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하는 사람은 깨물기보다는 입을 맞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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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는 사람은 깨물기보다는 입을 맞추고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1.09.11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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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의 [성경이 삶에게 말을 걸다: 기도]

사소한 일상조차 기도 안에서 봉헌하고 싶은 때가 있습니다. 저는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문득 떠오르는 사람이 있을 때, 잠시 그 사람 얼굴을 떠올리며 화살기도를 바치는 것이 고작입니다. 제발 행복하라고, 제발 마음 걱정 덜 하고 사시라고, 제발 좀 이기적이란 소리 듣더라도 남 좋은 일만 하지 말라고요. 선한 영혼들이 아프게 사는 세상입니다. 직업처럼 기도하지 말고, 오랜만에 먹는 맛난 외식처럼 기도를 삼키면 좋을 듯합니다. 나를 다그치는 기도가 아니라 나를 위로하는 기도였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도 부담 없이 제 기도 안에 머무시길 기대해 봅니다.

 

사진=한상봉
사진=한상봉

우리를 매 맞아 죽지 않게

기도를 하는 이들은 무언가 바라는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절망적인 현실 앞에서 희망을 잃지 않으려는 사람의 안간힘입니다. 자잘한 욕망과 끈적한 탐욕이 담겨있는 기도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이 아빠라고 불렀던 하느님께서 ‘그래, 그래’ 하며 들어주실 기도는 그런 기도가 아니겠지요. 그분께서 바라는 기도는 김훈이 <흑산>에서 오동희의 입을 빌어 ‘언문’(한글)으로 써내려간 그런 기도일 겁니다.

조선후기 봉건사회의 질곡 속에서 천주교에 귀의한 늙은 소작농의 아내가 오동희입니다. 그이는 동네 과부와 소박데기 몇 명을 모아놓고 천주교 경문을 외우고 십자가에 향을 피우다가 발각되어 달아났습니다. 겨우 살아남아 하찮은 언문으로 낡은 창호지에 기도문을 지었는데, 그 기도문은 금강을 건너서 충청과 경기까지 퍼져나갔습니다.

“주여, 우리를 매 맞아 죽지 않게 하소서.
주여, 우리를 굶어죽지 않게 하소서.
주여, 우리 어미 아비 자식이 한데 모여 살게 하소서.
주여, 겁 많은 우리를 주님의 나라로 부르지 마시고
우리들의 마음에 주님의 나라를 세우소서.
주여, 주를 배반한 자들을 모두 부르시고
거두시어 당신의 품에 안으소서.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오동희의 기도는 배교와 순교의 경계를 헐어 겁 많은 이들조차 품어 안아달라고 주님을 부르고 있습니다. 그이가 바라는 나라는 매 맞아 죽지 않고 굶어죽지 않는 나라입니다. 그저 어미 아비 자식이 한데 모여 살 수 있는 나라입니다. 그런 나라를 꿈꾸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는 세상에서 목숨을 잃었던 이들이 남긴 기도입니다. 예수님도 이들처럼 절박한 기도 안에 사셨습니다.

 

고갱. 겟세마니 동산의 그리스도
고갱. 겟세마니 동산의 그리스도

겟세마니 동산에서 예수님은 어떤 기도를 하셨을까, 이따금 생각해 봅니다. 마르코 복음에서는 “그분께서는 공포와 번민에 휩싸이기 시작하셨다.”(14,33)고 전합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내 마음이 너무 괴로워 죽을 지경”(14,34)이라 했답니다. 땅에 엎드려 그분이 하신 기도는 이렇습니다. “아빠!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시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제가 원하는 것을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십시오.”

예수님의 기도에는 감상이 끼어들 여지가 없습니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루카 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서 고뇌에 싸여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핏방울처럼 되어 땅에 떨어졌다.”(22,44)고 전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께 희망을 걸고 있었고, 적어도 그분만은 내편이라고 믿었지만, 다가올 고난과 죽음을 피해갈 방법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빈민으로 살고, 노예처럼 죽었습니다.

도대체 예수님은 마지막 순간에 왜 이런 참혹한 기도를 올려야 했을까요? 그분이 하느님 나라를 갈망했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바라던 나라는 <흑산>의 오동희가 바라던 나라였습니다. 그 나라는 예수님이 지었다는 ‘주님의 기도’에 잘 나와 있습니다.

“하늘에 계신 저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저희를 악에서 구하소서.”(마태 6,9-13)

예수님은 오로지 ‘아버지의 나라’가 오기만을 희망합니다. 그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지는 게 아버지의 뜻이고, 그게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드러내는 일이라 합니다. 그 나라는 더 이상 굶주리는 사람이 없고, 부채 때문에 노예가 되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유혹에 빠지지 않고 그 나라로 가는 길에서 비껴나지 않도록 도움을 청합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이들과 세리와 창녀가 그 나라에 먼저 들어갈 것이라 합니다. 어쩌면 유다 같은 이들도 그 나라에서 제외되지 않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자비하시고, 아버지의 집은 방이 많기 때문입니다.

지금 충분히 살만한 사람들은 그 나라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 나라에 들어가고 싶은 생각도 없고, 다른 이들이 그 나라에 들어가는 것도 달갑지 않습니다. 그 나라가 그들 기득권 세력을 반대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나라를 원하셨기 때문에, 세상의 미움을 받아 고난 받고 죽임을 당해야 했습니다. 도대체 그 나라가 구체적으로 어떤 나라였을까, 궁금합니다.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이 모태에서 그 이야기를 들었다고 기록합니다.

수태고지를 받은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찾아갔을 때, 마리아는 엘리사벳에게서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5)이라는 찬사를 듣습니다. 이때 부른 마리아의 노래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기대와 기쁨으로 충만합니다. 주님께서 비천한 노예들의 처지를 돌보아 큰일을 하시기에 “그분의 이름은 거룩”(1,51)하다 전합니다. 그분의 이름이 거룩하시니, 그분이 하시는 일마다 놀랍습니다.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루카 1,51-53)

그러므로 예수님은 죽임을 당하겠지만, 아버지가 맡기신 큰일을 하였기에, 그분의 은총으로 부활할 것입니다. 기도란 이 희망 안에 머무는 일입니다. 그러니 간절한 것이고, 그러니 하느님 현존 안에 머무는 시간이 기도를 이끌어갑니다. 이처럼 기도는 자기 욕망을 투사하는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응답하려는 안간힘입니다. 세간에 하느님의 계시를 받아 대통령 후보로 나섰다고 떠드는 이가 있습니다. 허나, 가난한 영혼들의 열망과 이 사람들에 대한 연민이 담겨 있지 않은 계시는 하늘에서 온 것이 아닙니다. 음습한 지옥에서 올라온 탐욕을 공정과 정의, 애국으로 포장할 줄 아는 자는 사탄입니다. 악마도 성경을 읽는다고 하니까요.

마태오 복음에서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께서 광야로 나아갔을 때, 악마는 예수님을 데리고 거룩한 도성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세운 다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밑으로 몸을 던져 보시오.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소? ‘그분께서는 너를 위해 당신 천사들에게 명령하시리라.’ ‘행여 네 발이 돌에 차일세라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쳐 주리라.’”(4,5-6) 여기서 악마는 시편 91장 11-12절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욕망을 종교로 포장하는 자처럼 위험한 사람은 없습니다. 최재형에 비하면 윤석열은 오히려 순진한 사람입니다. 제 욕망을 신비화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만 어리석을 따름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깨물기보다는 입을 맞추고

기도가 습관이 되지 못한 사람이 감히 기도서를 두 권이나 썼습니다. <가족을 위한 축복의 기도>(2004)와 <생활 속에서 드리는 나의 기도>(2007)입니다. 처음 기도서 집필 요청을 받았을 때, 당혹해 하는 평소 존경하던 분이 제게 “평소 안 하던 기도를 한꺼번에 하라는 모양이다”라고 하셔서 용기를 낸 것이지요. 저는 평생 이 기도서를 쓸 때만큼 기도를 절실히 한 적이 없습니다. 쓰면서 하는 기도라니요. 토머스 머튼은 글쓰기가 기도생활에 도움이 된다고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글을 쓰기 위해 앉으면 내 안에 있는 거울이 놀라울 정도로 깨끗하고 깊고 고요해서 애쓰지 않아도 거기 비친 하느님을 즉시 만날 수 있다. 하느님은 내가 글을 쓰는 동안 마치 그 오심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내게 가까이 다가오시는 것만 같다. 이것이 큰 기쁨의 이유가 아닌가 싶다. 적어도 내게는 그러하다."(토머스 머튼의 영적 일기 <요나의 표징>, 1949년 7월 21일에서)

“나의 모든 말들이 나를 부끄럽게 할 뿐”이라고 했던 머튼에게도 글쓰기는 자기성찰의 과정이었으며, 하느님 앞에 투명한 걸음으로 나아가는 수행이었던 모양입니다. 제 생각에 하느님은 말 많은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을 듯싶습니다. 영성생활에서 침묵을 강조하는 이유도 거기에 있을 겁니다. 그분과 친밀해지려면 먼저 입을 닫을 줄 알아야 합니다. 기도문을 써야 한다면, 글쎄요, 주의 깊은 단어 선택이 필요합니다. 꼭 필요한 말을 적절하게 배열하고, 짧지만 또렷한 어조로 말해야 합니다. 그러니, 제게도 글을 쓸 때만 경건해지고, 하느님 그늘 아래 머무는 느낌을 받는 것이겠지요.

그분 앞에서 허튼 소리를 늘어놓을 수는 없습니다. 적어도 글을 쓰는 시간에라도 성인이 될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그분 안에서라면 길을 잃어도 두려움이 없겠기 때문입니다. 토머스 머튼은 <고독 속의 명상>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나의 주 하느님,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길이 보이질 않습니다. 그 길이 어디에서 끝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나는 정말 나 자신에 대해서도 알지 못합니다. 내가 주님의 뜻에 따른다고 생각하는 것이 곧 내가 실제로 그렇게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려는 나의 열망만은 기쁘게 받아주시리라 믿습니다. 내가 행하는 모든 일들 속에서 그런 소망을 품게 해주십시오. 그런 열망과 무관한 일은 행하지 않도록 이끌어주십시오. 그렇게만 산다면 비록 내가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할지라도 주님은 나를 바른 길로 인도하실 것임을 압니다. 비록 길을 잃은 것처럼 보여도, 죽음의 그늘 속에서도 나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주님을 신뢰하겠습니다. 주님이 함께 계시기에 나는 두렵지 않습니다. 또한 주님은 위험 앞에 홀로 서도록 나를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나를 내려놓고 기도하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분만이 온통 나를 차지하시도록 내버려두고 기도하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지만 오직 사랑뿐이신 그분을 신뢰한다면 가능한 일이기도 합니다. 가짜 교회와 성직자, 거짓 그리스도인들이 너무 많아서 ‘신앙’이라는 말이 오염된 탓에, 그저 ‘신뢰’라는 말이 적절할 수 있겠습니다. “난 너를 믿어!” 할 때의 든든한 신뢰 말입니다.

이처럼 기도하는 사람은 하느님께 신뢰를 두고 사랑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부서진 영혼을 염려하고, 더러워진 세상을 끌어안는 사람입니다. 소작농의 아내 오동희가 지은 기도문을 창호지에 옮겨적고, 이 종이가 구겨지고 얼룩지고 닮아 없어질 때까지 속으로 외는 사람들이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토머스 머튼을 바라보면서, 헨리 나웬은 기도하는 사람이란 세상의 연약한 것들을 모두 받아들인다고 했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깨물기보다는 입을 맞추고, 시험하기보다는 경탄한다. 기도에 맛들인 사람에게 자연은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장애물이 아니라 길이 된다. 뚫을 수 없는 방패가 아니라 알려지지 않은 지평을 넌지시 보여주는 베일이 된다.”(헨리 나웬, <기도의 사람 토머스 머튼>, 청림출판, 2008)

가만히 눈을 감기만 해도

예전에 어느 소설에서 이런 구절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너는 음지에서 자라는 꽃과 같다.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와 네 씨앗을 햇빛 속으로 나를 것이다. 너는 그 햇빛 속에서 다시 아름답게 살게 될 것이다.”

가련한 우리에게도 그런 잔잔한 희망을 품게 하는 기도의 순간이 오기를 바랍니다. 벌써 이십 년도 지난 이야기지만, 무주 산골에서 농사지으며 살 때입니다. 그때 얻은 딸아이를 키우면서 저희 부부는 아이에게 ‘미쉘’(미카엘)이란 세례명을 지어주었습니다. 처음 생명을 받아들고 수호천사들의 공덕에 기대어보자는 것입니다.

이 시절 아이를 등에 업어 재울 때마다 미카엘 대천사와 그분의 동료 가브리엘, 라파엘 대천사에게 더불어 이 아이를 키워주십사 청했습니다.

“평화의 사자이신 성 미카엘을 주께서 우리집에 보내주시면 친밀히 우리에게 오실 때마다 우리의 마음행복 커져 가리다. 하늘의 용사이신 성 가브리엘이여, 우리집 자주 찾아 방문하시며 결이(미쉘)를 인자로이 도와주소서. 하늘의 의사이신 라파엘 천사, 하늘서 우리에게 내려오시어 갖가지 질병일랑 고쳐주시고 우리의 생활지도 맡아주소서.”

그러는 동안 아이는 곱게 새근거리며 잠들고, 우리의 마음도 편안해지는 걸 느꼈습니다. 하느님과 더불어, 수호천사와 더불어 가족의 안녕을 빌며 생애를 걸어간다는 것은 참 흐뭇하고 마음 든든한 일이었습니다. 이런 기도하는 마음이 가족에서 모든 피조물에게로 확장될 수 있다면, 그 길에서 문득 하느님 나라를 비전을 발견할 수 있겠다, 싶습니다.

그 시절부터 즐겨듣던 라디오 방송이 있습니다. 저녁 6시마다 시작되는 <세상의 모든 음악>입니다. 얼마 전에는 여기서 아주 좋은 시가 흘러나오기에 적어두고 인터넷에서 찾아보았습니다. 고개 들어 하늘을 우러르며 숨을 천천히 들이마시기만 해도 기도라 하던 이문재 시인의 <오래된 기도>입니다.  

가만히 눈을 감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싸기만 해도
맞잡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기만 해도
말없이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기만 해도
노을이 질 때 걸음을 멈추기만 해도
꽃 진 자리에서 지난 봄날을 떠올리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음식을 오래 씹기만 해도
촛불 한 자루 밝혀놓기만 해도
솔숲 지나는 바람소리에 귀 기울이기만 해도
갓난아기와 눈을 맞추기만 해도
자동차를 타지 않고 걷기만 해도

섬과 섬 사이를 두 눈으로 이어주기만 해도
그믐달의 어두운 부분을 바라보기만 해도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다
바다에 다 와가는 저문 강의 발원지를 상상하기만 해도
별똥별의 앞쪽을 조금 더 주시하기만 해도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만 해도
나의 죽음은 언제나 나의 삶과 동행하고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인정하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고개 들어 하늘을 우러르며
숨을 천천히 들이마시기만 해도

 

*이 글은 <가톨릭평론> 2021년 가을호에 실렸습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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