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상도의 아들은 복을 많이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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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상도의 아들은 복을 많이 받았다
  • 최태선
  • 승인 2021.10.18 0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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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선 칼럼
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관점으로 보면 곽상도의 아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영광이다. 먼저 곽상도가 복을 받았다. 그리고 후대인 아들이 복을 받는 것이다. 곽상도가 나가는 교회에서 곽상도와 그의 아들은 얼마나 부러움의 대상이었을까. 그가 내는 헌금과 그가 가진 권력으로 그는 그가 나가는 교회의 자랑이었을 것이다.

얼마 전 여의도순복음교회에 윤석렬이 참석했다. 오늘날 교회의 특성상 어떤 특정한 개인이 교회에 나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그러나 윤석열과 같은 사람이 온다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설사 윤석열과 같은 사람이 예배에 참석한다고 해도 그에게 특별대우를 한다는 것은 교회로서 정말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요즘과 같이 대면예배에 참석하는 사람의 수가 제한을 받는 상황이라면 윤석열 같은 교인 아닌 교인이 예배에 참석하는 것을 불허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여의도순복음교회는 내로라하는 정치가들이 자신들의 교회를 찾는 것을 자랑으로 안다. 역대 대통령 후보 가운데 그 교회를 찾지 않은 후보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자신들의 교회가 한국교회의 대표라는 사실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복음이 무엇인줄 안다면 그와 같은 일이 얼마나 참람한 일인가를 알아야 한다. 그러나 내로라하는 대형교회들은 모두 이런 일을 자랑으로 안다. 그런 일에서 자신들의 자부심을 느낀다. 한 마디로 오늘날 교회들은 쓰레기 하치장이 되었다. 아무리 썩은 내가 진동해도 그들은 그것을 맡지 못한다. 코가 마비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영이 마비된 것이다.

그런 일들로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이 무엇인가. 그들은 계급의 사다리를 공고히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대인이 있고 대인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더 많이 받는 사람들이다. 대인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더 많이 받아 세상에서 성공하고 부자로 산다. 그래서 교회가 커지면(사랑의 교회에서처럼) 가난한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을 해보라. 여의도순복음교회만 그런가. 대형교회들만 그런가. 곽상도가 나가는 교회만 그런가. 작은 교회들은 그렇지 않은가. 아직도 여전히 그렇지 않은 더 많은 교회들이 있는가. 내가 단정을 지어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그런 교회를 본 적이 없다.

복음의 알짬은 하느님 나라다. 하느님 나라의 가장 큰 특징은 평등이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에서 평등을 말하면 그것을 불의로 받아들인다. 용공빨갱이 좌파 소리를 듣는다. 특히 위에 등장했던 교회들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그러나 그런 그들은 자신들이 하느님만을 높인다고 주장한다. 하느님만을 높이는 것이 정말 복음적인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하느님은 당신을 높이려 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인간에게 다가오시기 위해 스스로를 낮추신다.

“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그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느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의 마음을 품어야 한다. 예수의 마음은 모든 것을 버리고 비우는 마음이다. 성공을 향해 높이 올라가려는 마음이 아니라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을 보고 그 사람처럼 되기 위해 아니 그보다 한 계단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 종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이해하기 어려운가. 이 말을 못 알아듣겠는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이것이 싫은 것이다. 누구라서 냄새나는 노숙자들을 좋아하겠는가.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들을 선생님으로 섬겨야 한다.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주님도 그 일이 어렵다는 것을 아셨다. 그래서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섬기는 것을 당신을 섬긴 것으로 간주해주신다는 말씀까지 하신 것이 아닌가.

그래도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래서 윤석열도 교회에 나갈 수 있고, 곽상도는 교회에서 주인 노릇을 할 수 있다. 그런 교회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떠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내가 이해하기로는 하나님은 높임을 받기 원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우리의 친구가 되기를 원하신다.

“내 계명은 이것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사람이 자기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내가 너희에게 명한 것을 너희가 행하면, 너희는 나의 친구이다. 이제부터는 내가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겠다. 종은 그의 주인이 무엇을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들은 모든 것을 너희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이 말씀을 묵상해보라. 주님은 자신을 낮추신다. 그분은 제자들을 당신의 친구로 삼으시길 원한다. 제자들이 서로 사랑하고 서로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어놓을 수 있는 사람들이 될 때 아버지의 뜻이 땅에서도 이루어진다. 그 일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될 때 주님은 그 사람들을 친구라고 불러주신다.

여기서 친구라는 단어의 의미를 잘 생각해보라. 친구는 어떤 사람인가. 친구는 단순히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을 의미하지 않는다. 여기서 친구란 평등한 관계를 의미한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친구로 불러주신 이유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평등한 관계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모두가 평등한 나라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하느님 나라에는 대인이 없다. 스스로 대인이 되려는 자는 하느님 나라의 반역자이다. 하느님 나라의 왕이신 예수님도 제자들의 친구가 되셨다.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이렇게 친구가 되는 것이다. 친구가 된다는 것은 평등한 관계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한사코 큰 사람들만을 자랑으로 여기고 큰 사람이 되려는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의 제자인가. 도대체 누구를 믿는 것인가.

더구나 평등한 관계가 이루어진 친구들끼리만 서로 사랑해서는 안 된다.

“너희를 사랑하는 사람만 너희가 사랑하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세리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자매들에게만 인사를 하면서 지내면, 남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냐? 이방 사람들도 그만큼은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

세리도 그만큼은 한다. 곽상도도 자신의 아들은 사랑한다. 그러나 자기 아들에게 돌아가는 몫이 누구의 것이어야 하는가.

이방 사람들도 그만큼은 한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가족의 울타리와 교회의 울타리에 갇히지 않는다. 가족은 그리스도인들이 울타리에 갇히지 않도록 울타리를 넘는 사랑을 실천하는 다른 가족을 지원하고 응원하고 인정해주는 친구가 되어야 한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교회의 울타리를 넘어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교인들을 지원하고 응원하고 인정해주는 곳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의 친구들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친구가 되어야 한다. 그 여부가 이 말씀에 달려 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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