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은 살인자, 아니면 순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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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은 살인자, 아니면 순교자?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1.08.14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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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의 요한복음 묵상 [지상에 몸푼 말씀]-21

순교자(殉敎者)

-김기림
 
성(聖) 스테판
피와 땀으로 산 나라 오시니
수다스런 변명(辨明)을 팔아 번영하던
오― 분바른 인생(人生)의 저자 물러가라

둔한 살은 주린 이리에게 찢어 주며
뼈를 탐내는 무리에게는 뼈 갈아 던지시며
즐겨 눈보래와 벗하여 살아오신 이―

낯익은 별조차 허공(虛空)에 아득한 낮과 밤
떳떳지 못한 삶이라면 차라리
길들인 짐승처럼 죽음을 데리고 다니신 이 오시다

오직 그럴 리 없는 역사(歷史)의 눈짓만 쳐다보며
여러 흐린 울과 침침한 하늘을 견디신
오― 서럽고도 꿈 많은 기상학(氣象學)이여

성(聖) 스테판
피와 땀으로 산 나라 오시니
수다스런 변명(辨明)을 팔아 번영하던
오― 분(紛)바른 인생(人生)의 저자 물러가라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의회를 소집하고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저렇게 많은 표징을 일으키고 있으니,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 저자를 그대로 내버려 두면 모두 그를 믿을 것이고, 또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의 이 거룩한 곳과 우리 민족을 짓밟고 말 것이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그해의 대사제인 카야파가 말하였다. “여러분은 아무것도 모르는군요.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낫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헤아리지 못하고 있소.” 이 말은 카야파가 자기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해의 대사제로서 예언한 셈이다. 곧 예수님께서 민족을 위하여 돌아가시리라는 것과, 이 민족만이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느님의 자녀들을 하나로 모으시려고 돌아가시리라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그날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하였다.(요한 11,47-53)

“이등(伊藤)을 구적(仇敵)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나는 3년간 각처로 유세도 하고 또 의병의 참모중장으로서 각지의 싸움터에도 나갔다. 이번 거사도 한국의 독립전쟁이므로 나는 의병의 참모중장으로서 한국을 위해 한 것으로 보통의 자객으로서 저지른 것이 아니다.”

안중근은 1908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을 하얼빈역에서 저격했다. 우연찮게도 그날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군사독재의 상징인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한 날짜와 같다. 안중근은 이등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하느님께 감사하면서 가슴에 크게 성호를 그은 다음 대한만세를 세 번 외쳤다. 그에게는 살인자 죄목이 씌워졌고, 천주교인이 사람을 죽이는 것은 죄악이 아닌지 심문받았다. 그러나 안중근은 독립군의 한 사람으로서 정당한 행위를 한 것이라고 자신의 행위를 변호하였으며 신앙에도 어긋나지 않는다고 밝혔다. “성서에도 사람을 죽임은 죄악이라고 한다. 그러나 남의 나라를 탈취하고 사람의 생명을 빼앗고자 하는 자가 있는데도 수수방관하는 것은 죄악이므로 나는 그 죄악을 제거한 것뿐이다.”

하얼빈의 일본 영사관에서 심문받을 때 안중근은 ‘로마의 성인으로 아시아까지 종교를 선교했으므로 ’ 토마(多默) 사도를 주보성인으로 하여 세례를 받았다고 답변했다. 그는 애초부터 자신의 신앙과 아시아에 대한 사랑, 동포애 사이에 차이를 두지 않았다.

 

안중근은 19세에 황해도 신천(信川)에서 세례를 받았다. 아버지 안태훈(베드로)은 본래 해주 땅의 지주였는데 출세를 위해 서울에 올라와 개화파와 사귀었다. 그런데 이들이 일으켰던 갑신정변(1884년)이 실패하자 재산을 정리하고 신천군 청계동에 내려와 살다가 천주교에 귀의하여, 그 일가 친척과 마을 사람들이 무더기로 입교하게끔 만들었다.

1900년 무렵, 안중근은 우리나라의 문명 개화를 위해 고등교육이 필요하다고 느껴 빌렘 신부와 함께 뮈텔 주교를 찾아갔다. 서울에 대학을 설립하도록 건의하려던 것이다. 그러나 주교는 한국인에게 학문이 있으면 믿는 일에 좋지 않을 것이라며 일언지하(一言之下)에 거절하였다. 두 번 세 번 연거푸 건의해 보았으나 헛수고였다. 이에 안중근은 분한 마음을 참지 못하고 “교의 진리는 믿을지언정 외국인의 심정은 믿을 것이 못 된다.”고 하며 빌렘 신부에게서 배우던 불어 공부도 그만두었다. 당시 한국교회를 다스리던 프랑스 선교사들은 외세 앞에서 풍전등화(風前燈火) 같은 조선의 상황과 조국을 잃게 된 조선인의 슬픔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의 관심은 교회의 안녕뿐이었다.

신앙과 조국 중에 하나만 택하라니

안중근은 1905년 이후 식민지로 바뀌어 가는 조국을 위해 상해로 갔다가 그나마 그를 이해해 주었던 재령(載寜)의 르 각(Le Gac, 郭元良) 신부의 충고를 받아들여 고향에 돌아와 학교를 두 개나 세우고 실력 배양에 힘썼다. 그리고 1907년, 일본이 고종황제를 폐위시키고 군대를 해산시키자 의병운동에 뛰어들었으며, 급기야 조선 식민화에 앞장섰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이런 사태는 대부분의 프랑스 선교사들에게 결코 반가운 소식이 아니었다. 안중근에게 세례를 주었던 빌렘 신부마저도 안중근의 독립운동을 예전부터 “만일 네가 여기서 정치적 소요를 일으키려 한다면 네가 떠나든지 내가 떠나든지 하자.”면서 못마땅해하였다. 그러나 안중근은 종교적 차원에서는 빌렘 신부를 따랐지만 민족문제에 대해서는 그의 말을 따라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또한 브레(Bret, 白類斯) 신부는 안중근에게 정치적 소요를 일으키지 않겠다는 다짐을 요구했다가 거절당하자 성모승천 대축일에 성사마저 주지 않았다.

그런 분위기였기 때문에 이토 히로부미 저격사건은 교회 지도자들에게 무척 당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뮈텔 주교는 이 소식을 듣자마자 다음날 바로 통감부를 찾아가 조의를 표명했다. “정치란 슬픈 것이다. 이등의 암살은 공적인 재난인데도 슬퍼하는 사람들은 일본인과 친일파 뿐이다. 반면 한국인들은 전반적으로 기뻐하고 환영하고 있다. 그것은 한국에 대한 이등의 공적을 오해하고 도리어 그를 한국에 대한 압제(壓制)의 도구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등의 살해를 민비 시해 · 보호조약 · 황제 폐위 등에 대한 정당한 복수로 여기고 기뻐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다음에 그 암살자가 천주교 신자라는 보도가 일본과 서울의 신문에 보도되었다. 그러자 뮈텔 주교는 한사코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반박했지만 얼마 후 암살자가 다름아닌 뮈텔 주교도 잘 알고 있는 안중근임이 밝혀졌다. 그러나 교회에서 발행하던 경향신문은 안중근이 천주교 신자라는 것은 고사하고 종교인이라는 말조차 한 적이 없었다. 오히려 ‘이등공(伊籐公)의 조난과 흉서의 휘보’라는 기사까지 만들어 이토 히로부미를 추도해 마지않았다. 11월 4일, 이토 히로부미의 국장일(國葬日)에 뮈텔 주교는 수녀들이 만든 조화(弔花)를 보내고 사제들은 데리고 장례식에 참석했다.

한편 뮈텔 주교는 안중근의 사형선고에 대하여 냉담한 태도를 취했다. 안중근은 3월 25일, 고별면회라는 자리에서 가까운 사람들에게 편지를 전했다. 사랑하는 아내에게는 장남 분도를 꼭 신부로 만들어 달라고 했고, 숙부에게는 큰아버지를 빨리 개종시켜 줄 것을 신신당부했다. 또한 3월 25일이 예수 수난 날이므로 골고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을 배우기 위해 그날 처형해 달라고 청했다. 그러나 일본당국은 이 청을 거절하고 보복의 뜻으로 3월 26일 오전 10시 이토 히로부미가 죽은 날, 같은 시간에 안중근을 처형했다.

뮈텔 주교는 일본당국이 시체를 가족들에게 넘겨주지 않은 데 대하여 ‘매우 당연한 일’이라고 논평했으며, 안중근에게 병자성사를 받을 자격마저 박탈했다. 안중근이 잘못을 뉘우치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결국 이를 무시하고 여순에 가서 병자성사를 주었던 빌렘 신부는 뮈텔 주교에게 2개월간 성무집행 정지처분을 받았다(⌜교회사 연구⌟ 제9집, 한국교회사연구소, 97-119쪽 참조).

 

종교자유를 위해 제국주의를 승인한 교회

“종교의 자유가 보장된다. 종교가 정치에 간여하지 않는다면 불교 · 유교 · 기독교는 행정부와 대립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행정부는 종교 사업을 돕고 모든 종교에 대해서 합법적인 선교를 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해 주고 보호해 줄 것이다.”(1910. 8. 29. 한일합병문 5조, 데라우치 총독 성명서)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새로운 통치자 일본을 믿었다. 100년간 교회를 박해했던 조선정부보다는 근대화된 일본의 통치를 받는 게 선교에 유리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독립운동은 곧 일본정부에 저항하는 행위이며, 교회의 기득권을 위험에 빠뜨리는 것으로 여겨졌다. 모국인 프랑스가 동남아시아 국가를 침략한 것이 정당한 일이듯이,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을 침략하는 행위도 정당하게 취급했다. 힘이 정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1911년, 경성교구장 뮈텔 주교는 드망즈 주교가 대구교구장에 서품되자 함께 조선총독 데라우치를 방문하여 한국교회의 충성을 맹세했다. 1919년 3 · 1 만세운동 때 드망즈 주교는 일제의 신민(臣民)으로서 교회는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바쳤다.”는 성서말씀을 인용하면서 충성심을 표현하였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황제신앙을 고백한 것이다. 그는 대구 계산동 성당에 신자들을 모아놓고 만세운동에 가담하면 대죄(大罪)을 범하므로 지옥에 갈 것이라며 흥분하여 말하였다.

한편 교황청 역시 우리 민족이 겪고 있는 감정과 사뭇 달랐다. 1922년 4월, 조선 총독 사이토와 정무총감 미즈노, 그리고 총독부인 마쓰미야가 교황 베네딕도 15세로부터 성 실베스텔 훈장을 받았다. 이들이 한국 주교들과 우호적인 친분을 맺고 있다는 데 대한 답례였다. 따라서 총독은 수도원장 및 주교들을 식사에 자주 초대하였는데, 이는 종교가 정권을 지지하도록 만드는 방법이었다. 결국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자존심을 팔아 교회를 지키고, 교황청은 파시스트였던 무솔리니와 일본 제국주의에 표창을 수여하여 탄압정치를 정당화시켜 준 것이다.

안명근과 이기당에 얽힌 슬픔

뮈텔 주교
뮈텔 주교

안명근(安明根)은 안중근의 사촌동생이다. 그는 안중근이 사형당한 뒤 빌렘 신부의 만류를 무릅쓰고 북간도로 망명하였으나 의병을 모집하여 거사를 일으킬 계획을 갖고 군자금을 모으러 다시 국내로 들어왔다. 그 무렵 안명근은 고향 사람인 한순직(韓淳稷)과 함께 안악 사람인 원행섭(元行燮)의 집에 머물며 모금운동을 벌였는데, 이 두 사람도 천주교 신자였다.

이 사실을 빌렘 신부가 뮈텔 주교에게 편지로 알리자 주교는 즉각 총독부에 안명근을 고발하였다. 그래서 모금운동을 하던 안명근과 동료들은 ‘데라우치 총독 암살 음모’를 꾸몄다는 혐의로 날조되어 체포되었다. 결국 안명근은 종신 징역형을 선고받고, 다른 이들은 15년을 선고받았다. 뒤늦게 빌렘 신부가 안명근의 사면을 총독부에 건의했으나 묵살되었다. 안명근에겐 독립운동을 포기할 기미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안명근은 안중근과 흡사했다. 옥고를 치르면서 종교서적을 읽고 르 각 신부에게 봉성체(奉聖體)를 하는 등 신앙생활에 열성을 보였던 것이다.

한편 압록강 철교 준공식에 참석하기로 되어 있던 데라우치 총독을 암살하려고 했다고 조작한 ‘105인 사건’ (1911년)으로 체포된 사람 중에도 이기당(李基唐)이라는 천주교 신자가 끼여 있었다. 그러자 교회에서는 황급히 이기당이 그럴 리 없다고 변호하고 나섰다. 사건 자체가 조작된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천주교 신자가 암살사건에 연루되어 교회가 피해를 입을까 봐 걱정하여 일제에 대한 충성도를 증명하려 한 것이다. 이기당은 2년 후 출옥하여 즉시 서간도(西間島)로 망명하였다.

간도에서 이기당은 광제회(廣濟會) 회장으로 활약하면서 자치회를 만들어 병학(兵學) 학교를 설립하는 등 항일무장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자 일제는 이기당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이 소식을 들은 신의주 천주교회 서병익(徐丙翼)신부는 그동안 이기당이 천주교를 떠나 조선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자치회를 설립하고 항일운동을 벌였다는 구실을 내세워 1916년 10월 5일자로 그를 파문하고 교회에서 제적시켰다. 그런 뒤 서병익 신부는 이 사실을 일본 경찰에 통보하는 동시에 교구장 뮈텔 주교에게 보고하였다.(⌜교회사 연구⌟ 제11집, 38-58쪽 참조).

예수를 죽일 음모

라자로가 다시 살아난 것을 보고 많은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자 대사제와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의회를 소집하고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얽어매고 죄의 멍에를 들씌우던 율법을 상대화시키고, 성전을 장사꾼들의 소굴로 만들고 로마제국에 결탁했던 유다 지도층 인사들을 비판하였는데 이제는 죽은 사람마저 살려냈다니 이런 무리가 자꾸 생겨나면 모든 게 위태로울 뿐이다. 사회는 혼란에 빠질 것이며, 로마 군대는 이 소동을 빌미로 삼아 유다 지도층의 통치능력을 의심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뭔가 대책을 세워야 했다. “그대로 내버려 두면 누구나 다 그를 믿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로마인들이 와서 이 거룩한 곳과 우리 백성을 짓밟고 말 것입니다.” (요한 11,48) 그들이 내린 결론은 단순했다. 그해의 대사제 가야파가 한마디로 정리했다. “당신들은 그렇게도 아둔합니까? 온 민족이 멸망하는 것보다 한 사람이 백성을 대신해서 죽는 편이 더 낫다는 것도 모릅니까?” (11,49-50)

식민지 상황에서 교회의 안녕을 위하는 입장에서 볼 때 안중근과 안명근과 이기당 같은 독립운동가가 교회 안에 신자로 머물러 있는 것은 시한폭탄을 껴안고 있는 격이다. 언제 어느 때 이들이 사고를 칠지 모른다. 이들이 일제에 항거하는 것이야 조선인으로서 당연한 노릇인지 모르지만 애꿎은 교회마저 탄압을 받을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뮈텔 주교와 드망즈 주교 등 일제 치하의 고위 성직자들이 품은 생각이었다. 그래서 교회는 안중근, 안명근, 이기당을 파문시키거나 치안당국에 고발하고 때로는 성사를 거절하여 지옥행을 선고함으로써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충성심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날부터 그들은 예수를 죽일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11,53) 그래서 예수님은 예루살렘 근처에 내놓고 다니지 못하고 “광야 근처에 있는 지방” (11,54)에 머물러 계셨다. 슬프고도 안타까운 일이다. 예언자는 고향에서 대접받지 못한다고 했다. 예수님은 로마 제국이 아니라 오히려 동족에게서 배척받았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동족을 괴롭히던 지배층으로부터 미움을 받으신 것이다. 그분이 저들에게 기득권을 포기하라고 위협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해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되고, 하느님 나라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마무리 묵상

죽은 나자로가 살아났다고 합니다, 하느님.
그래서 사람들이 당신께
벌떼처럼 몰려올지 누가 알까요.
제 나라 제 백성 아낀다 해도
누군가 의사요 열사라 부른다 해도
무두가 이들을 아름다운 사람이라 하는 건 아니겠지요.
모든 세상의 꼭대기에선
이단이다, 이단이다, 이단이다,|
하는 소리가 들립니다.
아름다움이 드러날 수록 추함이 밝히 보이고
의로움이 드러날수록
비열한 얼굴 숨을 길이 없습니다.
이단이다, 외치는 꼭대기에서
우리 교회가 돌아설 수 있다면 

이제 그만 내려올 수 있다면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느님.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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