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 권력을 포기할 줄 아는 용기, 교회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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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는 권력을 포기할 줄 아는 용기, 교회도 필요하다
  • 한상봉
  • 승인 2016.07.27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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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하는 사랑>, 리북, 한상봉 지음-14
요한 바오로 2세 교종 성인은 회칙 <노동하는 인간>에서 보듯이, 자본에 대한 노동의 우위성과 노동자에 대한 깊은 연대성 차원에서 공적을 남겼으며, 특볗히 가난한 이들과 가톨릭교회를 사랑했다. 그러나 교회 안의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이러한 태도가 라틴아메리카 교회의 해방신학에 대한 애매한 태도를 낳았다.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은 옳지만, 기초교회공동체처럼 가난한 이들 가운데서 이 자발적으로 성장하는 민주적 교회를 혐오하였다.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의 회의 기록에 따르면, 훗날 교종 요한 바오로 2세가 된 카롤 보이티야(Wojtyla) 대주교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교회를 ‘하느님의 백성’으로 정의하는 데 반대했다. 그가 마음속에 그린 것은 백성의 교회라기보다는 평신도가 사제와 주교의 지도로 신앙 안에서 삶의 진리를 찾기 위해 활동하는 위계적인 ‘완전한 사회’였다.

그는 진실한 가톨릭 신자들이 개인의 구원을 추구함으로써 굶주림과 폭력, 그 밖의 사회적·정치적 불의에서 ‘진정한 인간 해방’을 달성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는 폴란드의 특수한 사정을 반영하는 교회 모델이다.

폴란드, 민족주의, 요한 바오로 2세

그는 폴란드인들이 러시아인들을 바르샤바에서 몰아낸 해(1920년)에 태어났으나, 1939년에 히틀러는 폴란드를 침공하였다. 약 600만 명의 폴란드인이 전쟁 중에 죽음을 당했으며, 250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독일로 끌려가 강제 노동에 시달렸다. 전쟁이 끝나자 폴란드는 파시즘 지배에서 다시 공산주의 지배를 받아야만 했다.

이 수난 속에서도 폴란드 민중은 신앙을 잃지 않았다. 전쟁으로 파괴되었던 수백 개의 성당을 다시 지었으며, 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3천 명의 사제들을 대신하려고 새로운 지원자들이 나타났다. 그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보이티야였다. 폴란드에서는 오직 교회만이 이민족의 박해를 견디어 내고 민족주의를 수호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래서 폴란드에서 민족주의와 가톨릭은 같은 뜻으로 통한다.

보이티야는 이 힘을 위로부터의 지배가 이루어지는 절대 군주제로 교회가 운영되는 데서 찾았다. 폴란드 교계 제도는 신자들에게 충성을 요구했고 또 그러한 충성을 받았다. 이는 교회 밖의 독재에 대항하여 교회 안의 민주화를 추진한 라틴아메리카의 교회와 다른 경험이었다. 따라서 요한 바오로 2세 교종은 교권적 교회를 해체시킬 위험이 있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민주적 조치에 대하여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무질서와 분열 없이는 개혁도 없다

요한 바오로 2세 교종은 해외 방문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더욱 굳혀 갔다. 요한 바오로는 엄청나게 많은 군중에게 둘러싸였고, 이를 자신의 생각이 옳음을 입증해 주는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교종은 기본적으로 교회가 자유, 평등 같은 현대적 가치를 받아들여 민주화되는 것을 두려워하였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말대로 “정직한 무지가 경솔한 지식보다 낫다.”는 것이다.

교회는 세속에 오염되지 않는 성별(聖別)된 집단으로서, 사제와 수도자는 유니폼을 착용하고, 품위 있게 행동하며, 평신도와 구별되는 거룩한 신분이라는 자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여겼다. 사제 독신주의, 낙태 금지, 이혼 불가, 출판물 검열이 강화되었고, 평신도들의 강론 및 성체 분배가 금지되었으며, 여성사제 서품은 어림도 없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지역 교회의 자치보다는 로마 중심주의가 강조되었다.

이 때문에 유럽에서 가장 자유주의적인 네덜란드 교회가 제일 먼저 로마에 의해 수치를 당했다. 네덜란드 교회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결의 사항을 실질적으로 실천에 옮겼다. 평신도, 특히 여성들이 성찬식 준비를 도왔고, 교리와 성경을 가르쳤다. 평신도들은 미사 때 성경을 봉독했으며 성체 분배를 도왔다. 신부와 수녀들은 주교들에게 권고를 할 수 있는 민주적 협의회를 조직했으며, 대부분의 주교들은 공동의 사목 계획을 따랐다. 네덜란드 교회는 미국 미사일의 유럽 배치와 제3세계 독재자들에 대한 반대를 주도하는 등 정의와 평화 문제에 매우 적극적으로 응답했다.

교회가 비록 산만하고 때로는 무정부적이라고 느껴지기도 했지만, 네덜란드처럼 대단히 세속화된 사회에서는 상당한 성공을 거두어서 개신교를 능가하는 최대의 교회가 되었다. 그러나 교종은 이러한 성공을 세속적 유혹으로만 여겼을 것이다.

교종은 1980년 네덜란드 주교들의 특별 시노드를 로마에서 소집하였다. 그 장소는 전에 교황청의 목 잘린 상들을 놓아두던 ‘목 잘린 두상(頭像)들의 방’이었다. 시노드에 포진한 교황청 학자들에 대항하여 네덜란드 주교들은 용감히 싸웠지만 결국 두 주 만에 패배를 인정했다. 주교들은 시스티나 경당 제단 앞에서 46개의 조항에 서명을 강요당했다. 여태껏 추진해 왔던 모든 조치를 원점으로 되돌리고, 교황청이 성찬식과 사목 계획에 관여하고, 로마의 지도권을 인정한다는 내용이었다.

그 후 바티칸은 교황청에 순응하는 새로운 주교들을 임명하여, 네덜란드 추기경 빌러브란트와 한마디 상의도 없이 네덜란드 교회의 고위직에 앉혔다. 따라서 요한 바오로 2세 교종이 1985년 네덜란드를 방문하였을 때, 그는 격렬한 반대 시위에 부딪쳤다. 경찰은 군중을 해산하기 위해 발포해야만 했다. 일부 시위자는 충돌 과정에서 부상당했다. 적의에 가득 찬 벽보가 도처에 붙었다. “요한 바오로는 물러가라. 당신은 예수를 매질하고 있다.” 교황은 이 사태를 지켜보면서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얼마나 많은 ‘무질서와 분열’을 낳았는지 다시 확인했다.

에르네스토 카르데날 신부는 토마스 머튼의 영향을 받아 관상가이며, 혁명가이며 시인이 되었다. 그의 작품은 <침묵 위에 떠오르는 소리>에 잘 나타나 있으며, 솔렌티나메 공동체에서 가난한 농부들과 복음적 대회를 나누면서 복음서가 어떻게 혁명의 교과서가 될 수 있는지 잘 보여주었다. 이 내용은 <말씀이 우리와 함께>(분도출판사)에서 찾아 읽을 수 있다.

교종의 평등하지 않은 ‘연대’

한편 요한 바오로 2세 교종은 교회의 정치적 정의구현 활동에 대하여 일관된 입장을 보이지 않았다. 폴란드에서는 교회가 정치에 깊숙이 개입하였다. 교종 자신이 발표한 회칙 「노동하는 인간」에서는 ‘연대’라는 말을 가장 중요하게 다루는데, 이 역시 바웬사가 이끄는 연대노조에 대한 격려와 지침을 제공하려던 것이라는 혐의를 받고 있다. 폴란드 주교와 사제들은 교종의 지지 아래 폴란드 국민의 양심으로 훨씬 광범위한 정치 무대에서 활동할 종교적 의무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교종은 다른 제3세계 교회의 정치적 참여에 대해서는 다른 태도를 보였다. 이를테면 필리핀의 제이미 신 추기경은 독재자 마르코스를 축출한 민중과 야당을 지지했기 때문에 교종의 눈 밖에 났다. 결국 마르코스 대통령과 친밀하게 지내던 교황대사의 의견에 따라, 교종은 1985년 열린 주교대의원회의에 신 추기경을 초청하지도 않았다. 필리핀 평화 혁명 후에 곧바로 신 추기경은 교종의 비공개 비판을 듣기 위해 로마로 소환되었다.

아래로부터의 혁명에 대한 교종의 불편한 감정은 1983년 니카라과 방문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라틴아메리카 민중은 민중 학살을 자행하는 과테말라 군사 독재 정권과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를 암살한 엘살바도르 군사 정권에 대하여 교종이 강력히 항의해 주길 바랐다. 또한 미국의 지원을 받는 콘트라 반군에 의해 희생당하고 있는 니카라과 민중의 아픔을 위로해 주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교종은 우익을 자처하던 컬럼비아의 트르히요 추기경의 영향을 받아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혁명 정부를 비난하고, 그리스도교 기초공동체를 중심으로 혁명의 견인차 역할을 맡았던 민중교회를 혹독히 규탄했다. 이들이 교회를 분열시킨다는 것이다.

‘민중교회’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진 친(親)산디니스타 교회는 ‘아래로부터’ 출현했으며, 따라서 일사불란하게 교계 제도를 재확립하려는 교종에게는 일종의 저주와도 같았다. 많은 니카라과인들은 미국과 콘트라 반군을 지지하던 쿠바 교회의 오반도 이 브라보 대주교를 비판해 왔다. 교종은 니카라과에서 민족주의적 열망이 산디노주의와 동일시된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니카라과 민중의 지지를 받은 것은 에르네스토 카르데날 신부로 유명해진 민중교회였다. 그래서 네 명의 사제가 니카라과 정부 각료로 임명될 수 있었다. 그러나 교종은 이에 대하여 경악하였다. 이 사제들의 존재는 곧 사회주의와 가톨릭교회의 일치를 상징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줄곧 사제들에게 공직 사임을 요구했다. 그러나 사제들은 로마의 요청보다도 민중의 요청에 귀를 기울였다. 이에 대한 판단이야 쉽게 내릴 수 없는 노릇이지만, 결국 교종은 민중교회와 혁명 정부를 반대한다는 뜻에서 오반도 대주교를 중앙아메리카에서 처음으로 추기경에 임명하였다.

보프 신부는 결국 사제직을 떠났는데, 아마 프란치스코 교종과 같은 교종이 진작에 나왔더라면 그는 지금도 '보프 신부'로 불렸을 것이다.

보이는 권력을 포기할 줄 아는 용기

대부분의 독재 정권은 정권과 체제에 대한 위협 요인을 없애려고 하며, 이러한 저항 집단에 대한 탄압 속에서 인권을 유린한다. 그렇다면 교회는 이러한 인권 문제에 대해 발언할 자격을 얼마나 갖추고 있는 것일까? 당시 현대판 종교 재판소의 재등장으로 비추어진 라칭거 추기경이 이끌던 교황청 신앙교리성을 두고, 한스 큉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소설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나오는 대심판관처럼 요한 바오로 2세 교종이 ‘자유’를 두려워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신앙교리성은 교황 무류성(無謬性)에 이의를 제기한 독일 튀빙겐 대학의 한스 큉을 ‘교리에 대한 모독죄’로 유죄 판결을 하고 가톨릭 신학을 가르칠 자격을 박탈했다. 쉴레벡스는 사제가 없는 공동체에서는 남자든 여자든, 미혼이든 기혼이든지 간에 성직자로 선출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가 로마로 소환당해 심문을 받았다.

한편 해방신학에 대한 신앙교리성의 비판과 심문처럼 끈질긴 것도 없었다. 라틴아메리카의 군사 정권 아래서 가난한 이들을 편들던 사제와 수녀들이 1970년대에만 무려 850여 명이나 살해당했다. 오죽하면 1980년 요한 바오로 2세가 브라질 상파울로에 방문했을 때, 그 지역 군 사령관이 다음 목적지로 가는데 군 헬기를 이용하시라고 권하자, 아른스 추기경이 머뭇거리는 교종에게 “군대와 함께 가겠다면 혼자 가십시오.” 하고 충고하였겠는가.

따라서 1979년 푸에블라에서 열린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는 해방신학을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 이 해방신학의 못자리는 기초공동체였다. 레오나르도 보프 신부는 <교회, 권력과 은총>이라는 책에서 이 기초공동체를 “교권적 교회를 대신하여 바닥으로부터 새롭게 탄생하는 교회”라고 말했다. 독점적 권력을 추구하던 바티칸의 방향에 도전했다는 이유로, 보프 역시 1984년 로마로 소환되었다.

평소에는 수단을 입지 않는 보프에게 당시 신앙교리성 장관 조셉 라칭거가 물었다.
“수단 때문에 사람들은 당신의 헌신과 인내를 알아보지요.”
“물론 정신주의의 증거가 필요하지요. 그런데 잘 차려입어야 하는 것은 바로 마음입니다.”
“하지만 마음은 눈에 안 보이잖아요. 어떤 것은 눈에 보여야 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렇습니다. 하지만 수단은 권력의 상징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이 옷을 입고 버스를 타면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저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람들의 종이어야만 합니다.”

결국 보프 신부는 “교회와는 무관한 혁명적 유토피아”를 퍼뜨렸다는 이유로 무기한 침묵하라는 처벌을 받았다. 그러나 보프의 책은 금서 목록에 오르자마자 서점에서 불티나게 팔렸다.

그러나 1986년 요한 바오로 2세는 브라질 주교들과의 특별 회담을 통해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에 대한 깊은 의견을 나누고, 부활 주간에 보프의 ‘참회의 침묵’이 끝났음을 발표했다. 이어 “해방신학은 시의적절할 뿐더러 유용하고 또 필요하다. ... 이 대륙의 가난한 이들은 근본적이고 완전한 해방을 알리는 이 복음이 긴급히 필요하다고 느낀 최초의 사람들이다.”라는 서한을 브라질 교회에 보내 왔다. 이는 현실에 대한 깊은 대화가 얼마나 중요한지 우리에게 보여 준다.

로마의 일방통행적인 권위주의는 그 동안 이런 대화를 가로막고 교회 안에서 예언적 발언을 통제해 옴으로써 선의를 가진 신학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의 인권을 훼손시켜 왔다. 따라서 땅 끝까지 나아가 이 세상을 복음화 시키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을 현대 세계에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교회가 먼저 복음화될 필요가 있었다. 성모 마리아에 대한 급진적 해석으로 인하여 교종으로부터 단죄받았던 스리랑카의 신학자 발라수리야 신부 역시 그런 희생자 가운데 하나였다.

교회가 자신의 비민주적 권위주의, 영신주의적 성속 이원론, 학문적 자유에 대한 침해를 그만 두고 스스로 쇄신될 때 비로소 현대 세계 역시 교회의 존재 이유를 변호해 줄 것이다. 그래야 높고, 외롭고, 멀리 있었던 교황이 갈릴래아의 서민 예수처럼 소박한 웃음으로 민중과 담소를 나눌 수 있게 될 것이다. 지금 프란치스코 교종이 그 살아있는 증인이 되고 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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