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갱이’의 죽음이라 잊어 버려도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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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갱이’의 죽음이라 잊어 버려도 되는가?
  • 유대칠
  • 승인 2021.07.26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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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칠 칼럼

1950년 7월 26일 저녁 9시 두 명의 순경이 6살에서 16살 정도 되어 보이는 30여명의 어린이를 트럭에 실고 강창 낙동강 나루터에 도착했다. 그리고 나룻배로 강을 건너 30여명의 어린이 모두를 학살했다. 10여년이 지나 이승만 정권이 끝나고 1960년 9월 17일 <영남일보>에 그 날의 비극이 보도되었다. 그 학살을 지켜본 사공 서동득 선생이 증언한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두 순경이 누구이며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우린 모른다. 그리고 잔혹한 죽임을 당한 30여명의 어린이가 누구인지 또 왜 죽임을 당했는지도 우린 모른다. 아예 그 날의 비극조차 알지 못한다. 내가 사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 내 아이들과 종종 자전거를 타며 운동하던 곳, 바로 그곳이다. 그곳에서 30여명의 아이들이 죽임을 당하고 버려졌다. 나 역시 그 날의 비극도 그곳의 아픔도 알지 못했다. 1950년 보도연맹으로 죽은 수많은 이들의 죽음이 생각보다 가까이 있었다. 단지 그 비극을 알지 못했다.

1950년 7월 30일 대구와 만주를 오가며 독립운동을 한 독립운동가 유쾌동 선생은 가창 달성광산 수식갱도에 생매장 당한다. 일본에 의해 탄압 받고 구금 되었던 그가 해방 이후 이 나라의 정권에 의하여 죽임을 당한 것이다. 만주에서 대구로 돌아와 노동 운동을 하며 1946년 10월 항쟁에 참여한 그였기에 이미 정권은 그가 싫었다. 친일파 가득한 정권에 도덕적 정당성에 초지일관 민중을 향한 애씀으로 살아가는 이는 치우고 싶은 짐이었다. 그렇게 그는 마땅한 죄도 없이 대구형무소로 잡혀가 가창에서 생매장 당한다. 2006년 독립 활동이 인정되고 대통령 표창을 받지만 이미 그는 생매장 당해 있었다.

보도연맹사건으로 가창골에서 희생된 독립지사 유쾌동 선생의 아들 유병화씨. (사진출처=영남일보)
보도연맹사건으로 가창골에서 희생된 독립지사 유쾌동 선생의 아들 유병화씨. (사진출처=영남일보)

그의 아들 유병화 선생은 독립운동가의 자식으로 일제 강점기 일본에 의해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 1946년 대구 철도국 직원으로 자신의 동료 김용태가 총탄에 맞아 죽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1946년 10월 항쟁이 참가한 죗값으로 아버지 유쾌동 선생과 함께 1950년 대구형무소에 잡혀가 가창으로 끌려가는 아버지를 마지막 인사 한 마디 나누지 못하고 지켜보았다. 지인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을 구했지만 동료와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그에게 삶은 공포의 시간이었다. 입영 영장을 받은 이에게 국가는 지리산 토벌대의 삶을 명령했다. 빨갱이라며 그의 아버지를 죽인 국가는 그에게 빨갱이를 잡아 죽이는 일을 시킨 것이다. 그리고 진급을 약속하며 군대에 계속 남으라 했지만 그는 거부한다. 거부의 대가로 가혹한 구타를 당한다. 해방 이후 대구는 이랬다. 법도 원칙도 도덕도 없었다. 그저 강자의 힘이 법이었다.

이승만 정권이 끝나자 이제서라도 진상을 규명하려던 독립 운동가 몽재 이원식 선생은 쿠데타 세력인 박정희 정권에 의해 사형을 구형받는다. 그리고 10년 옥고를 치른 뒤 출소 직후 교통사고의 후유증으로 1977년 사망한다. 그리고 지금 그 날 대구에서 일어난 그 수많은 학살을 기억하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다. 강창 나루터를 지날 때도 워터파크 가는 길에 있는 가창골을 지날 때도 도심지에 있는 학산 공원과 앞산 빨래터를 지날 때도 그것에 있었던 학살을 떠올리는 이들은 많지 않다. 당연히 슬퍼하는 이들도 분노하는 이들도 많지 않다. 억울한 죽음이 참 외롭다.

잊혀져버린 억울함이다. 너무나 깊고 깊은 아픔이지만 잊혀져버린 억울함이다. ‘빨갱이’라는 이름으로 당한 죽음이기에 쉽사리 그 억울함을 말할 수도 없다. 어쩌면 ‘빨갱이’였다는 것을 실토하는 꼴이 되어버릴지 모르니 말이다. 하지만 대부분 ‘빨갱이’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해방 이후 여전히 해결되지 않은 부조리한 상황에 분노한 죄가 전부였다. 대구에 돌림병이 돌자 대구를 차단해 버렸다. 실패한 식량 정책으로 온 국민이 배고픈 상황에 돌림병이 도는 대구는 더 배고팠다. 실패한 식량과 노동 정책에 분노한 것이 죄의 전부였다. 분노하는 이들은 빨갱이란 이름으로 당연히 죽여야 되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그렇게 그냥 죽여서 죽여진 시대, 그 유일한 이유는 ‘빨갱이’였다. 지금도 그 말은 쉽지 않은 말이다. 해방 이후 그 말이면 이제 6살 정도의 아이도 강가로 끌고 가 죽여 버렸다. 그 말 한마디면 잔인한 성폭력도 용인되였다. 그리고 지금 정말 슬픈 것은 그 날의 죽음을 슬퍼하는 이들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빨갱이’의 죽음이라 슬프지 않은 것인가? 어쩌면 ‘빨갱이’일지 모른 이들의 죽음이라 슬프지 않은 것인가? ‘빨갱이’의 죽음이라 잊어 버려도 되는 것인가? 억울한 그 죽음이 외롭다. 너무나 외롭다. 설령 그들이 정말 빨갱이라도 그 죽음은 너무나 억울하다. 너무나 슬프다. 너무나 부당하다. 6살의 아이가 죽어야할 이유가 아니고, 성폭력으로 일평생 아파해야 할 이유가 아니다.

이제라도 우린 더불어 아파해야 한다. 더불어 아파할 때 우리도 그 날 비극의 당사자가 된다. 그 아픔의 피해자가 된다. 그때 그 억울함은 그들의 억울함이 아닌 우리 가운데 나의 억울함이 된다. 나의 아픔이 되고 눈물이 되고 분노가 된다. 우리의 억울함으로 일어난 분노는 또 다시 이 땅에 억울하게 죽어가는 이를 없게 하는 힘이 될 것이다. 어쩌면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애도는 바로 그것이다. 더불어 아파하고 분노하는 것이다. 그 분노가 뜨거운 울림이 되는 날, 그들도 다시 살아 역동하는 혁명의 기운으로 우리 가운데 부활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골로 간 유쾌동 선생은 끝내 돌아올 수 없었다. 이제 더불어 분노함으로 그와 그 시대 그 수많은 억울한 죽음을 부활시켜야 할 때다. 더는 그냥 억울하게 죽은 잊혀져버린 생명으로 둘 수 없기 때문이다.

7월 26일, 억울하게 죽은 잊혀져버린 30여명 어린 영혼들... 꽃이라도 한 송이 들고 찾아 봐야겠다.

 

유대칠 암브로시오
중세철학과 초기 근대철학을 공부한다.
대구 오캄연구소에서 고전 세미나와 연구, 번역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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