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사람은 교회의 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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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사람은 교회의 보물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1.09.22 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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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 칼럼
낡은 앨범 안에는 아직도 그때 스크랩 해 놓은 기사가 꽂혀 있다. (사진=한상봉)
낡은 앨범 안에는 아직도 그때 스크랩 해 놓은 기사가 꽂혀 있다. (사진=한상봉)

“어린이와 가난한 사람은 교회의 보물”이라는 신문기사를 다시 읽었습니다. 1978년, 그러니까 제가 중학교 3학년 때인데, 제 앨범에는 그때 제가 가위로 오려놓은 요한 바오로 1세 교종 선출 관련 기사가 끼어 있습니다. 교종을 “1912년 10월 17일 알프스 산의 돌로미테스 계곡 포르노 디카날레 마을에서 가난하며 사회주의자였던 아버지와 자애로우면서 끈질긴 성품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고 소개한 이 기사에서 카터 미국 대통령은 “새 교황의 목소리는 평화, 정의, 존엄한 삶을 이끌어 나갈 세계인의 희망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답니다. 그 목소리가 바로 “교회의 진정한 보물은 어린이와 가난한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과연 역대 교황들은 대부분 이탈리아의 귀족가문 출신입니다. 하지만 소작농의 아들이었던 요한 23세 교종에 이어 요한바오로 1세 교종은 벽돌공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분 모두 ‘우연 같은 필연처럼’ 베네치아의 교구장이었습니다. 요한 23세 교종이 그를 주교로 삼고, 바오로 6세 교종이 그를 베네치아 대주교로 뽑았습니다.

1978년 알비노 루치아니가 교종이 되었을 때, 역사상 처음으로 이중 이름인 ‘요한 바오로’를 선택한 것은 이색적이었습니다. 그는 요한 23세의 선함과 바오로 6세의 엄격함을 모방하고 싶다고 했지만, 사실 요한과 바오로 두 교종이 추진했던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정신을 계승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공의회가 선포한 교회는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고, 권위주의에서 벗어나 가난한 이들에게로 가는 교회입니다. 귀족과 권력을 연상시키는 교회에서 가난한 이들을 섬기는 교회로 가자는 것입니다.

이탈리아 사람들이 “하느님의 미소”(Il Sorriso di Dio)라는 애칭으로 불렀던 요한 바오로 1세는 1978년 9월 29일 새벽, 교황직에 오른 지 33일 만에 선종하셨지만, 그 짧은 시간에 교황직의 성격을 완전히 뒤바꿔 놓았습니다. 주교로 임명될 때 선택한 사목표어처럼 그이는 ‘겸손’(Humilitas)한 교종이었기 때문입니다. 교종은 자신의 연설을 담은 공식 문서에서 교황 스스로 ‘짐’(朕)이라고 부르던 관례를 깨고 ‘나’라고 지칭한 최초의 교황이었습니다. 교황 전용 가마인 세디아 게스타토리아의 사용을 거절하였고, 6시간 동안 진행되는 화려하고 장엄한 교황 대관식을 거부하고 간단한 양식의 교황즉위미사로 바꾸었습니다. 당연히 천상과 지상과 교회의 통치자를 뜻하는 삼중 교황관도 만들지 않았습니다. 액면 그대로 교황은 “종 가운데 종”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요한 바오로 1세 교종이 믿는 하느님은 죄를 낱낱이 밝혀 벌을 주는 재판관도 아니었고, 교리에 대한 엄격한 잣대로 이단을 구분하는 교사도 아니었습니다. 교종이 믿었던 하느님은 예수님이 ‘아빠’라고 친밀하게 불렀던 다정한 엄마 품 같은 분이었습니다. 그래서 요한 바오로 1세 교종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은 어머니이시면서 아버지이시다. 하지만, 하느님은 아버지이시기보다는 어머니이시다.” 그분은 통치자가 아니라, 요한 23세 교종처럼 ‘착한 목자’가 되기로 작심하신 분입니다.

 

요한 바오로 1세 교종
요한 바오로 1세 교종

요한 바오로 1세가 교회전통과 권위에 앞서 “가난한 이들이 교회의 보물”이라고 말했을 때, 우리는 258년에 로마에서 순교한 라우렌티우스 부제를 떠올리게 됩니다. 밀라노의 주교 성 암브로시우스는 <성직자의 의무>라는 책에서 라우렌티우스의 순교여정을 감동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라우렌티우스는 달구어진 석쇠 위에서도 평정심을 잃지 않고 “다 익었으니 뒤집어서 먹으시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박해자들이 교회의 보물을 요구했을 때 라우렌티우스는 “가난한 이들이 교회의 보물”이라 했습니다. “그들 안에 그리스도께서 계시고 그들 안에 믿음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실상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가난한 이들과 자신을 동일시 하셨고, 최후의 심판에서 잣대는 오직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리의 처신뿐이라고 전합니다. 배고픈 이에게 먹을 것을 주었는지, 목마른 이에게 마실 것을 주었는지 묻습니다. 가난한 이들 속에서 그리스도를 알아보고, 그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행동하는 자만이 하느님의 사람이 됩니다. 그래서 <교부들의 사회교리>(분도, 2020)를 지은 최원오 선생은 이렇게 덧붙입니다.

“돈이 지배하는 이 세상의 논리로는 가난한 이들은 무능하고 무익한 천덕꾸러기에 지나지 않겠지만, 참된 그리스도인은 가난한 이들이야말로 교회의 참된 보물임을 고백하며 그들을 주님으로 섬긴다. 가난한 이들에게 보물을 나누어 주는 데 그치지 않고 가난한 이들을 보물로 받아들이는 이 위대한 교부 전통은 ‘가난한 이들을 위한 가난한 교회’(Chiesa povera per I poveri)를 위해 투신하는 교종 프란치스코를 통해 오늘날까지 줄기차게 이어지고 있다.”

<강아지똥>과 <몽실언니>로 잘 알려진 아동문학가 권정생에게서 가난한 이들의 삶과 노동에 몰두하는 인생의 거룩함을 엿볼 수 있다는 것은 우리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주어진 축복입니다. 유랑걸식 하다가 교회 문간방에서 종지기로 살았던 권정생은 새벽마다 종을 치며 세상의 모든 목숨 가진 것들을 위해 간절한 기도를 올렸답니다. 권정생은 <우리들의 하느님>(녹색평론사, 1996)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가을이 한창 무르익고 있다. 우리 집 둘레엔 여름내 자라온 온갖 꽃들이 다투어 피고 있다. 지난번 태풍으로 미루나무는 단풍도 들기 전에 잎이 모두 떨어졌다. 나무 하나 풀 한 포기도 그들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 나름대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있다. 가끔 가다가 아이들이 묻는다.
“집사님, 밤에 혼자서 무섭지 않나요?”
그러면 나는 시치미를 뚝 떼고 대답한다.
“무섭지 않다. 혼자가 아니고 내가 가운데 누우면 오른쪽엔 하느님이 눕고 왼쪽엔 예수님이 누워서 꼭 붙어서 잔단다.”
아이들은 눈이 땡그랗게 되어 다시 묻는다.
“진짜예요?”
“그럼 진짜지.”
“그럼 자고 나서 하느님하고 예수님은 어디로 가요?”
“하느님은 콩 팔러 가시고, 예수님은 산으로 들로 다녀오신단다.”

이처럼 하느님은, 또한 그분의 아드님은 흙집에서 자고, 농부처럼 똥짐을 지고 밭으로 가시고, 오일장에 쪼그리고 앉아서 고구마 줄기를 벗기고 호박이며 나물을 팔고 있습니다. 그분과 더불어 자고, 그분과 더불어 아침햇살을 맞이하는 영혼은 아름답습니다. 그 사람에게선 그분의 향기가 묻어납니다. 정말 가난해지기까지 교회는 그리스도에게 닿을 수 없을 텐데, 그게 아쉬울 따름입니다. 

 

* 이 글은 종이신문 <가톨릭일꾼> 2021년 가을호에 실린 것입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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