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기 제창, 애국은 사악한 자의 미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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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 제창, 애국은 사악한 자의 미덕이다
  • 최태선
  • 승인 2021.08.07 1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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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선 칼럼

예루살렘이 로마의 통치하에 있었을 때의 이야기다. 점령군 로마는 예루살렘 성전이 내려다보이는 위쪽에 군영을 마련했다. 감시하기 좋은 곳이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에 로마를 상징하는 독수리가 새겨져 있는 깃발을 걸었다. 로마에게는 통상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 그것은 첫번째 계명을 범하는 것이었다.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들을 섬기지 못한다. 너희는 너희가 섬기려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떠서 우상을 만들지 못한다.”

유대인들의 눈에 로마의 깃발은 우상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신을 섬기는 것이었다. 그들은 모두 거리로 몰려나왔다. 그리고 목을 길게 빼고 길바닥에 엎드렸다. 자신들의 목을 치라는 것이었다. 로마는 당연히 그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모두 죽이겠다는 위협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깃발을 내릴 때까지 물러나지 않았다. 결국 깃발이 내려졌다. 로마가 굴복한 것이다.

십계명은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십계명이다. 태극기와 성조기는 로마의 깃발과 다른가. 태극기와 성조기는 우상이 아닌가. 아니면 유대교와 그리스도교가 이 점에서 달라진 것인가.

특히 개신교에 묻고 싶다. 개신교는 로마 가톨릭의 십자가 고상까지 우상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는가. 정교회의 성상(이콘)을 우상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는가.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에는 연속점과 불연속점이 존재한다. 그러나 십계명은 연속점 상에 있다. 그리고 국가는 그리스도교 안에 자리 잡은 유일한 우상이다.

 

내가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맞다. 최근 대통령 후보에 등록한 개신교 장로인 사람의 애국가 제창 문제이다. 그는 연초 자신들의 가족모임에서도 애국가를 4절까지 부른다는 것을 자랑했다. 애국심이 투철하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도무지 헤아리지 못하는 것이다.

국가와 하느님이 일치하지 않을 때 그는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이에 대해 그는 모호한 설명을 늘어놓을 것이다. 국가와 하느님이 결코 어긋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할 것이며 국가와 하느님은 서로 다른 영역에 있다고 주장할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그것이 바로 성서가 말하는 두 마음이다.

특히 그가 속한 교단의 가장 큰 교회 중에 하나인 온누리교회에서는 첫 번째 주일 예배에서 애국가를 4절까지 제창한다. 그러니까 그 교단 소속 장로인 그에게 애국가는 낯설지 않다. 오히려 그것이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이라 여겨질 것이다. 태극기와 성조기를 함께 흔드는 전광훈류 역시 동일한 사고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국가와 하느님의 문제는 그만의 문제가 아니라 개신교 전체의 문제라 해도 좋을 것이다.

이에 대한 이해는 대단히 중요하다. 이것은 대표적인 본질의 문제이다. 이것이 바로 잡히지 않으면 그리스도교 전체가 국가 혹은 나아가 세상의 하부구조로서 만족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기원은 개신교가 아니다. 개신교가 태동하기 오래 전에 이미 그러한 사고는 그리스도교 안에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바로 313년 밀라노 칙령이 그것이다. 교회는 '신앙의 자유'와 하느님을 바꾸었다. 하느님의 자리에 국가가 놓이고 대신 교회는 '신앙의 자유'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이란 대가를 지불하고 '신앙의 자유'를 얻는 것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런데 바로 그것이 313년에 일어난 일이다.

물론 392년에는 그리스도교가 로마의 국교로 확정되기도 했다. 그러나 하느님의 자리를 국가에 양도한 그리스도교에게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결국 그리스도교는 더 이상 생명의 종교가 아니라 로마의 이데올로기가 된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종교개혁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우리나라에 많이 소개되고 있는 아나뱁티스트들의 이야기는 매우 소중하다. 그들은 '신앙의 자유'가 결국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이 두 마음으로 나뉘게 된 사건이라는 분명한 이해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국가가 약탈해 간, 아니 그리스도인 스스로 양도한 하느님의 자리를 고수한다. 그런 그들이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 모두에게 이단 판정을 받은 것은 당연하다. 바로 이 이해에서 그리스도교는 완전히 달라진다. 그들은 수많은 순교자들을 배출하면서도 지켜야 할 유대그리스도교의 본질을 지켜낸 것이다.

오늘날 그리스도교 안은 물론 밖에서도 자식의 생명을 바쳐도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유일한 우상은 국가다. 그리스도교는 생명의 종교이다. 그리스도교를 생명의 종교라고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만이 생명을 창조하실 수 있고 다시 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국가는 자신에게 공양된 생명을 다시 살릴 수 없다. 국가는 생명을 돈으로 바꿀 수 있을 따름이다.

우리는 여기서 아브라함의 아케다 사건의 의미를 다시 생각할 수 있다. 하느님은 외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셨다. 우리는 이것을 하느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는 이야기로만 이해한다. 그러나 이 사건은 단순한 시험이 아니라 하느님의 하느님 되심을 만천하에 공포하는 사건이다. 하느님은 이삭을 대신할 생명을 미리 준비해두셨다. 오직 하느님께만 생명을 드릴 수 있다는 하느님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는 의미이다. 하느님께는 외아들 이삭의 생명이라도 바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사건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의 예표라고 말한다. 올바른 성서 이해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하느님께서 어떻게 당신께 드려지는 생명에 대해 반응하시는가에 대한 대답이다. 그렇다. 부활이다. 그리스도인은 오히려 십자가에 달려 죽어야 부활에 이른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셨다. 예수님의 말씀 역시 오직 하느님만이 생명의 주인이심을 만천하에 공포하는 것이다.

애국심으로 생명을 요구하는 국가는 우리 시대는 물론 313년 이후 그리스도교 역사 속에 살아남은 유일한 우상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국가는 생명을 책임질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것이 우상으로서의 국가의 한계이다.

특히 우상철폐를 외치며 십자가 고상과 성상(이콘)까지도 마다한 개신교의 장로가 국가가 그렇게 남아있는 유일한 우상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그것을 오히려 자랑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정말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지점에서 생각나는 오스카 와일드의 말이 있다.

“애국은 사악한 자의 미덕이다.”

이 한 마디에 핵심이 들어있다. 그가 장로로서 제대로 된 생명의 이해를 가지고 있다면 대통령의 꿈을 접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우상숭배이며, 그것이 바로 욕망이 자신에게 요구하는 애국심의 진면목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복음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작아질 것을 요구한다. 대통령이 되는 것이 정말 작아지려는 행보일까. 그것은 동네 강아지도 웃을 일이다. 그렇다면 그는 오스카 와일드가 한 말을 새겨들어야 할 것이다. 나는 그가 더 이상 사악한 자의 길을 가지 않기를 바란다.

차제에 그리스도인들 역시 장로 대통령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한다는 것이 얼마나 허튼 사고인지를 깨닫고 국가가 우상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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