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 영역과 공동의 영역에서 도로시 데이가 느꼈던 불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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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적 영역과 공동의 영역에서 도로시 데이가 느꼈던 불안은?
  • 로버트 콜스
  • 승인 2021.08.28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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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콜스의 [DOROTHY DAY, A RADICAL DEVOTION]

도로시 데이는 불안감에 대해 계속 토론하였다. 그는 나에게 실제로 그가 탈출을 시도했다고 말한다 ­ 그는 여행을 많이 했으며, 늘 버스를 탔고, 강의들을 하거나 참석했으며 시위나 항의에 참가하였다. 그는 환대의 집들 사이에 연계망이 있었고 각각의 환대의 집은 고유한 “색깔”이나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으며, 저마다 가톨릭일꾼운동 사상의 특정한 측면을 강조하였다고 말한다.

예를 들면 그는 나에게 도시주변과 농촌에 환대의 집들이 있다고 알려주었으며, 무료급식과 농장들, 대부분 백인들과 일하는 환대의 집들도 있고 흑인이나 스페인어를 쓰는 사람들의 환대의 집도 있었다(휴스톤의 <가톨릭일꾼> 신문은 영어와 스페인어로 발간된다). 그는 어느 겨울에 스테이튼 이일랜드로 “피정”을 갔다. 그곳에는 가톨릭일꾼이 소유하고 있는 한 두개의 오막살이집이 있었는데, 바다 가까이 있는 쉼터였다.

재산의 문제, 사적인 영역의 문제 이 두 가지 문제들은 가톨릭일꾼공동체에서 그가 사는 동안 내내 그를 괴롭혔던 문제였다. 또한 환대의 집에서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주제였다. 도로시 데이에게는 자신의 방이 있었지만, 그런 방을 가질 수 없었던 수백만의 사람들 역시 기억하였다. 하지만, 그는 개인적인 요구가 있을 때 그것을 얻기 위하여 곧장 재빨리 표현하였는데, 왜냐하면 그에게는 그러한 개인적인 필요가 공동체 개념과 양립할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공동체란 ‘사막의 교부들’이 자신들을 시험하는 것 같은 그런 자리가 아닙니다. 즉 자신에 대해 더 많이 엄격하고 더 많이 내놓는 시험을 하는 곳이 아닙니다. 공동체는 바오로 사도가 우리에게 말한 것처럼 ­ 서로 우리의 차이점들을 존중하지만, 그 차이점들이 우리를 서로 고립되지 않도록 하는 곳입니다.

당신은 당신자신의 조용한 고독의 순간을 찾아야 합니다. 그러나 또한 당신은 언제 다른 이들과 어울리기 위하여 문을 언제 열어야 하는지 알아야 하며 문을 어떻게 여는지도 알아야 합니다.

마음 속에 회한과 후회를 갖고 문을 여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나는 우리 집에 오는 알콜 중독자들, 건달 같은 이들, 뜨내기들과 소위 밥만 축내는 사람들이 우리의 얼굴 표정을 읽는 방법을 알고 있으며 우리 영혼의 진실을 재빨리 파악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두렵게도 그들은 우리가 서로를 아는 것보다 더 우리를 잘 파악합니다. 우리는 서로 ‘덮어주려고’하며 보호해주려고 합니다 ­ 아, 아마도 우리는 자신의 개인 방에서 거울을 응시하며 우리 삶에서 움직이고 있는 우리 자신의 죄를 보고 싶어하지 않는 것처럼 서로에게서 그런 죄를 보고 싶지 않은 지도 모릅니다.

어느 날 나는 공동체 안에서 모든 사람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은 바로 점심 때 오는 우리 손님들에게도 마찬가지로, 그들과 떨어져 있지 않으려고 싸우는 것보다(이런 행동은 아마 내가 꽤 성공적으로 했을 것입니다), 떨어져 있으려고 노력하는 것임을 깨달았던 때를 기억합니다.

어떤 때는 관대함이 그 사람의 자만심을 표현할 때가 있습니다. 내가 없으면 ‘그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들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내 에너지 없이 어떻게 할 것인가? 하고 오만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피터 모린, 사랑스러운 피터는 그런 물음들이 그를 삼키도록 결코 내버려둔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내가 만났던 그 어떤 사람들보다도 자아가 적었습니다. 그는 연설을 했습니다. 가서 말로 그의 청중을 사로 잡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 당신은 그가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시는 자기중심주의자라고 생각하고 싶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를 알게 되고 그가 일하는 것을 지켜보면, 쓰여진 말이건, 하는 말이건간에 그가 자기자신을 위하여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말은 만일 우리가 사랑으로 가득찼다면 사랑이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처럼, 신뢰와 사랑이 자연스럽게 솟아 나오는 것처럼, 그렇게 그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는 주고 있었습니다. 말들을 주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말을 듣는 청중과 독자로부터 마치 그들이 그에게 빚졌다는 것처럼 그들에게서 되갚음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피터, 당신은 정말 훌륭합니다.”

도로시 데이는 음울하고 비체계적인 자신의 심리에 대하여 사과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피터가 지닌 성격적인 약점, 어떤 흐릿함 같은 측면, 다른 이들에게 짐을 지우며 허둥지둥하는 태도에 대해서 말했다. 도로시 데이는 자신이 수년동안 어느 정도 이기심을 줄이기 위하여 열심히 투쟁했다고 말하면서 그 투쟁 자체가 모순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때까지 그렇게 기를 썼다고 기억했다. 마침내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자신이 지니고 있는 단정하고 고귀한 측면에 진실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고, 한편 또 다른 약한 측면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한 측면에 대해 다른 측면이 지니고 있는 에너지와 자원을 갖고 싸우는 것은 “잘못된 이유로 잘못된 전쟁을” 수행하는 것과 같았다고 그는 말했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결론을 확실하게 정리하였다:

“자만심과 싸우는 것은 자만심이 있다는 사실에 승복하는 것이다. 나는 이런 격언을 포스터 배터햄에게서 늘 듣곤 했는데, 그는 내가 허영심에 대해 늘 말하는 것을 듣고 피곤해 했으며, 어거스틴의 말을 인용하는 것에도 많이 지쳤습니다. 한번은 만일 제가 그저 편안해 하고,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이 되려고 노력한다면 나를 괴롭히고 있는 그 자만심의 영향을 덜 받을 것이라고 포스터가 말해준 적이 있었습니다. 그건 꽤 복잡한 심리학이었는데, 그는 심리학에 관심이 전혀 없었고 다만 내적으로 침묵 중에 성찰한 결과로 말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의 충고를 기억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리고 때때로 그의 충고가 나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도로시 데이는 작가였고 따라서 믿음과 사랑 그리고 애덕이라는 단어들을 쓰는 것에 대해서도 걱정하였다. 만일 어떤 작가가 도덕적이며 영적인 갈망을 올바르게 표현하려고 할 때 그 용어가 얼마나 공허하고 평범해 질 수 있는지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가 자신을 도덕적, 영적 갈망을 표현하는 동맹자로 여기며 성서에 대해 자주 설교를 한 것도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놀랄 일이 아니다.

 

1970년대 초기에 요셉의 집에서 지내는 삶을 설명할 때 그는 수 차례 바오로 사도의 필리피서 2장을 나에게 인용하곤 하였다. 나는 1950년대에도 그가 이 부분을 읽어주었던 것을 기억한다. 이 구절을 읽을 때 그는 마치 자신한테 읽혀주고 상기시키며, 무척 중요한 교훈을 자신에게 가르치는 것처럼 격앙되고 긴급한 어조로 읽어내려 갔다. 이 구절은 그의 삶을 갈라지지 않게 지탱해준 절대적인 명령 같았다.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힘을 얻습니까?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위안을 받습니까? 성령의 감화로 서로 사귀는 일이 있습니까? 서로 애정을 나누며 동정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같은 생각을 가지고 같은 사랑을 나누며 마음을 합쳐서 하나가 되십시오, 그렇게 해서 나의 기쁨을 완전하게 해주십시오. 무슨 일에나 이기적인 야심이나 허영을 버리고 다만 겸손한 마음으로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십시오, 저마다 제 실속만 차리지 말고 남의 이익도 돌보십시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지니셨던 마음을 여러분의 마음으로 간직하십시오. 그리스도 예수는 하느님과 본질이 같은 분이셨지만 굳이 하느님과 동등한 존재가 되려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의 것을 다 내어놓고 종의 신분을 취하셔서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 되셨습니다(필립 2,1­7).

그리고 그는 다음구절로 건너뛰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내가 함께 있을 때에도 언제나 순종하였거니와 그 때 뿐만 아니라 떨어져 있는 지금에 와서는 더욱 순종하여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여러분 자신의 구원을 위해서 힘쓰십시오. 여러분 안에 계셔서 여러분에게 당신의 뜻에 맞는 일을 하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켜 주시고 그 일을 할 힘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필립 2,12-­13).

그는 이 메시지를 마음속에 새기고 그것을 따르려고 계속 노력하였다. 그는 성서의 이 부분에 계속 표지를 넣어두었고 자주 필리피서에서 이 부분을 따로 골라내었다. 그는 자신이 “성급함의 저주”를 받고 있다고 매우 강력하게 확신하였다. 그는 자신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젊었을 때부터 그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그의 인내, 그의 엄격한 끈기, 그들을 극단적으로 화나게 하는 것들에 대해 그가 엄청나게 인내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지적하는 것이 모순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생각에, 자신의 기억 속에서 그는 여전히 잘 다스려지지 않는 사람이었고 다른 사람들과 편안하게 지내고 느끼며 열려 있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었을 뿐이었다. 그는 또한 자신이 소유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말한 적도 있고 또한 말년에도 그는 자신이 “소유한” 책들에 대해 말했는데, 빌려주기 싫어했고 감추어 놓기도 했으며, 다른 사람들이 허락없이 빌려 가는 것을 매우 꺼려했다고 했다. 바오로 사도가 말한 것처럼 복종하려고 애쓰고 경쟁심과 투쟁하는 것은 그의 몫이었으며, 공동생활의 한 부분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 역시 자신의 몫이었음을 그는 잘 알았다.

 

[원출처] , Robert Coles, 1987
[번역문 출처] <도로시 데이, 뿌리로부터 온전히 살다>(<참사람되어>2002, 7월호)

로버트 콜스(Robert Coles)

하버드 의과대학의 정신의학과 및 사회윤리학과 명예교수. 청소년 문제 상담 전문가로 활동해 왔으며, 50여 권이 넘는 책을 집필한 작가. 1973년 미국의 다양한 계층과 인종의 아이들을 직접 취재하고 분석한 <위기의 아이들>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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