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가르침의 대상 아니라 배움의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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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가르침의 대상 아니라 배움의 대상
  • 김경집
  • 승인 2021.10.11 12: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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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집 칼럼

어느 지역 신문사에 연이 닿아 연중 심층기획 하나를 제안하게 되었다. ‘청년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뤄보자고 했다. 이참에 열게 된 ‘청년 경청회’에서 좌장을 맡았다. 말이 좌장이지 나는 그냥 청년들이 말할 수 있는 기회를 배려하는 데만 신경을 썼다. 시장을 비롯해 공무원, 지방의회 의원, 지역 유지 등이 참석했고 많은 청년들이 자리를 채웠다. 여섯 명의 청년들이 쏟아내는 열변에 어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어른들이 청년들의 현실을 얼마나 잘못 이해하고 있는지 보여주는 시간이었다.

공감은커녕 현실 인식이 따르지 않는데 무슨 정책이 현실적이며 생산적일까. 내 자식만 괜찮다면 다른 청년들의 삶은 무관심하다. 관심을 가진 척 하지만 공감도 행동도 따르지 않는다. 청년들의 매섭고 아픈 지적에 어른들은 고개를 푹 숙일 수밖에 없었다. 경청회가 끝난 뒤 시장은 고맙다고 인사하며 청년들을 위한 현실적이고 직접적인 정책을 시행하겠다고 약속했다. 그게 얼마나 지켜질지는 두고 볼 일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듣는 게 먼저다

대통령선거에 나선 어느 후보의 캠프에서 자문을 요청했다. 나는 그런 일에 참여하는 게 생리에 맞지 않지만 청년을 위한 정책과 공약을 마련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면 아이디어는 제공하겠다며 만남에 응했다. 정치인들 대부분이 그렇듯 그들의 관심은 선거에서 승리하여 권력을 차지하는 것이 궁극이었고 청년들에 대한 정책도 오로지 표를 얻기 위한 게 일차적 목적이었다. 입으로는 ‘청년’을 달고 떠들어대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 물어보면 대부분 추상적이고 선언적이며 뜬구름 격이다. 청년들을 만나서 직접 들어봤느냐 묻자 앞으로 그럴 생각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아마 그러지 않을 것이다. 설령 만나도 표를 얻는 아이디어 수집에만 몰두할 것이다.

더 길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중에 최종 후보로 선출된다면, 혹은 떨어지더라도 상대 후보 정책팀에게 ‘청년청’을 신설하여 모든 정책을 수렴하고 시행할 수 있게 하라고 제안했다. 무조건 ‘작은 정부’가 능사가 아니다. 1970년대에 석유파동으로 휘청거릴 때 ‘동력자원부’라는 부서가 생겼던 것처럼, 설령 한시적이더라도 그런 적극적이고 선제적인 방향을 잡아야 한다. 지난 번 경청회 때 참석했던 시장과 고위공무원들은 ‘청년국’을 신설하라는 제안에 직급 개편은 복잡하고 힘들다며 난색을 표했다. 그렇다면 ‘청년재단’을 만들어 지원하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에 다음 임기 때는 그렇게 하겠노라 약속했다.

솔직히 나도 청년 세대를 완전하게 이해하지 못한다. 나이 들어서가 아니다. 신체적 노화야 어쩔 수 없다. 그러나 나름대로 심리적으로는 노화에 저항하며 젊은 사유를 유지하려 애쓴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내 청년 시절의 삶과 지금 청년의 삶이 너무 달라서 나는 온전하게 그들의 삶을 공감하지 못한다. 내 세대는 취업 걱정 거의 하지 않았다. 고등학교만 졸업해도 일자리 찾기 어렵지 않았다. 지금보다 훨씬 가난한 시절이었지만 결혼하지 못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고 마음에 맞는 이성에게 과감하게 사랑을 고백할 수 있었다. 가진 것 없어도 취직하면 한 가정은 꾸려갈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의 청년들은 결혼이 불확실하다. 취업이 되지 않으면 내 한 몸도 건사하기 힘드니 마음에 드는 이성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것도 사치가 되었다. 청춘이 사랑을 포기한 것은 자신의 미래의 삶을 포기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렇게 어른과 지금 청년의 삶은 하늘과 땅만큼이나 크게 다르다. 부동산이 폭등하여 영혼을 끌어 모아도 내 집 마련은 요원해진 그들을 위해 많은 곳에 임대아파트를 지어 공급하려는 노력을 어른 세대가 하는가? 그러면서 무슨 청년 정책 운운하는지 모르겠다. 그들의 삶을 체감하고 동감하며 어떻게 하면 그들의 삶을 한 뼘이라도 더 나아지게 할 생각을 하고 실천하는 어른들이 얼마나 될까? 말로만 떠들고 내 자식만 거기에 해당되지 않으면 나 몰라라 외면한다.

입장 바꿔 내가 청년이라면 과연 지금의 어른들에게 존경심은 고사하고 소통할 수 있는 상대라고 여길 수 있을까? 원망과 야속함이 훨씬 더 클 것이다. 여전히 모든 권력과 재력을 손에 쥐고 있으면서 자신의 욕망에만 매달려 있는 어른들에게서 무슨 희망을 볼 것이며 무슨 신뢰를 가질 것인가? 공청회가 아니라 경청회로 정한 것은 두고두고 잘한 일이었다. 어른들에게는 아예 발언권을 주지 않고 오로지 청년들의 현실과 하소연을 고스란히 체감하라고 요구하는 게 맞다.

교회부터 정신 차려야

교회라고 다를까? 교회에서 청년들이 보이지 않는다고 한탄할 뿐 그들에게 먼저 다가가 그들의 삶을 들어보려는 적극적이고 선제적인 태도를 보인 적 있는가? 아무리 교구에 청년 문제를 다루는 부서를 마련한들 예전의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백약이 무효다. 그런데도 여전히 그들은 앉아서 자신들의 방식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의사결정까지 내린다. 그러니 무슨 호응이 있을까! 생각이 바뀌지 않으면 행동이 바뀌지 않는다.

25년 전쯤 본당에서 청소년분과 위원장 소임을 받았을 때 주임신부님이 이전과는 다른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접근했으면 좋겠다며 의견을 물었다. 여러 제안 가운데 주일학교 교사들에 대한 대우를 획기적으로 바꿔보자는 것이 있었다. 신자로서 봉사는 의무일 수 있지만 그래도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하는 청년들에게 지원이 있었으면 좋겠다 싶어서 충분하지는 않더라도 학비를 보조해줘서 그들이 교회에 쏟는 시간에 해당하는, 아르바이트로 벌 수 있는 비용 정도는 지원하자는 취지였다. 신부님도 동의했지만 사목회에서 난색을 표했다. 아무 대가 없이 봉사하는 다른 단체나 분과에 차별적이라는 반론이었다. 결국 끝내 이루지 못했다.

다른 한 가지 제안은 교사들에게 양복이나 원피스 등의 의류비 지원이었다. 많은 신자들의 불평 가운데 하나가 교사들의 복장이 단정하지 못하다는 등의 것이었기에, 그렇다면 교사들에게 깔끔한 옷을 마련할 비용을 지원하자 했더니 마찬가지로 그건 특혜라서 인정할 수 없다며 거부했다. 이제는 나도 그 성당을 떠난 지 오래여서 자세한 변화를 다 살필 수 없지만 지금은 교사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그나마 있는 교사들도 예전 같은 열정이나 헌신이 없다고 한다. 그러면서 청년들이 부족하다고 아우성이다. 그 불평에 대해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자업자득이라고.

제발 자신이 살아온 방식대로 지금 청년의 삶을 재단하고 처방하지 말기 바란다. 교회는 더더욱 그렇다. 교회가 청년들의 삶에 공감하고 복음정신에 맞춰 그들의 삶에 섞이고 후원하는 구체적이며 지속적이고 미래지향적인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사회가 그렇게 하지 못할 때 교회가 나서서 실천하고, 그 성과를 통해 세상에 좋은 모범을 제시함으로써 반성하고 개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해야 한다. 그게 지금 교회의 중요한 사명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어른들의 생각을 일단 접어두고 직접 청년들에게 묻고 그들이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그건 가장 기본적인 전제다. 아마 앞서 말한 모임을 공청회로 했다면 참석한 어른들이 이러쿵저러쿵 자신들의 방식으로 해석하고 재단하거나 변명하는 말로 넘쳤을 것이다. 그러나 청년들의 입으로 쏟아내는 현실의 내용을 듣고 거기에 참석한 어른들이 탄식하고 미안해하는 것을 보고 나는 일단 성공적이라고 판단했다. 그래서 앞으로 더 여러 차례 경청회를 열겠다고 약속했고 신문사에서도 지속적인 기획보도와 인터뷰를 다루겠다고 약속했다.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있다. 그 변화의 가장 크고 우선적인 혜택은 미래 세대에 넘겨야 한다. 더 이상 옛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자기네 멋대로 판단하는 어른들은 입 닥치고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건 시대에도 교회에도 죄 짓는 일이다. 이미 늦었다. 더 늦으면 아예 회복할 수 없는 절망과 저주만 남을 뿐이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해야 한다. 교회가 그 모범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청년이 없다고 징징대는 교회는 과연 청년들에게 무슨 희망을 줬으며 어떤 공감과 격려, 어떤 실천으로 그들을 응원했는지 조용히 반성해야 한다. 교리나 신학보다 공감과 사랑이 훨씬 더 값지고 복음적이다. 청년들을 가르치려들지 말고 그들의 말부터 들어야 한다. 청년의 절망은 우리의 미래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징표다. 제발 그들의 말부터 듣자.

“받아 내려고 손을 내밀지 말고
갚아야 할 때 손을 거두지 마라.”(집회 4, 31) 

 

* 이 글은 종이신문 <가톨릭일꾼> 2021년 가을호에 실린 것입니다.

김경집 바오로
인문학자
<눈먼 종교를 위한 인문학>, <생각을 걷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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