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시 데이, 그리스도를 위한 바보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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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시 데이, 그리스도를 위한 바보가 되고 싶다
  • 로버트 콜스
  • 승인 2021.08.07 1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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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콜스의 [DOROTHY DAY, A RADICAL DEVOTION]

「긴 외로움」 책에서 도로시 데이는 그와 다른 사람들이 젊었던 시절과 정치적 혹은 사회적 진보주의를 모두 신봉했던 시절에 그들이 얼마나 호전적이고 성급했던가를 말하고 있다. 후에 자서전에서 초기 가톨릭일꾼운동 시절에 대해 쓸 적에도 데이는 그런 높은 이상을 살려고 노력했던 사람들 사이의 토론을 설명한다. 도로시 데이는 그와 피터 모린 사이에도 토론뿐만 아니라 갈등이 있었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즉 무엇을 말해야 하고 말하지 말아야 하는지, 무엇을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지 무척 심한 불일치가 있었다고 말한다.

예를 들면 도로시 데이는 2차 세계대전 시기에 자신과 비슷한 정치적 배경을 지닌 거의 모든 사람들이 히틀러를 끝장내기 위하여 싸울 준비가 되어 있었을 때 평화주의를 훨씬 더 강력하게 부르짖고 침묵하지 않으려는 성향이 모린보다 더 강했다. 한편 「긴 외로움」을 보면 데이는, 외견상 작은 실수들을 일화들 속에서 표현하고 있다:

“아주 사람들이 꽉 차 있던 때에 나는 농장의 창문 밖으로 맨발의 두 나그네들이 길을 따라 오는 것을 보고 한숨을 지으면서 ‘저 사람들이 우리집으로 오는 것 같네요’라고 말을 했었지요. 그러자 한 동료가 심각하게 ‘당신은 당신 자신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일에 대해서 쓰지 말아야 합니다’라고 저에게 말했어요. 다시 말하자면 환대가 무슨 의미이며 어떤 의무를 수반하는 가에 대해 우리가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환대에 대해 쓰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었어요.”

「빵과 물고기」에서 데이는 이 점에 대해 더 명료하게 말한다; 도로시 데이는 어렵던 시절, 좌절의 시기에 대해 말한다. “마음을 평정시키는 데에는 시간이 걸린다”고 하면서 그런 마음이 어떤 상태인지에 대해서 설명한다, “너무나 쉽게 초조해하고 화내며 후회하고 분노하는 마음”이라고. 또한 다른 구절에서 도로시 데이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얼마나 자주 우리는 사랑하는데 실패하고, 자주 퉁명스럽고 냉정하며 무관심한가, ‘로저 옷 좀 정리하세요; 10시까지 돌아와야 해요.’ 혹은 ‘도서실에 앉아서 기다리세요.’ ‘순서를 기다리세요; 난 바빠요.’ 이런 모습이 자주 일어나지요.”

 

이렇게 수년 동안 도로시 데이와 그의 딸은 환대의 집에서 사람들 사이에서 함께 살았다, 도움을 받는 사람들과 도움을 주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들은 도로시 데이가 진지하게 헌신하도록 도울 수 있었던 사람들이다(환대의 집에 오는 많은 자원봉사자들은 이곳의 사람들에게서 보여지는 엄청난 고통과 필요가 자신들에게 도와야 되겠다는 압도적인 자극을 주었다고 말한다).

도로시 데이는 자신의 “실수”와 과오에 대해 인정한다: “나는 얼마나 자주 사랑하는데 실패했는가.” 그는 자신의 “내적인 두려움과 사나움”, 냉정하게 신경질적으로 또한 지나치게 염려하면서 도덕적이 되려는 자신의 성향을 인정하고 있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자기비판을 지나치게 마비적으로 하게 되지 않는 가에 대해서도 걱정하였다. 그렇게 하는 것 역시 자신의 덕에만 관심을 두는 왜곡된 방식이기 때문이었다. 그가 추구했던 것은 올바른 방식이었으며, 사람들이 필요한 일을 하면서도 자신들의 변덕스런 성향에 대해 주의하는 그런 전통이었다.

그는 자신과 동료들의 사악한 측면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분명한 태도를 가졌다. 그는 어떤 작가들이 그런 것처럼 절대로 악마에게 전권을 주지 않았으나, 예수님의 구원의 은총을 믿게 된 사람들까지도 선과 악 사이의 피할 수 없는 투쟁을 겪는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삶에 대해 말하면서 때때로 도로시 데이는 하느님의 생명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는 것 같았으며, 그래서 그의 말을 듣는 사람들은 복음에 대해 응답하고 있는 그의 열정을 느꼈다.

“나는 주님의 열정을 십자가 죽음이라고만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분의 전 삶이 “열정” 그 자체라고 믿어요. 그렇다고 내가 여기서 신학자가 되려는 것은 아닙니다. 나는 신학에 대해서는 정말 쑥맥이지요. 내 마음은 신학자가 될 만큼 추상적이지 못하니까요. 그러나 예수님에 대해 생각할 때에 나는 그분이 언제나 열정적인 분이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분의 모든 경험은 그분의 열정의 표현입니다: 그분이 말했던 이야기들, 행하셨던 기적들, 사람들에게 해 주셨던 설교들, 견디셨던 고통들, 겪으셨던 죽음 등 모든 것이. 그분의 전 삶이 열정 그 자체였어요 ­ 많은 사람들, 친구들 그리고 원수 같은 사람들에게도 주셨던 에너지, 사랑, 관심입니다.

젊은 사람들이 환대의 집에 와서 돕기를 원할 때에 온갖 질문들을 나에게 합니다. 나는 그들에게 답하려고 애씁니다. 될 수 있는 대로 열리고 정직하게 답변하려고 합니다. 때로는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악마가 이깁니다. 나는 방문객들에게 우리가 주는 도움에 대해 말하지만, 이곳에 있는 우리문제들에 대해 말하는 것을 빼먹습니다.

나는 자신에게 말합니다. 왜 내가 그들에게 말해야 하나? 그리고 내가 듣기를 원하는 답이 들어있는 방식으로 나자신에게 질문을 던집니다. 즉 ‘너는 그들에게 우리문제를 말하지 말아야해. 누구나 다 문제를 갖고 있고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다 문제를 겪고 있어. 그렇게 살아가는 거야’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압니다. 마치 우리가 이곳에서, 자비의 바다에서 부드럽게 항해하고 있는 인상을 주어서는 안되는 것이지요.

학생들이 우리 일을 돕기 위해 이곳에 와서 시간을 보낼 때에 그들이 겪게 되는 고통스러운 경험들을 잘 이겨낼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는 있는 그대로 말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상처를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손님들’은 거칠고 심술궂으며 불결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할 말 못할 말을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런 행동에 맞닥드리는 학생들을 상상해 보십시요. 그들이 도로시 데이나 다른 사람과 말했고 그래서 모든 가톨릭일꾼운동 사람들은 어떠한 욕에 대해서도 침착하게 대처할 수 있다고 믿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화를 냅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주님은 웃으실 수 있고 우리를 용서하실 수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자신을 전혀 성질도 내지 않는 사람으로, 늘 모든 사람에게 부드럽고 친절한 사람으로 그린다면 그분께서 우리를 용서해 주실까 하고 나는 의심합니다. 주님께서도 약간 성질을 부리셨으며, 그래서 나는 때때로 그 사실을 기억하려고 애씁니다. 내가 그분의 인간성을 잊어버릴 때, 나는 내 자신의 인간성도 잊게 됩니다. 그리고 바로 그 때에 나는 악마의 손에 있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가 사는 동안 내내 감시해야 할 유혹입니다 ­ 가장하는 것, 체 하는 것 말입니다.”

가장하는 것, 체 하는 것이라는 단어의 사용이 나를 놀라게 했다. 난 공책에서 눈을 떼고 연필을 내려놓고 이 말을 쓰지 말까 하는 생각을 했다(나는 우리의 대화를 녹음 테이프에 담는 동안 때때로 기록도 하고 있었다).

도로시 데이는 내가 걱정스러워 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고, 나는 그의 커다란 두 눈에서, 안경을 끼어 더욱 더 꿰뚫어보는 것처럼 보이는 그의 눈에서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그는 침묵을 깨지 않았다. 마침내 나는 “가장하는 것, 체 하는 것­에 대해 정말로 써도 좋을까요?"하고 물었다. 그는 웃음을 지었다. 마치도 그가 이런 나의 말 때문에 보호받는다고 느끼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시키고, 그러면서도 나의 걱정을 이해하며 자신이 그런 걱정들 때문에 위협받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주는 웃음 같았다.

그는 내 질문에 답하기 전에 잠시 멎었다가 내 손을 잡고 꽤 길게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우린 자신들을 존중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단어에 대해 묻는 당신은 정당합니다. 오 사랑하는 주님, 저는 우리가 우리 자신들을 일련의 배우로 만드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습니다. 생각으로나 행동으로나 저는 배우가 되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꺼이 우리자신들을 그리스도를 위한 바보들이라고 불러왔습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바보라는 구절을 이용하는 드라마도 있다고 인정할 수 있겠네요!

성 바오로 사도는 극적인 회심을 했었지요! 그는 강렬한 작가였어요. 그는 독자들을 어떻게 흔들 수 있는지 알고 있었어요! 처음부터 우리는 거리로 나가서 우리 신문에 대한 관심을 요청했습니다. 피터는 우리의 경쟁자인 공산주의자들이 ‘매일의 노동자 신문을 읽으시오’라고 소리치는 것을 듣고 ‘매일 나오는 가톨릭일꾼 신문을 읽으시오’라고 소리쳤습니다.

이 이야기는 「긴 외로움」에서 말했던 것 같은데요. 일꾼운동을 처음 시작했을 때와 그 후로도 우리들의 삶에는 많은 드라마들이 있었습니다. 우린 피켓을 들고 시위도 했지요. 우린 프랑코에게 사람들이 ‘예’를 할 때 ‘아니오’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핵전쟁에 대비하여 방공호를 짓는 것이 미친 짓이고 비도덕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감옥에 갔습니다. 나는 우리 입장을 단순하게 말하고 있지만 우리가 믿는 것을 매우 대담하게 세상에 알릴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당신들은 제발 자신들을 그만 전시하세요,’ 우리가 표지를 들고 길거리를 따라 걸어가고 있을 때 어떤 여자가 나에게 가까이 와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지요. 나는 불편을 주어 미안하다고 말하고 나서 우리가 생각하기에 옳은 것을 계속 해야만 한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것 그리고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다른 이들에게 말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그건 다른 이들을 가르친다는 위험이 있습니다. 당신은 모든 사람에게 외쳐대며 성가시게 만드는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설교자는 그저 설교에 미치게 됩니다. 당신은 지나치게 극적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나는 나 자신과 공동체 식구들에 대해 걱정합니다. 또한 우리가 보는 식으로 세상을 보지 않는 사람들을 무시하게 되지 않을까 걱정도 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선포해야 할 우리 자신의 신앙을 갖고 있으며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야 할 메시지도 갖고 있습니다. 가장하는 것, 체 하는 것은 가짜 실행자가 되는 것을 의미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얘기하기 시작할 때에 또한 그들의 주의를 끌기 위하여 노력할 때 짊어져야 할 위험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또 기도하기 위하여 사막으로 들어가서 기도하는 것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기도하기 위하여 노력하여 왔지만, 또한 우리는 언론인이요 정치 행동가들입니다. ­ 바쁜 도시 세상 속에서 주변 곳곳의 사람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 한 가운데에 살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이곳은 사막이 아닙니다. 다만 길거리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잃어버린 영혼들의 거대한 사막일 뿐입니다.

어떤 날 내 자신에 화가 날 때에는 나도 하루종일 내방에만 틀어박혀서 기도하며 책을 보며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고 싶습니다. 아래층에 내려가서 그곳의 모든 사람들에게 말하고, 우리를 만나러 온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섬겨야 될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그때는 나 자신에 대해 인정하려고 했던 것보다 더 많이 가장하는 것으로 끝날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들 사이에 있을 때가 아니라 그 후에 비로소 멎어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으며 어떻게 더 잘 할 수 있는 가에 대해 멎고 생각하게 됩니다. 때때로 그 후라는 것은 사람들과 함께 지낸 지 몇 시간 후일 수 있고 때로는 모든 것이 흐릿해지고 그러나 당신 안의 나팔이 소리를 내고 당신이 정화될 때까지 당신을 계속 불편하게 만드는 수주간, 수개월이 지난 후에 가지는 시간일 수도 있습니다.

피터는 이렇게 말하곤 했지요, ‘우리는 우리 얼굴이 납작해지지 않고서 세상에 우리 메시지를 전달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위험을 무릅써야 합니다. 우리는 쓰러진 다음에도 일어나 계속 움직여야 합니다. 실수를 했기 때문에, 열 번, 백 번 잘못했다고 더 이상 움직이지 않겠다고 한다면, 우리 모두는 그냥 거기서 끝나게 됩니다.’

그리고 피터는 계속 우리가 그렇게 주저앉아서는 안된다고 말했습니다(그는 이런 표현을 좋아했어요). 나는 계속 그와 논쟁을 했어요. 우리가 계속 흔들리고 떨어진다면 그건 우리가 무언가 잘못하기 때문이라고 나는 말했지요. 그러면 피터는 ‘하느님께 기도하고 그분의 도움을 청하세요’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래도 계속 움직이세요’ 라고 덧붙였지요. 우리는 그렇게 계속해 왔다고 생각합니다.”

피터 모린의 말대로, 도로시 데이는 상당히 극적으로 집중적으로 살아 왔으며, 마침내 나는 그가 말하려고 하는 의미를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환대의 집에서, 거리에서 또한 전국에 강연을 하며 돌아다니는 그의 모든 삶에 연극적인 측면이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피터 모린과 도로시 데이는 서로를 동료 가톨릭인이며 초기 그리스도교 개념에 철저한 동료일뿐만 아니라, 바오로 복음사가의 후예들로서 글을 쓰거나 말로써 할 수 있는 한 힘껏 많은 사람들에게 성서적 공생주의의 덕들을 전달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피터는 <쉬운 글>에서 희극적이며 동시에 비극적인 표현들을 하고, 멜로 드라마 같은 측면을 보이기도 한다.

도로시 데이는 수필과 책에서 감상적인 표현의 위험을 무릅쓰기도 하고 때로는 태연하게 선동하는 표현을 하기도 하였다. 그는 갑작스러운 운명의 전환들, 잊지 못할 기억들, 친구들과 지기들의 끝없는 교류로 가득찬 이야기들을 썼다. 또한 바오로사도가 “하느님께서... 우리 사도들을 맨 끝자리에 내세워 뭇사람의 구경거리가 되게 하셨고... 우리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바보가 되었습니다”(I코린 4,9­10)라고 쓴 것처럼 그의 글에서도 극적으로 전개시키는 표현이 많이 드러난다.

 

[원출처] <Dorothy Day, a Radical Devotion>, Robert Coles, 1987
[번역문 출처] <도로시 데이, 뿌리로부터 온전히 살다>(<참사람되어>2002, 7월호)

로버트 콜스(Robert Coles)

하버드 의과대학의 정신의학과 및 사회윤리학과 명예교수. 청소년 문제 상담 전문가로 활동해 왔으며, 50여 권이 넘는 책을 집필한 작가. 1973년 미국의 다양한 계층과 인종의 아이들을 직접 취재하고 분석한 <위기의 아이들>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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