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현장에서 알아듣는 하느님의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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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현장에서 알아듣는 하느님의 침묵
  • 조민아
  • 승인 2021.10.04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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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민아 칼럼

전례와 기도생활에서 침묵은 하느님과의 일치로 이끄는 깊고 성실한 초대다. 가톨릭을 비롯한 여러 영성 전통은 침묵을 궁극의 기도로, 깨달음의 언어로, 수행의 가장 높은 경지로 추대해 왔다. 그러나 침묵이 고통과 함께 묶일 때는 어떤가? 종종 억압을 드러내는 현상이자 구조적 폭력의 공범으로 여겨지곤 한다. 강요된 침묵, 이웃을 외면하고 살길을 도모하기 위한 침묵, 홀로 침잠하여 개인의 평안만을 구하는 침묵 등 말이다.

“흑인의 삶은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운동에는 “백인의 침묵은 폭력이다.”(White Silence is Violence)라는 구호가 늘 따라다닌다. 미투(#Me Too) 캠페인은 유사 이래로 지속 되어 온 여성과 아동, 성소수자에 대한 성폭력과 성희롱을 가능케 한 침묵의 메커니즘을 끊기 위한 운동이다. 그러나 고통의 현장에서 침묵이 반드시 억압적이고 폭력과 짝을 이룬, 극복해야만 할 어떤 것일까?

 

사진출처=pixabay.com

하느님의 침묵은?

침묵은 다양한 얼굴과 표정을 갖고 있다. 지난 일 년 반 우리가 겪어온 팬데믹의 고통 속에서 경험한 침묵이 특히 그랬다. 사람이 다 빠져나가고 수백 구의 시체를 싣는 냉동트럭만 도로를 채우고 있는 어느 거리의 침묵. 팬데믹으로 모든 것을 다 잃고 빈 거리에 나 앉은 노숙인의 무표정한 침묵. 죽어가는 부모의 마지막 모습을 창문 저편에서 바라보아야 하는 자식의 침묵. 밀려드는 환자를 감당하지 못해 복도에 쓰러져 버린 의료진들의 망연한 침묵. 침묵은 이렇듯 저승처럼 스산하게, 망령처럼 도시와 산하를 떠돌며, 말로 담아 낼 수 있는 슬픔과 절망을 품어 내며, 말을 잃어버린 모든 이들의 고통의 자리에 있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침묵의 얼굴, 말로 다다를 수 없는 깊이와 넓이를 품은, 말이 견딜 수 없는 공포와 슬픔을 가진, 말이 지킬 수 없는 약속을 담은 침묵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하느님의 침묵을 생각했다. 재난이 닥쳐올 때 우리는 항상 “왜 하느님은 침묵하시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우리는 침묵 자체가 하느님의 언어요, 하느님의 소통 방법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고 보면 침묵은 하느님을 많이 닮았다. 침묵은 그 존재와 활동이 하나다. 하느님이 당신의 존재를 나누어 세상을 창조하시고, 당신의 힘을 통해 생명들을 살아있게 하시듯, 침묵은 자신의 존재를 깨뜨려 말이 비롯되게 하며, 자신의 존재와 힘을 통해 다른 것들을 드러낸다.

하느님이 처음과 나중을 주관하시듯, 침묵은 인간의 모든 말과 행위의 맨 처음이며 맨 마지막이다. 침묵은 또, 마치 하느님의 존재와 목적이 분리될 수 없듯, 존재와 목적이 하나다. 그리고 침묵은 모든 것을 결국 자신에게로 불러들인다. 인간은 침묵을 통해서 시원적인 것, 창조 전의 시간에 참여할 수 있으며, 침묵으로 마침내 최후에 이른다. 침묵은 항상 인간을 위해 준비되어 있으며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하는 유일한 존재이며, 유일한 현상이다. 침묵처럼 그렇게 어느 순간에나 다른 것을 위해 존재하고 활동하는 이는 하느님뿐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하느님의 가늘고 낮게 읊조리는 소리

하느님의 침묵은 성서에서도 낮고 조용하게 그 존재를 드러낸다. 예언자 엘리야가 만난 침묵의 하느님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하느님이 어떻게 침묵을 통해 일하시는지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아합왕 무리들과의 오랜 싸움과 이스라엘 민중들의 계속되는 반목 때문에 지칠 대로 지친 늙은 예언자 엘리야는 로뎀나무 아래에서 통곡한다. 죽는 것 밖에는 다른 길이 없으니 죽여 달라고 기도한다. 하느님은 우선 천사를 보내어 엘리야가 기력을 회복하도록 보살피신 후 그를 호렙산으로 부르신다.

모세가 하느님을 만나고 하느님으로부터 계명을 받았던 호렙산에 오르며 엘리야는 이스라엘 민족의 미래에 대한 하느님의 분명한 대답을 기대했을 것이다. “네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하느님이 예언자에게 묻는다. 질문에 답하는 엘리야는, 언뜻 아합왕의 무리와 이스라엘 민중을 고발하는 것 같지만, 실은 하느님을 도발한다.

“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신과 맺은 계약을 저버리는 것을 보고 만군의 하느님 야훼를 생각하여 가슴에 불이 붙고 있습니다[…]. 이 백성은 당신의 제단을 헐었을 뿐 아니라 당신의 예언자들을 칼로 쳐 죽였습니다. 이제 예언자라고는 저 하나 남았는데 그들이 저마저 죽이려고 찾고 있습니다.”(1열왕 19,10).

그는 아마도 속으로 이런 말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느님,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당신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다 잔인하게 살해당하고 이제 하나 남은 저도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습니다. 하느님 당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답답해서 가슴에 울화가 치밉니다. 제발 말씀을 해주십시오!”

하느님은 크고 강한 바람과 지진과 불의 위력을 보여주시지만, 그 가운데 계시지는 않는다. 계시지 않는다는 것은 아무 의미를 찾을 수 없다는 뜻이다. 하느님은 그 웅장한 소리들을 통해 엘리야와 소통하지 않으셨다. 그 대신 하느님은 “조용하고 여린 소리”로 당신을 드러내셨다. 공동번역의 “조용하고 여린 소리,” 개역성경의 “세미한 소리”는 원어인 히브리어로는 קול דממה דקה(qōwl dəmāmāh daqqāh)다. “가늘고 낮게 읊조리는 소리”인데, 내가 주목하고 싶은 것은 “읊조리고 웅얼거리는” 등의 의미를 가진 히브리어 “דממה”다. 이 단어의 뿌리는 우가릿어 “dmm”인데, 짐승이나 사람이 소리를 낮추고 슬퍼하며 애도하는 것을 표현할 때 쓰는 단어다. 새끼를 잃은 어미 개가 자리를 뜨지 못하고 끄응끄응 신음하는 소리랄까? 황망한 슬픔 앞에 목소리가 터져 나오는 것을 억누르고 어깨를 들썩거리며 낮게 꺼억꺼억 우는 모습이라 할까?

 

사진출처=pixabay.com

엘리야를 움직이는 침묵의 소리

소리를 낮추시는 이 침묵의 하느님은, 말씀의 현현만을 기대하는 우리 눈에 잘 뜨이지 않지만 구약 성서의 다른 곳에서도 얼마든지 만나볼 수 있다. 시체가 되어 땅에 묻힌 아벨의 울부짖음을 전달하신 하느님은 어떨까. 민중 신학자 안병무 선생은 아벨이 죽어 피를 대지에 쏟고 그 몸이 묻힐 때까지 아무 역할도 하지 못한 하느님이, 그가 흘린 피의 이야기를 되살려 카인의 종주권에 대항하여 싸웠다고 표현했다(안병무, “종주권과 민중의 투쟁: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

어쩌면 하느님이 아벨의 피의 소리를 “전달”하신 방법은, 당신의 목소리를 낮추고 천지사방의 소리 또한 잠잠케 하여, 쓸쓸하고 무섭고 슬프고 억울하게 죽은 아벨의 목소리가 온 우주에 공명이 되도록 했던 것이 아닐까. 그리하여 그 도저한 침묵 속에서 망자의 흐느낌만 울려 퍼지게 하여, 동생을 살해하고도 양심의 소리를 듣지 못한 카인이 악귀가 되어버린 자신의 모습을 직면하게 하신 건 아닐까.

분명한 답을 원하며 읍소하는 예언자 엘리야에게 하느님은, 조용하고 여린 소리로, 낮게 흐느끼는 소리로, 침묵의 소리로 물으신다. “네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하느님의 침묵을 들은 엘리야는 그 자리에서는 그 분의 뜻을 바로 알아듣지 못한다. 그러나 이내 이어진 엘리야의 행보가 흥미롭다. 이스라엘의 미래를 어깨에 짊어지고 홀로 분투하던, “나 혼자 남았다.”고 하느님께 울부짖던 엘리야는, 침묵의 소리로 소통하시는 하느님을 들은 후 길을 떠나 예후와 엘리사를 세워 그가 가진 권위를 나눈다. 침묵의 하느님은 어쩌면, 자기 자신의 목소리만 듣고 있던 엘리야의 마음과 귀를 열어 다른 이들과 연결하고 소통하게 하셨던 건 아닐까?

언어는 권력이다

당신의 소리를 낮추어 낮은 곳에 있는 이들의 존재를 들어 올리시는 하느님은 예수를 통해서도 볼 수 있다. “간음한 여자”의 이야기가 나오는 요한복음 8장을 보자. 이른 아침 성전에서 민중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가르치는 예수 앞에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이 들이닥친다. 간음현장에서 발각된 두 사람 중 여인만을 잡아끌고 온 걸 보면 이들은 국법인 모세 율법에 따라 죄를 묻고 처형하는 절차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던 듯하다. 예수를 궁지에 몰아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고 제거하려는 게 그들의 목적이었다.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 이들은 말과 글을 업으로 삼고 사는 사람들이다. 성난 그들의 머리 속엔 성마른 말들이 가득 차 있었을 것이다. 예수가 무슨 말을 하든 반박할 논리가 준비되어 있었을 것이다. 예수가 여인의 공개처형을 반대하면 예수를 위법자로 몰아세우고, 반대로 예수가 공개처형을 찬성한다면 위선자로 몰아세우려 했을 것이다. 사건의 본질은 호도하고 선정적인 이슈만 부각시켜 대중을 선동하고, 법과 선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편 가르기를 하려는 작태가 우리시대 언론과 그들에게 권위를 제공하는 지식인들을 꼭 닮았다.

현장에서 잡혀온 여인은 어떤가. 그는 말을 박탈당했다. 간음현장에서 붙잡혔을 때부터 그 자리에 있었을 상대 남성과는 달리 여성이라는 이유로 그에겐 자신의 입장을 표현하고 항변할 말이 허락되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간음이라는 애매한 단어로 표현된 행위를 저지르게 된 것 조차 자신의 의사를 분명하게 밝힐 말의 힘이 없었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다.

발언이 허락되지도 않았거니와, 이 상황에서 무슨 말을 한다고 한들 말과 글의 전문가들인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을 설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여인은 사랑을 선포한다고 알려져 있는 예수에게 조차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 놓지 않았다. 예수 또한 말의 힘으로 살아가는 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언어는 그 자체가 권력이다. 힘 있는 자들의 질서로 세밀하게 직조되어 있는 상징체계다. 영국의 정치학자인 제니 에드킨스(Jenny Edkins)는 언어 권력 밖에 존재하는 이들의 경험에 대해, “그들이 말할 수 있는 것은 말이 되지 않고, 말하고 싶어하는 것은 말 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간음이라 이름 붙은 현장에서 홀로 죄를 뒤집어쓰고 끌려와 수많은 남성들에게 둘러 싸여 손가락질당하고 있는, 간음한 여자라 이름 붙여진 이 이름 모를 여성, 그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말이 되지 않고, 말하고 싶어하는 것은 말 할 수 없다.

 

사진출처=pixabay.com

예수, 침묵으로 말의 방향을 돌리다

예수는 이 말을 박탈당한 여인을 앞에 두고 자신의 말을 포기한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 뿐 아니라 예수도 언어 권력을 사용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독특한 화법과 율법 해석으로 전통주의자들의 허를 찌르던 선생 예수, 수려하고도 살뜰한 새 메타포로 하느님 나라를 그리던 시인 예수는 말을 빼앗긴 여인 앞에서 말을 내려놓는다. 그리고 몸을 굽혀 여인의 침묵에 동참한다.

예수가 손가락으로 땅에 쓴 것이 무엇이었는지 우리는 모른다. 복음서 기자가 의미를 밝힐 의사가 없었던 것으로 보아, 그 의미는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듯하다. 복음서 기자가 관심 있었던 것은 예수의 몸짓이요 예수의 침묵이었던 것 같다. 이 침묵은 강요된 침묵이 아니다. 침묵을 강요당한 이 앞에서 자신의 기득권을 내려놓은 자발적 침묵, 자발적 가난이다.

말을 빼앗긴 여인의 대변자가 되기에 앞서, 그를 대신해 싸우기에 앞서, 예수는 여인과 같은 처지가 되기를 자처하여 여인의 존재를 드러낸 것이다. 정교한 논리와 화려한 수사를 내세울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여인을 항변하며 아무리 맞서 본들, 정작 말을 빼앗긴 이의 존재는 더 작아질 뿐이다.

오고 갈 말의 내용 뿐 아니라 그 말의 형태 속에 더 날카롭게 쏟아져 나올 공격성, 상대방의 말을 부수기 위해 내 말의 칼을 갈아야 하는 논쟁의 순리, 그 가운데 끊임없이 대상화 되어 더 작아지고 더 비참해질 여인 앞에서 예수는 말을 버림으로써, 말을 빼앗긴 이와 침묵으로 연대함으로써 언어 권력자들의 논리를 끊어 버리고 그들의 질서를 흔들어 균열을 낸 것이다.

예수의 침묵에 당황스러워하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새인들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저 여자를 돌로 쳐라.”하는, 선문답 같은 예수의 일갈을 듣고, 밖으로 조준하던 말의 화살을 안으로 돌려 자신을 돌아본다. 이들은 아마 예수의 짧은 말보다도 그의 침묵에 반응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말과 논리 속에 존재를 묻어 버리고 의미를 상실한 명령과 구호를 반복하던 이 말의 권력자들이 예수가 만든 침묵, 그로 인해 생긴 말의 여백, 말의 틈새에 발을 디딘 순간, 갑작스런 멈춤에 흔들리며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던 것이 아닐까. 합리성과 당위성 밑에 숨겨져 있던 부끄러움이란 양심의 소리를 듣게 된 건 아니었을까.

그들이 뿔뿔이 흩어져 사라진 후, 예수는 남은 여인을 돌아본다. 그러나 그에게도 긴말을 하지 않는다. 그는 침묵으로 그가 하고자 했던 모든 위로를 하였고, 모든 당부를 하였다. 그의 침묵은 말이 담을 수 없는 것들을 담았다. “나도 너의 죄를 묻지 않겠다.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라.”라는 그의 말은, 명령이 아니요, 구호가 아니요, 말을 위한 말이 아니었다. 마음과 나란히 있는 말이다. 그의 마음이 여인에게 닿았듯이, 마음에 떠밀려 표면 위로 떠오른 말일 뿐이다.

고통 받는 이들과 소통하는 하느님의 언어

엘리야의 하느님, 아벨의 하느님, 그리고 간음한 여인 앞의 예수는 침묵을 통해 우리를 변화시키는 하느님이다. 이 성서 본문들 속의 침묵은 고통을 영속시키는 메커니즘이 아니라, 오히려 고통 받는 이들과 소통하는 하느님의 언어다.

당신의 존재를 떼어 생명을 내신 하느님, 당신의 힘을 비워 가난한 이들을 들어 올리신 하느님의 현존이다. 계시지 않는 것이 아니라 늘 계시기에 오히려 드러나지 않는 하느님의 항상성이다. 그리고 그 침묵은 뉘우침과 깨달음이라는, 회심과 전향이라는, 인간의 논리와 법이 건드릴 수 없는 영역으로 우리를 이끈다.

침묵으로 소통하시는 하느님을 우리가 들을 수 있는 길은 침묵이다. 우리는 우리의 말을 내려놓음으로써, 당신의 존재를 비워 “조용하고 여린” 생명의 소리와 고통의 소리를 듣게 하시는 하느님의 침묵에 참여할 수 있다. 이렇게 침묵에 바탕을 둔 영성은, 고통의 현장을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현장에 밀착되었을 때, 가장 가까이 있을 때 경험할 수 있는 자기 비움의 영성이다. 우리의 말을 내려놓고, 내면의 소음조차 끄고, 그 자리에 말 없으신 하느님과 말을 잃은 이웃을 채우는 영성이다.

“나”를 비움으로써, 나의 소리와 생각 대신 하느님의 낮은 흐느낌을 듣는 영성이다. 그분으로 인해 비로소 들리는 소외된 이들, 말을 잃은 이들의 소리를 듣는 영성이다. 그리하여 고통의 자리에 늘 계신 하느님과의 일치로 이어지는 신비다. 

 

조민아
미국 조지타운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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