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친놈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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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놈 글쓰기
  • 최태선
  • 승인 2021.08.14 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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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선 칼럼
사진출처=
사진출처=pixabay.com

내 글의 소재가 되는 사람들이 그 글을 읽고 화가 나서 나와의 관계를 단절하는 경우가 왕왕 있다. 그 사람들의 생각은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 식의 사고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내 글은 깊은 곳으로 들어가자는 글이다. 그래서 칭찬보다는 비난으로 들릴 확률이 높다. 그런데 이걸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잘 이해하지 못한다.

나는 좋은 교회란 자기부족을 깨달아 알게 하는 곳이라는 말을 자주 반복한다.

한 번 생각해보라. 당신은 어떤 교회를 좋은 교회라고 생각하는가. 사람들은 교회가 언제나 불완전한 곳이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파악하고 있다. 그래서 요즘은 자신들의 교회를 좋은 교회라고 하지 않고 건강한 교회라고 한다. 한편으로는 잘난 척 한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한 꼼수로 그럴 수도 있다. 어쨌든 자신의 교회를 (비교적) 건강한 교회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나는 건강한 교회라는 말에도 좋은 교회라는 말과 똑같이 자부심과 자만심이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교회는 ‘좋은’이나 ‘건강한’과 같은 형용사를 사용할 수 없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교회는 불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그 불가능한 교회에 열정을 가지는 사람들이다. 그렇게 불가능한 교회에 열정을 가지고 최선을 다할 때 우리는 결코 만족에 이르지 못한다. 우리가 노력하면 할수록 우리는 ‘자기부족’이라는 한계를 반복해서 경험하게 된다. 그런데 신앙의 삶에서 이 자기부족의 깨달음이야말로 진실한 자신의 신앙을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다.

나는 많은 목사들과 장로들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교회를 지켰다고 스스로 만족하는 모습을 너무도 많이 보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공로에 도취한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모습이 바리새파 사람들이 빠졌던 올무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실천에 감동하고 자신들처럼 철저한 신앙생활을 지켜나가지 못하는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우월감과 자기만족에 빠져 감사를 드렸다. 그것이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라는 예수님의 기사에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결과에 주목해보라. 누가 예수님의 인정을 받았는가. 누가 옳았는가. 놀랍게도 신앙에 모든 것을 다 바쳐 헌신했던 바리새인이 아니라 죄인으로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았던 세리였다. 그는 성전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했다. 그럴만 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예수님은 그런 죄인인 세리의 손을 들어주셨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의롭다는 인정을 받고서 자기 집으로 내려간 사람은, 저 바리새파 사람이 아니라 이 세리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무엇이 이들의 결과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바로 ‘자기만족’이다. 바리새인은 스스로 자신의 행위에 도취하여 자기를 높였다. 그렇게 자신을 높일 때 하나님 나라의 평등이 심각하게 훼손된다. 하나님의 백성은 스스로 높아지려해서는 안 된다. 바리새인은 자신의 행위에 몰두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의에 도전해야 했다. 불쌍한 사람들을 높이는 일에 매진해야 했다. 그러나 바리새인은 그 반대의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자기만족’이라는 영적인 늪에 빠진 것이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사고에 천착하는 한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이 자기만족이라는 영적인 늪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서로에게 거울이 되어 부족한 것들을 비춰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관계는 이를 통해 점점 더 깊은 신앙의 세계로 몰입하게 된다. 이 일을 서로에게 할 수 없다면 그 관계는 결국 피상적인 관계에 지나지 않는다. 진정한 사랑은 상대방의 유익을 구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잘못 가고 있는 상대방을 그대로 내버려둘 수 없다. 이 관계를 감내하지 못한다면 결국 그리스도인의 길에서 벗어나는 수밖에 없다.

나는 내 글의 소재가 되어 나에게 화를 내고 나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돌아선 사람들이 안타깝다. 그들은 내가 이상한 사람이라고 말하며 나의 부족한 면들을 공격적으로 쏟아낸다. 나는 그런 지적에 화를 내지 않는다. 결국 그들의 속내가 드러나는 것일 뿐이다. 그런 건 관계가 더 깊어지기 전에 드러나는 것이 더 낫다. 어차피 결과가 뻔 하지 않은가. 결정적일 때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때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 더 낫다.

그러면 왜 그런 일이 일어날까. 그들의 주장대로 내가 이상한 사람이라서 그런 것일까. 물론 나는 그런 면을 배제하지 않는다. 나는 언제든 이상한 사람일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되는 이유를 알고 있다. 내가 솔직하게 글을 쓰기 때문이다. 오늘 한 매체의 기사를 읽다 재미있는 대목이 있었다.

“<슬픔을 쓰는 일>은 좀 당황스러울 정도로 솔직한 글이다. 기자로서 스킬 위주로 글쓰기를 배운 나에게, (저자 본인 말대로) 이런 '미친년 글쓰기'는 생소하다 못해 살짝 부담스럽기도 하다. 치유하는글쓰기연구소 박미라 대표가 추천사에 쓴 것처럼 "그도 그럴 것이 부모를 떠나보내는 일이 맨정신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죽음 직전부터 '탈상脫喪'에 이르기까지, 딸이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이만큼 적나라하게 쓴 책은 아마 없을 것 같다.”

슬픔을 쓰는 일, 정신실, IVP

 

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정말 적확한 지적이기 때문이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솔직한 글’이라는 표현이 재미있다. 너무 솔직하면 당황스러워진다. 내 글이 그렇다. 나는 솔직하게 글을 쓴다. 그런 내 글의 소재가 되는 사람뿐만이 아니다. 내게는 더욱 솔직하게 글을 쓴다. <슬픔을 쓰는 일>의 저자는 그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자신이 쓰는 글쓰기를 '미친년 글쓰기'라고 한다. 부모의 죽음에 맨정신일 수 없다는 것이 추천사를 쓴 분의 설명이지만 사실 그것이 아니라 저자가 본래 적나라하게 글을 쓰기 때문이다. 저자 자신이 그걸 알고 있는 것이다.

나도 안다. 내 글 역시 미친놈 글쓰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성서가 말하는 것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미친 글을 쓸 수밖에 없다. 어떻게 가난을 복이 있다고 쓸 수 있는가. 어찌 애통하는 것이 복이 있다고 쓸 수 있는가. 오늘 아침 묵상한 야고보서의 내용을 보자.

“나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영광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마십시오. 이를테면, 여러분의 회당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 금반지를 끼고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도 들어온다고 합시다. 여러분이 화려한 옷차림을 한 사람에게는 특별한 호의를 보이면서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십시오" 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당신은 거기 서 있든지, 내 발치에 앉든지 하오’ 하고 말하면, 바로 여러분은 서로 차별을 하고, 나쁜 생각으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이 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 내용을 묵상해보라. 너무도 당연한 일이 아닌가. 내가 드나드는 복지법인에서는 구청장만 나타나도 난리가 난다. 구청장님이 오신다고 제일 좋은 옷을 입고, 청소를 하고 대접할 것을 준비하고 맞이하는 데 소홀함이 없도록 사람들을 교육시키고 그것을 여러 번 반복한다. 그보다 더 높은 사람이 오는 경우는 어떻겠는가. 그런데 그런 사람이 올 때 가난한 사람이 온다면 여러분은 그 가난한 사람을 어떻게 대접할 것인가.

한 마디로 야고보서의 이 내용은 당연한 것을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이 반대로 행동한다면 그 일이야말로 미친 짓이다. 그렇다. 성서는 우리에게 미친 짓을 하도록 요구한다. 그러므로 내가 쓰는 글은 ‘미친놈 글쓰기’가 될 수밖에 없다. 더욱이 내가 그것을 적나라하게 너무도 솔직하게 쓰지 않는가. 당황스러운 것 역시 너무도 당연하지 않은가.

그리스도인의 글쓰기는 ‘미친놈(년) 글쓰기’가 될 수밖에 없다. 복음은 결코 맨정신으로 받아드릴 수 없고, 살아낼 수 없다. 미쳐야 한다. 어머니의 죽음보다 더 당혹스럽다. 솔직해야 한다. 적나라해야 한다. 그렇게 우리가 복음 때문에 미친 글을 쓸 때(미친 삶을 살 때) 우리는 비로소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게 된다.

나는 오늘도 내 글이 내 글을 읽는 분들을 찌르는 글이 되기를 원한다. 당혹스러움은 당연하다. 그런 당혹스러움을 지나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게 된다면 내 미친놈 글쓰기는 성공한 것이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미친놈 글쓰기를 이어간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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