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압전류에 감전된 예수란 사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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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압전류에 감전된 예수란 사나이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1.08.07 19: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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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의 요한복음 묵상 [지상에 몸푼 말씀]-20

어둠을 밝히기 위하여 

-김정환

어둠을 지내는 내 손은
어둠에 익숙해졌다
밤이슬에 얼굴에
나는 내 손을 부빈다
그래도 내 손금, 내 손톱 속에서
어둠의 행각은 지워지지 않는다
이 밤, 어느 잠 못 이루는 골목, 구석길에서
너의 어둠, 나의 어둠에 몸서리치고 있을
그대여 그대여
어둠에 젖는 내 손 내 팔의 마지막 남은 온기로
나는 너를 부른다
힘에 겨워 너를 부른다
언제쯤 환한 새벽이 손바닥처럼 다가오면
너에게 달려갈 것인가
달려가 너의 새벽이 되어
환하게 안길 것인가
아직도 어둠에 몸닳고 있을
그대여 그대여

 

마리아는 예수님께서 계신 곳으로 가서 그분을 뵙고 그 발 앞에 엎드려, “주님, 주님께서 여기에 계셨더라면 제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마리아도 울고 또 그와 함께 온 유다인들도 우는 것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북받치고 산란해지셨다. 예수님께서 “그를 어디에 묻었느냐?” 하고 물으시니, 그들이 “주님, 와서 보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다. 그러자 유다인들이 “보시오, 저분이 라자로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몇은, “눈먼 사람의 눈을 뜨게 해 주신 저분이 이 사람을 죽지 않게 해 주실 수는 없었는가?” 하였다. (요한 11,32-37)

고압전류가 흐르는 메시아

고대세계에서 가장 정교한 정치체제를 갖추고 있던 도시국가 아테네에서는 메시아, 하면 우선 지혜와 힘과 영광으로 가득찬 제왕이어야 했다. 노예들의 땀과 핏방울 위에 군림하는 지배자여야 했다. 백성들 대다수가 땀흘려 노동하는 순간에도, 그는 철학자나 사유자의 무리와 함께 생각하고 논쟁하고 꿈꾸는 일에 몰두할 수 있어야만 했다. 뿐만 아니라 군사력도 가지고 있어 군대를 이끌고 전쟁터에 나가 적토를 유린하고 노예를 끌고 돌아오는 인물이어야 했다.

중국의 역대 황제 중에 진(秦)나라 초대 왕인 시황제가 바로 그와 같은 메시아적 인물이었다. 이집트의 파라오도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았다. 오늘날에 있어서도 전체주의 및 가짜 민주주의 국가에는 백성들의 고귀한 생명과 자유를 희생시켜서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독창적 정치 메시아가 얼마나 많은가? 또한 그들이 찬양하며 예배하는 이런 메시아는 이 세상에 오염되지 않은 분이어야 했다. ‘속(俗)’과는 아예 인연조차 없는 분이어야 했다. 그저 ‘성(聖)’이어야만 했다. 사실 모든 종교는 자신의 신전을 거룩하게 유지시키려고 예배하러 오는 세상 사람들의 접근마저 막으려고 온갖 노력을 다하였다. 이를 위해 성직자들뿐 아니라 귀령(鬼靈)이나 동물까지 동원해 성전을 지키도록 했다. 그러므로 깨끗하지 못한 자는 신의 이름조차 불러서는 안 되었다. 신은 백성들의 터부(금기)였기 때문이다.

터부(tabu)의 동사형인 타푸이(tapui)는 ‘거룩하게 하다.’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이는 ‘고압전기 흐름, 위험!’이란 경고문과 같은 뜻이다. 사람들은 그곳에 강력한 힘이 충전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고서 적당한 거리와 보호망을 유지해야만 한다. 구약성서에서 백성들이 주장하던 하느님은 바로 이런 위험한 고압(高壓)의 하느님이었다. “야훼를 보려고 마구 넘어 들어오다가 많은 사람이 죽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라.”(탈출 19,21) 그들은 혼비백산하여 놀랐고 모세에게 하느님 앞에서 자신들의 대변자가 되어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들은 두려워 떨며 “하느님께서 직접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면 우리는 죽을 것입니다.”(출애 20,19)라고 하였다. 시나이산의 하느님은 고압전기로 충전된 위험스런 하느님이었다. 그 하느님이 백성들에게 올 때엔 백성들이 크게 다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고압 전류같은 하느님에 대한 또 다른 생생한 예는 법궤(法櫃)이다. 하느님의 법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활과 예배에서 중심을 차지하였다. 법궤는 사막의 길고 힘든 생활을 함께하였으며 백성들의 길을 인도하였고 그들에게 승리를 가져다 주었다. 그들의 희망과 꿈은 하느님의 법궤에 집중되었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더이상 가까워질 수 없을 정도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백성들은 법궤를 만지고 쓰다듬고 포옹하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법궤는 곧 그들의 삶이었고 희망이었고 역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윗왕이 하느님의 법궤를 영원히 안치할 목적으로 이를 키럇 여아림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기게 되었을 때, 수레를 끌던 소가 뛰는 바람에 법궤가 떨어지려 하였다. 이때 운반 책임을 졌던 두 사람 중의 하나인 우짜가 본능적으로 손을 펴서 법궤를 붙잡았다. 그런데 “야훼께서는 우짜가 궤에 손을 댔다고 진노하시어 그를 치셨다.”(1역대 13,10)라고 한다. 이는 다윗 왕가의 종교적 독점권을 보장하려고 배려한 기사였다고 보더라고 가히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고압종교에 감전된 예수, 그리고 고압교회

구약성서 종교의 후예인 유다교 역시 고압종교이다. 유다교의 하느님은 이 세상의 근심걱정에 매인 세상 사람들의 접촉을 철저히 막았다. 거리의 사람들은 불결했다. 왜냐하면 그들 생활은 종교적 율법이나 의식이 지니고 있는 순결함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 하느님은 혈관 속에 거룩한 피가 단 한 방울도 흐르고 있지 않은 이교도들을 더더욱 멀리하신다. 그들은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죄와 탐욕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고압종교에 대해 예수가 감히 도전한 것이다. 인간을 위해 안식일법과 정결례를 상대화 하셨기 때문이다. 더구나 성전이 무너지리라고 예언까지 했다. 결국 예수님은 이 고압전류가 흐르는 종교에 ‘감전되고’ 말았으며, 십자나무 위에 사지(四肢)가 찢긴 채 매달려야 했다.

그러나 교회는 콘스탄틴 대제 이후 국가권력까지 합세하여 고압교회로 충전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압력은 자꾸 올라가 심지어 성주와 제후, 제왕까지도 하느님과 교회권위 앞에서 두려워 떨게 되었다. 국가와 교회가 시키는 대로 살아야만 했던 가난하고 무지한 백성들은 선택의 자유마저 빼앗긴 채 자기 운명을 교회가 지시하는 대로 내맡겨야 했고, 심판의 하느님에게 절대 복종하여야만 했다.

그리스도교는 위험한 종교였다. 백성들은 공포와 떨리는 심정으로 위험한 하느님 앞에 서야만 했으며 제후와 성직자들이 하느님과 백성 사이에서 중재를 서야만 했다. 위험한 하느님을 변증(辨證)하는 신학 역시 고압신학이 되고 말았다. 하느님을 교회라는 보호망에서 구출해 내어 세상 사람들이 하느님을 보다 투명하게 볼 수 있도록 노력한 건방진 반항아들에게 교회가 파문과 징계라는 형벌을 내릴 수 있도록 이론을 제공했다. 이러한 전투적 신학은 하느님을 이교도의 신과 구별하며 구원과 저주받을 운명 사이를 뚜렷이 구별하는 데 기여했다. 너무도 강력한 전류가 흐르는 신학이어서 이교도들은 상처 입지 않고서는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었다.

한편 종교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상하게도 고압종교는 고압 정치-사회 권력과 결탁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중국에서는 왕을 “천자(天子)라 불러 하늘의 위임자로 간주되었다. 일본의 천황(天皇)은 최근까지도 신들의 직계 후예로서 신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떠오르는 태양의 나라를 다스릴 권한이 있다고 믿었다. 이런 식으로 종교적인 권력과 정치적인 권력이 서로 결탁하여 힘없는 백성들을 착취하고 그들을 희생시켜 왔다.”(송천성, <대자대비하신 하느님>, 분도출판사, 147-157쪽 참조)

 

금관(金冠)을 내버리는 예수

희곡 ‘금관의 예수’(김지하 각색)는 우리나라의 어느 소도시 한구석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세 주인공은 문둥이‧거지‧창녀인데, 강력한 지도자에 의해 주창된 ‘정치안정과 경제성장’의 희생자들임이 분명하다. 한 늙은 신부가 나오는데 그는 선의(善意)를 가진 사람이기는 하나 정부 고위층과 맺은 휴전(休戰)관계를 깨뜨리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에 희생자들의 편에 서서 대변하기를 거부하고 있다. 힘없는 수녀만이 그들과 운명을 같이하려고 몸부림친다. 이 가련한 인생들이 허기진 배와 상처받은 마음으로 추운 낮과 두려운 밤을 지내고 있는 동안 술 취한 문둥이가 메마른 목소리로 자탄과 고뇌에 가득 찬 노래를 부른다.

“지쳐 몸 눕힐 무덤도 없이/겨울 한복판/버림받았네/버림받았네/끝없는 겨울/밑 모를 어둠/못 견디겠네 이 서러운 세월/못 견디겠네/못 견디겠네/이 기나긴 가난/못 견디겠네 차디찬 세상/더는 못 견디겠네.”

그러다가 문둥이는 성당에 세워진 금관을 쓴 예수의 콘크리트상(像)을 발견하게 되고 이때 그의 탄식은 분노로 변한다. 그는 마구 외쳐댄다. “예수 팔아 천년 만년 길이길이 잘 해 쳐먹어라! 나하곤 상관없다. 쳇, 소용없어, 다 소용없어, 저 세멘 공구리와 나와 무슨 상관이야! 쳇.(침 뱉는 시늉)” 그 순간에 문둥이는 자신이 콘크리트 예수와 상관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다. 놀랍게도 구세주인 예수가 문둥이에게 자기를 콘크리트 감옥에서 구출해 달라고 부탁하지 않는가.

“나는 너무나 오랜 세월을 이 시멘트 속에 갇혀 있었다. 답답하고 어둡고 적적한 이 시멘트의 감옥 속에. 나는 너처럼 착하고 가난한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싶었고 또 함께 괴로움을 나누고 싶었느리라.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이 감옥에서 해방되는 날을. 해방되어 너희들 속에, 너희들의 그 불행 속에 내가 다시금 불꽃으로 살아 타오를 날을. 그런데 네가 왔다. 네가 가까이 와 내 입을 열었다. 내가 너에게 구원받았느니라.”

교회는 예수를 민중들로부터 격리시켰고 그에게 금빛 찬란한 옷을 입혀 외경심이 절로 나는 성전 제단 그 높은 곳에 안치해 놓고는 경건한 의식과 우렁찬 설교로 그의 입을 봉해버렸다. 그는 노예된 교회의 노예된 구세주가 되었다. 이 예수가 이제 문둥이에게 자기를 노예상태에서 구출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자유를 나누어 주려면 우선 자신이 자유를 회복하여야만 했다. 힘없는 자들에게 힘을 주기 위해선 먼저 그 자신이 힘을 되찾아야만 했다.

강력한 지도자는 물론이고 사제도, 주교도, 돈 많은 기업가도, 공장주도 예수를 자유롭게 하지 못할 것이다. 문둥이와 거지, 창녀만이 구세주를 구할 수 있다. 뭔가 잘못된 그리스도론이 아닌가? 교회의 전통, 경직된 신학 및 정치-사회적 권력에 의해 고착된 그리스도만을 생각하던 자들에겐 참으로 충격적인 그리스도론이 아닌가! 예수는 더 이상 시간을 끌지 않는다. 예수가 자꾸 체근하자 문둥이는 마침내 예수상에 가까이 가서 예수의 머리에 씌워진 금관을 벗겨버림으로써 예수를 콘크리트 감옥에서 석방시킨다. 그 순간 교회를 대표하는 사제와 국가경제를 책임진다는 사장, 그리고 공권력을 상징하는 순경이 뛰어나오며 만류한다.

"신부 : 엇, 예수님 관이오!"
"시장 : 엇, 내 금관이!"
"순경 : 엇, 절도로구낫!"
이어서 광란의 동작들이 이어진다. "문둥이에게서 순경이 금관을 가로채자, 순경에게서 사장이 금관을 가로채고, 그것을 다시 신부가 가로채서 눈 깜짝할 사이에 예수의 머리 위에 다시 씌워버린다." 종전대로 굳어져 버리는 예수. 꿈이 산산조각 난 창녀‧문둥이‧수녀는 괴로워하며 외친다. “안 돼! 안 돼! 안 돼!”

 

라자로 앞에 흘리신 눈물

베타니아의 라자로가 죽었다. 마르타와 마리아는 오빠의 죽음 앞에서 슬피 울며, 예수님께서 계셨더라면 조금만 빨리 와주셨다면 그를 죽음에서 살리셨을지도 모른다는 원망을 하였는지도 모른다. 라자로가 앓아눕자, 마리아와 마르타는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께 이렇게 전하게 했던 것이다. “주님,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가 앓고 있습니다.”(요한 11,3) 그러나 예수님은 이틀이 지나서야 발걸음을 옮기셨다. 그 속내를 미리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예수님은 라자로를 그 누이들만큼이나 사랑하였던 까닭이다.

때가 이르자 예수님은 지체없이 “유다로 돌아가자.”(11,7)고 채근하셨다. 그러나 이제는 제자들이 예수의 행장(行裝)을 말린다. “선생님, 얼마 전만 해도 유다인들이 선생님을 돌로 치려고 하였는데 그곳으로 다시 가시겠습니까?”(11,8) 예수님이 한번 결심하시자 제자들은 막을 재간이 없었다. “우리 친구 라자로가 잠들어 있으니 이제 내가 가서 깨워야겠다.”(11,11)

사랑 앞에서는 두려움이나 장애는 없다. “친구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신 분이 아니던가. 박해하는 무리가 있으리라는 것을 예감하면서도 예수님과 그분의 공동체는 유다땅 베다니아로 길을 서둘렀다. 그게 사랑의 공동체이다. “우리도 함께 가서 그와 생사를 같이합시다.”(11,16) 아마도 라자로는 예수님뿐만 아니라 그분의 제자들에게도 다시없는 친구였던 모양이다. 그래서 사실상 쉽게 의기투합(意氣投合)하여 길을 나설 수 있었다.

예수님을 마중나왔던 마르타는 원망 반(半), 간청 반(半)으로 매달렸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사람은 죽더라도 살겠고 또 살아서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 너는 이것을 믿느냐?”(11,25-26) 예수님께서 죽음을 이기고 생명으로 오시는 분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하여 늑장을 부리신 것일까. 사실 예수님은 너무도 친밀해서 비할 데 없는 이들 자매에게 더 굳건한 믿음을 주시고자 함이었을 것이다. 곧 인간의 정(情)과 하느님 신앙의 긴장을 유지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마르타의 전갈을 듣고 마리아는 “벌떡 일어나”(11,29) 예수님께 달려갔다. 실낱 같은 희망을 안고 마리아가 예수님께 달려가고 예수님은 라자로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다.”(11,35) 그분은 고압전류를 뿜어내는 엄위하신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셨다. 속내를 뒤집어보면 여린 심성을 가진 아름다운 영혼이었다. 따뜻한 선홍빛 피톨이 흐르는 분이셨다. 한걸음 앞서 사랑 앞에 달려나가고 그 사랑을 반기시며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할 줄도 아는 분이셨다. “돌을 치워라.” 죽음과 생명 사이를 갈라놓은 돌이 치워졌고 라자로는 걸어나왔다. 이런 분을 사랑하고 싶지 않은 영혼이 어디에 있으랴.

 

마무리 기도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가
앓고 있습니다.
저희도 이런 말을 드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느님.
당신이 사랑하는 이,
그래서 내 죽음 앞에서도 당신께서
눈물 흘릴 구석이
제게도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느님.
내 영혼이 너무 강퍅해서 
내 형제들도 자매들도 고개를
돌리곤 하는데|
흉물같은 내 영혼을
당신마저 거두지 않으신다면
내 어찌 살까요, 하느님.
당신께서 이제라도 부르시면
벌떡 라자로처럼 일어나
당신께 달려가련만.
오늘 대낮같은 마음으로
당신을 바라보오니
나를 부르소서,.
내 돌문을 열어 젖히고
당신의 생명을 얻으오리다.
그러면 정말로
얼마나 좋을까요, 하느님.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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