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마 말할 수 없는 아픈 사연이 있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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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마 말할 수 없는 아픈 사연이 있나봅니다
  • 서영남
  • 승인 2021.08.28 22: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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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남의 민들레국수집 일기
사진=서영남
사진=서영남

삼복더위에 털 달린 파카를 입고 온 청년이 있습니다. 무슨 사연이 있을까? 한여름인데도 불구하고 겨울옷을 걸치고 오는 손님이 간혹 있습니다. 감옥에 있다가 새벽에 출소한 사람인 경우입니다. 혹시 출소한 것인지 물어봤습니다. 아니라고 합니다. 밤에 추워서 가지고 다닌다고 합니다. 주안 역 근처에서 노숙을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도시락꾸러미를 나눠주면서 며칠을 주의 깊게 봤습니다. 섣부르게 도와주겠다고 이야기를 하면 대다수가 말을 붙일 틈조차 주지 않고 떠나버리기 때문입니다. 우리 손님들은 친절하게 다가오는 사람이 제일 무섭다고 합니다. 처음 노숙할 때, 배가 너무 고프고 살 길이 막막할 때 천사같이 친절하게 다가온 사람에게 죽을 뻔했기 때문입니다. 가진 것 하나 없는 노숙하는 사람을 돈줄로 보는 나쁜 사람이 있습니다. 

오래 전에 어떤 손님이 있었습니다. 기초생활수급자가 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행정복지센터에 가서 사회복지사를 만났습니다. 얼마 후에 이 손님은 수급자가 될 수 없다고 합니다. 손님이 큰 트럭을 소유한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제야 어떤 손님은 이야기 합니다. 몇 년 전에 처음 노숙을 하게 되었을 때라고 합니다. 어떤 신사가 밥도 사주고 술도 사주면서 취직을 시켜주겠다고 했습니다. 인감증명을 떼어주었고 용돈도 조금 받았다고 합니다. 그걸로 끝이었답니다.    

털 파카를 걸치고 다니는 청년에게 며칠 만에야 말을 걸었습니다. 도시락을 먹은 다음에 오후 세 시쯤 오면 민들레희망센터에서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배낭도 마련해주겠다고 했습니다. 그제야 나이는 45세이고, 부산에서 6년 전에 인천에 와서 쿠팡에서 일용직으로 일했다고 합니다. 찜질방에서 자곤 했는데 코로나 때문에 찜질방과 피씨 방에서 잘 수가 없게 되어서 노숙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4단계 거리두기가 되면서 찜질방은 밤 9시 전에 나와야 한답니다. 피씨방도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그날 오후 세 시가 삼십 분 쯤 지나서 청년이 나타났습니다. 준비해 둔 여름옷과 배낭을 전해주었습니다. 다음 날 옷을 갈아입고 배낭을 메고 도시락을 받으러 왔습니다. 도시락을 주고 잠깐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부산에서 살았고, 초등학교 다닐 때 엄마가 집을 떠났고, 아버지는 중학생 때 암으로 돌아가시고, 공익근무를 했고, 조선소에서 일했는데 몇 년 전에 다니던 회사가 폐업하면서 인천으로 왔다고 합니다. 인천에서는 쿠팡에서 일용직으로 일하면서 지금껏 지냈다고 합니다. 다시 오후 세 시쯤에 와서 샤워하고 속옷과 양말 그리고 신발도 갈아신고 이발을 하자 했습니다. 미장원에 가려면 노숙한 냄새를 지워야 한다고 설득했습니다. 배낭에 속옷과 양말 그리고 세면도구를 챙겨주었습니다. 미장원에서 머리 손질을 했습니다.

다음 날입니다. 도시락을 나눠주면서 또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신용상태는 어떤지 물어봤습니다. 다행스럽게도 빚이 없다고 합니다. 핸드폰은 선불 폰이라고 하면서 전화번호도 알려줍니다. 정부에서 주는 재난지원금을 받으려면 주민등록을 살려야 하니까 주소이전을 하자고 했습니다. 괜찮다고 합니다. 주민등록증을 잃어버려서 새로 발급받아야 하는데 증명사진 찍을 돈이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주민등록이 말소되어서 과태료도 있을 것이라고 해서 대신 내어주기로 했습니다. 일자리가 구해질 때까지 함께 지내기로 했습니다.

민들레국수집 근처에 단칸방을 하나 얻어서 지낼 수 있게 했습니다. 다행히 집주인 할머니도 참한 청년이라고 좋아했습니다. 간단한 살림살이 그리고 옷가지와 세면도구를 마련해 주고, 선풍기도 하나 마련했습니다. 주민등록을 살리기 위해 증명사진 찍을 비용을 주었습니다. 내일 아침 먹으러 민들레국수집에 오라고 했습니다.

다음날 아침 무렵에 말도 없이 사라져버렸습니다.
선불 전화는 착신금지가 되어 있습니다.
아마 차마 말할 수 없는 아픈 사연이 있나봅니다.

 

서영남 베드로
민들레국수집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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