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차르트에서 혁명을 떠올린다
상태바
모차르트에서 혁명을 떠올린다
  • 김경집
  • 승인 2016.07.27 17:2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경집 칼럼] 

작업실 수연재의 앞문과 뒷문을 열어 환기해도 무더위는 조금도 사윌 조짐이 없다. 설령 바람이 훑어도 후끈한 바람이어서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저 좁은 작업실의 환기에는 조금 도움이 될 것이려니 하며 스스로 위로하고 더위에 무뎌지도록 주문을 걸어볼 뿐이다. 이럴 때는 음악을 듣는 것도 도움이 된다. 비발디의 사계 중 ‘여름’도 좋지만, 나는 이럴 때는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을 튼다.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에서 쌍엽기를 타고 날던 초원을 떠올리게 되어서일까? 클라리넷의 중후하면서도 농염한 선율이 바람결 같다.

하루 종일 클래식 음악을 틀어주는 KBS 1FM을 듣다보면 모차르트와 베토벤 음악을 한 번도 건너뛰는 법이 없다. 그런데 나는 고전음악의 정수며 가장 아름다운 음악의 창조자인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을 때마다 그의 ‘혁명성’을 떠올린다. 모차르트에서 혁명을 떠올린다니 뜬금없다고 의아해 할 분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에게서 혁명을 본다. 물론 그는 기존의 다양한 음악 양식과 표현기법을 망라하며 무수한 협주곡 등을 작곡함으로써 일종의 종합선물세트와 같은 음악을 남겼지만, 그가 기득권에 맞서 자신의 세계를 지키고 대중의 호흡을 끌어들였다는 점에서 나는 혁명성을 본다.

그 대표적 사례가 바로 그의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이다. 1786년 초연된 이 작품은 모차르트가 황실과 교회 등 당시 권력자들과 결별하게 한 전환점을 마련했다. 이듬해 발표된 <돈 조반니>도 그 연속선상에 있다. <피가로의 결혼>은 1781년에 쓰인 프랑스 극작가 보마르셰의 원작을 토대로 만들어진 오페라다. 보마르셰의 희곡이 초연된 것은 1784년이다. 그러니까 모차르트는 그 초연 2년 후에 이 작품을 오페라로 만들었던 것이다. 이 작품은 기지에 찬 하인 피가로가 절세의 미녀였던 자신의 약혼녀 수산나를 사악한 알마비바 백작이 빼앗으려 하자 그를 골탕 먹이는 이야기다. 백작부인 로시나는 자신의 남편이 아니라 피가로와 수산나 편에 선다.

피가로를 통해 작가는 구체제를 떠받치고 있는 모든 것, 이른바 귀족, 재판, 권위, 외교 등에 조롱을 퍼붓는다. 그는 사상의 자유와 언론의 자유를 도도하게 요구한다. 그는 사회적 불평등, 한편으로는 무능한 자가 향락을 만끽하고 다른 편으로는 유능한 자가 고통 속에 빠져 있는, 그런 불평등에 항의한다. “대감은 대영주이기 때문에 당신이 대단한 인물인 줄 알고 계시지만, 대감은 태어나시는 수고를 하셨을 뿐, 그 이상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 하지만 소인은, 제기랄! 그도, 제기랄! 그도 또한 향락하기 위해 모든 취미를 갖고 있지 않았던가?”

이런 내용이었으니 상연이 제대로 이뤄졌을 리 없다. 프랑스 정부는 이 작품의 공연을 불허했다. 하지만 오히려 이러한 탄압이 작품을 더 유명하게 했다. 심지어 왕비조차 보마르셰의 편에 섰다.(이것은 작품 내에서 백작부인이 피가로 편에 서는 것과 교묘하게 겹친다) 보마르셰는 왕권이 도전해 오는 싸움 속에서도 자신만만하게 뛰어들었다.

내가 모차르트의 이 작품을 들을 때마다 새삼 놀라는 것은 프랑스에서 초연된 지 불과 2년 만에 오페라로 작곡했다는 점이다. 그는 당시 유럽의 문화의 흐름을 다양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구태와 기득권에 갇히지 않고 저항하고 맞서 싸우며 자신의 주체성을 확립하는 근대 자유주의자의 면모를 확실하게 지녔다.

연극이 그랬듯 오페라도 귀족 등 기득세력의 반발을 일으킬 것을 몰랐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이 작품의 초연은 빈에서 이뤄졌지만 <돈 조반니>는 다음해 프라하에서 초연되었다. <피가로의 결혼>으로 빈의 권력자들이 모차르트를 멀리했기 때문이다.

모차르트가 바보여서 그런 작품을, 그것도 보란 듯이 도전하듯 작곡하고 공연했을까? 아니다. 그가 시대정신을 꿰뚫어보았기 때문이다. 그는 귀족사회가 아니라 신흥 중산층을 위해 작곡하고 싶었다. 그런 점에서 그는 근대정신에 감응한 음악가였다. 그는 귀족의 탄압과 지원 중단을 각오했다. 그렇게 그는 궁정과 교회 그리고 귀족들과 결별했지만 대중의 주머니는 얄팍했고 중산층을 상대로 자신의 작품이 충분히 소비될 것이라던 믿음은 현실과 어긋났다.

결국 그는 현실적 생계와 적당한 사치(그의 아내의 사치벽이 아니라 오랜 궁정 출입으로 인해 생긴 자신의 사치벽에 기인한) 등을 위해 끊임없이 작곡해야 했다. 어쩌면 그의 이른 죽음은 그러한 과로와 소외(기득권층으로부터의)가 쌓여서 초래한 것인지도 모른다.

내 글을 읽거나 강연을 듣는 이들 중 상당수가 나를 진보적 인물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마다 나는 말한다. 나는 보수적 인물이라고. 보수와 진보에 대한 정의는 매우 다양하고 각양각색이지만 내가 생각하는 보수의 가치는 이렇다. 내가 가정에서 배운 가치인 인격, 배려, 도덕 등과 학교에서 배운 민주주의, 정의, 공정성 등을 위해 최선을 다하며 그것들을 지키는 것이 바로 보수의 힘이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능멸되고 붕괴되며 퇴행하는 것을 보고도 모른 척하거나 모르거나 심지어 자신의 이익을 위해 그 왜곡에 앞장서는 자들은 보수가 아니라 수구일 뿐이다. 교과서에서 배운 대로 사는 것이 보수적 가치라면 진보는 지금은 그따위 교과서로 살 수 없다며 완전히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는 입장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그런 진보를 감당할 힘도 마음도 없다. 결국 보수냐 진보냐 하는 이분법이 아니라 보수와 수구를 가려내는 안목이 필요한 때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한국교회는 그런 안목이 갖고 있으며 그런 역할을 수행하고 있는가?

지금 한국교회는 신구교를 막론하고 보수 운운하며 수구적 가치와 세력들에게 기생하는 모습을 보인다. 아니, 기생이 아니라 그런 가치를 선도하고 있다고 말하는 게 옳다. 말로는 하느님의 사랑 운운하며 떠들지만 실천은 사두가이요 바리사이일 뿐인 교회와 신자들이 너무 많다. 그러면서 스스로를 보수의 교두보라고 착각한다. 인지부조화요 착각도 유분수일 뿐이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 21)는 예수님의 따끔한 질책은 지금 우리에게 고스란히 살아있다. 비겁과 불의를 보수적 가치로 착각하고 비인격성과 악에 침묵하거나 동조하는 것을 ‘중립’이라고 둘러대는 교회와 신자들이 넘치는 한 한국교회의 존재 의미는 무망하다.

우리시대를 사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진정한 보수와 진보의 가치에 대해 고민하고 올바른 실천의 방향으로 담대하게 나아가야 한다. 모차르트의 음악을 들으며 단순히 음악의 즐거움만 누릴 게 아니라 그의 시대정신에 대한 인식과 실천을 떠올려야 할 때다. 여름의 무더위는 더욱 기승을 부린다. 그러나 나는 모차르트를 들으며 가을을 꿈꾼다. 그런 믿음이 이 무더위에 굴복하지 않게 할 것임을 알기에.


김경집 바오로
인문학자, <눈먼 종교를 위한 인문학> 저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