강하게 느끼는 부분은 언어입니다. 개인적으로 언어는 그 사람의 인격이고 습관이며 그 사람이 평소에 생각하는 것들의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긴박하고 힘든 순간일수록 쉽게 자주 나오는 말들은 더더욱 그 사람을 알 수 있게 합니다. 그러면 이렇게 바쁘고 시끄러운 곳에서 어떻게 부드럽게 말하는 게 가능 하냐고 반문하시겠지만 소리는 크게 하더라도 존대는 하셔야지요?

정말로 가슴에다 물어보십시오. 순전히 바쁘고 시끄럽기 때문에 그런 말을 쓰신 건지요? 그렇게 급하면 본인이 가져오셔야지 ‘가져와’ ‘이거 해. 저거 해.’ 그 앞에 ‘야’라도 붙여 보시지요. 지금 어느 집 개한테 훈련이라도 하려는 겁니까? 여기서는 그럴 수밖에 없다고 어디 그런 되지도 않는 변명을 하는 것입니까? 아무리 친근하게 느껴져서 혹은 가까워지고 싶어서 반말을 하더라도 그렇게 지르면서 반말을 하지는 않습니다. 언어에도 표정과 느낌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여태껏 그런 말과 말투로 아주머니들을 상대해 오신 겁니까?

어떤 이들은 말 한마디에 일을 그만 두기도 합니다. 정말 극단적으로는 말 한마디에 사람이 죽어 나가기도 합니다. 몇 번을 만났다고 어떤 사람인지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한테 일을 시키는데 어떻게 그렇게 말할 수가 있습니까? 자기보다 나이가 어리다고 이렇게 대하는구나, 라고 어거지로 넘기라 하는데 여태껏 어르신들 앞에서 당연한 듯 이렇게 소리를 지르고 반말을 해왔다고 생각하면 화가 마구 치밀어 오릅니다. 현장 상황은 안중에도 없이 당신들은 절차와 철칙 지키기를 얼마나 중요시 하십니까? 그렇지만 그 전에 가장 기본적인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의 예의와 철칙은 왜 지키지 않으십니까? 책임자로서 본인부터 철저히 연습하시고 영양사들께도 기본적인 언어는 꼭 교육해 주시기 바랍니다. 남을 존중해야 자기도 존중 받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창피와 모욕감을 갚아주고 싶었다. 독이 올랐다. 조금의 틈도 주지 않고 다다다 이렇게 이야기 하려고 했다. 밤거리를 거닐며 중얼중얼 한 마디도 잊지 않으려고 맹연습을 했다. 이것이 지금 필요한 일이라면 길을 가다 그 여자와 마주치게 해서라도 꼭 내게 기회를 주실 거라고 믿었다. 그리고 정말 퇴사 마지막 날에 점장이 여태 없었던 조회를 만들었고 나는 그 조회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하게 되면서 기회가 온 것 같았다. 말주변이 없고 간이 작고 심약하여 심장이 방망이질 쳤지만, 내게 주어진 시간임에 분명했다. 때로는 인간으로서 부당한 것은 끊임없이, 매몰차게 말해야 하지 않은가. 고작 나 같은 이의 말의 힘이라는 것은 귀를 아주 살짝 간지럽히는 먼지 정도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귀 한 번 털어버리면 바로 잊혀질 말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그럼에도 왜 굳이 그래야 하는지 나도 잘 알지 못하지만 나는 지금 이 말을 해야 한다.

방망이질 치는 심장 때문에 혹시 목소리까지 같이 떨리면 얕보이게 될까봐 그러지 않기 위해 두 손을 꽉 쥐고 숨을 크게 들여 마셨다. 그리고 "저기 저 건의사항 있습니다. 가는 사람인데 가는 마당에 한 마디 하게 해주시겠습니까?" 숨막히게 떨렸지만 웃고 있었다. 그리고 밝고 선명한 내 목소리가 내 귀로도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순간 이상했다. 누구누구를 삐뚤어지게 보고 꼭 바꾸고만 싶다는 생각에서 쑥 빠져나왔다. 앞으로도 세상 어딘가에서 또 여러 모습의 수많은 점장들과 만나게 될 것이고 지금과 같이 이렇게 마주보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고 그들과 부딪히고 나누고 바꿔가게 되더라도 그 때 그때마다 또 잘 살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어째서 그 순간에. 아무도 상처 받거나 기분 나쁘지 않게, 되갚아 주고 싶은 복수심은 빼고 그렇지만 좀 더 나은 방향을 위하여 분명하게 들리기를 바랐다.

사실 나는 연습했던 말, 하고 싶었던 말의 반의 반도 다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정적과 어색함 속에서도 순간 고요히 숨죽이며 들어주는 반짝 거리는 눈빛들을 봤다. 희망한다는 말은 크고 거창한 것이 절대 답이 될 수 없을 것 같았다. 희망한다는 것은 이 반짝 거리는 눈과 같다고, 이 눈빛을 가진 이들이 자신의 일터에서 늘 반짝반짝 빛나기를 늘 건강하게 존중받으며 행복하기를 바란다. 굵직한 뜻과 마음만을 부탁하듯이 전하고 일하던 곳을 나왔다. 반년이 꼭 수 년 같았던, 깊은 숨을 내쉬며 그 속을 밀고 나오는데 하늘이 먼저 보였다. 영화 속에서 전쟁과 폭풍이 지나 간 후이면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나오던 고요한 그 하늘, 가을 하늘이 너무나도 쨍하게 맑고 파랗다. 이대로 내 인생의 전쟁도 잠시 쉬어 가는가. 그렇지만 더 이상 인생을 전쟁에 비유하고 싶지는 않다. 참 열심히 자알 놀다 간다.

 

이슬 비아
세상에 온 의미를 찾아가는 촌스러운 이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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