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회퍼에게 배운다: 군비증강은 전쟁을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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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회퍼에게 배운다: 군비증강은 전쟁을 부른다
  • 한상봉
  • 승인 2016.07.25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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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 칼럼] 

“사드 배치는 한반도가 새로운 냉전체제의 중심이 된다는 점에서 우려를 금할 수 없다. 교회는 ‘평화는 단순히 전쟁의 부재만이 아니며, 오로지 적대 세력의 균형 유지로 전락될 수도 없다.’(사목헌장 78항)고 천명한다. 군사력의 증강을 통해 한반도의 위기가 진정되고, 평화가 오리라는 기대는 버려야 한다. 평화는 인간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하며, 정의와 사랑에 기초한 질서의 확립을 통해 이룩된다.”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민족화해위원회와 정의평화위원회가 7월 15일 발표한 담화문 내용이다. 정부에서는 북한의 미사일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고고도미사일 방어체계가 필요하다고 역설하지만, 이미 국방부에서 수도권 방어체계는 별도로 고민하고 있다고 실토할 정도로 사드는 ‘국가안보’를 위해서 실효성이 없다는 게 공론이다. 사실상 중국과 러시아를 견제하는 미일방어체계에 한반도에 편입되어, 불필요한 전쟁 가능성이 커졌다는 염려가 확산되고 있다.

히틀러가 1933년 독일 수상이 되었을 때 독일의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년) 목사는 평화를 강조하며 군비증강에 반대했다. 당시 본회퍼는 “스스로 신성화되는 지도자와 직위는 신을 조롱하는 것”이라면서 히틀러를 우상화하는 나치정권에 저항했다. 본회퍼는 히틀러가 평화와 안전보장을 혼동하고 있다고 말했는데, 안보는 다른 나라에 대한 불신을 조장하고, 불신은 전쟁을 불러온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토머스 머튼이 “전쟁의 뿌리는 두려움”이라고 말한 것과 비슷하다. 그 두려움이 안보를 강조하고, 결국 무기증강은 전쟁으로 치닫게 한다. 한편 본회퍼는 평화란 “신앙과 순종 안에서 모든 것을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히틀러가 1933년 국제연맹을 탈퇴하고 군비재무장을 서둘렀을 때 본회퍼는 이렇게 호소했다. “시간이 급박하다. 세계는 무기를 가지고 노려보고 있으며, 모든 사람들이 무섭게 불신의 눈초리로 바라보고 있다. 내일 아침 전쟁의 나팔소리가 들릴 수 있다.” 그후 7개월 만에 히틀러는 국민개병제를 선포했으며, 그로부터 5년 뒤인 1939년 9월 1일 독일은 폴란드를 침공했다. 이렇게 시작된 제2차 세계대전으로 수천 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고, 600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당했다.

당시 독일 교회의 많은 목사들과 신자들은 ‘민족도 하나, 하느님도 하나, 신앙도 하나’라는 구호아래 국가권력의 영향력 안으로 쓸려들어갔다. 이른바 어용교회로 가는 ‘독일 그리스도인’운동은 “히틀러의 국가는 교회를 부르고 있다. 교회는 이 부름을 듣지 않으면 안 된다”는 표어아래 전국대회를 열었다.

히틀러는 1934년 총통이 된 뒤로 목사들에게 다음과 같은 충성서약을 받았다. “나는 전지전능하시고 거룩하신 하느님께 독일교회에 속한 목사로서 독일 민족과 국가의 총통인 아돌프 히틀러에게 충성을 바치며, 독일민족을 위하여 희생과 봉사를 아끼지 않을 것을 선언한다.” 한국 개신교의 조찬기도회를 연상시키는 대목이다. 뉴라이트 소속 목사들과 어버이연합 같은 류의 애국주의에 사로잡힌 맹목적 신앙이다.

그러나 모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어용교회에 동조한 것은 아니었다. 그해에 나치에 저항하는 목사 7천 명이 모여 ‘목사긴급동맹’을 결성하고 고백교회운동을 전개했다. 이들은 나치에 의해 체포, 감금, 파면, 교회당 몰수, 그리고 처형을 당했지만 자신들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이 순교자들 가운데 하나가 본회퍼다. 본회퍼는 라인홀드 니부어 교수를 통해 미국 뉴욕의 유니언신학교에서 교수가 될 수도 있었지만, 조국을 떠나지 않고 고통 받는 백성들과 함께 남아 있었다.

전쟁이 터지자, 본회퍼는 나치에 반대하는 비밀조직에 가담했다. 본회퍼와 함께 활동했던 도나니는 가톨릭신부 J. 뮐러를 통하여 교황청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휴전 가능성을 타진했다. 영국과 프랑스군이 휴전에 동의하면 독일국방군이 국내에서 히틀러를 제거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저항운동에 협력하던 스위스 상인 슈미트 부바가 배신하면서 1943년 4월 5일 도나니, 본회퍼, 뮐러 새 사람은 나치에 체포되었다.

본회퍼 목사

본회퍼는 1945년 4월 9일 처형될 때까지 강제수용소를 옮겨다니며 감옥에서 글을 썼는데, 이게 바로 훗날 <반항과 복종>으로 출판된 옥중서간이다. 그는 감옥에서 ‘오히려 친밀하게’ 가까이 계시는 하느님을 발견하였다. “인간은 곤궁 속에서, 그 안에 머무시는 하느님께로 가야한다. 이곳에서 우리는 가난하고 욕을 보고 몸 둘 곳 없고 먹을 것 없는 하느님을 발견한다. 죄와 약함과 죽음에 삼켜진 하느님을 본다. 그리스도인은 고난 속에 있는 하느님과 함께 있다. 하느님은 곤궁 속에 있는 모든 인간을 찾아오신다. 육신과 영혼을 그의 빵으로 배불리고,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을 위하여 십자가의 죽음을 죽고, 하느님은 그들을 모두 용서하신다.”

본회퍼는 마하트마 간디의 영향을 깊이 받았기에, ‘원칙적으로’ 비폭력주의자였다. 그러나 독일에서 나치가 자행한 유대인 학살, 군국주의, 국수주의가 인간 존엄성을 사정없이 유린하는 것을 목격하면서 더 이상 원칙적 평화주의에 머물 수 없었다. 하느님의 평화는 ‘오늘 여기 우리 사이에서’ 하루속히 이루어져야 했기 때문이다. 어서 빨리 하느님의 자비와 복음이 참혹한 이 세계 안으로 들어와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본회퍼는 직접적 정치행동에 나서기 시작했고, 급기야 히틀러 암살음모에 가담하기도 했다.

본회퍼에게 “히틀러는 곧 전쟁”을 뜻했고, 전쟁은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악마적 도전이었다. 결국 본회퍼는 저항권을 선택했다. 저항권이란 “국가의 주권자인 국민이 민주주의와 기본권을 수호하기 위하여 공권력에 저항할 수 있는 비상한 권리”를 말한다. 중세 가톨릭교회에서도 자연법에 근거해 저항권을 인정해 왔으며, 토머스 아퀴나스도 장기적인 폭정이 계속되는 한계상황에서는 폭군 살해가 정당하다고 말했다. 본회퍼는 “바퀴아래 깔린 희생자에게 붕대를 감아줄 뿐 아니라 바퀴 자체를 멈추게 하는 것”이 교회의 정치적 책임이라고 말했다.

“만일 미친 사람이 대로에서 자동차를 몰고 간다면 나는 목사이기 때문에 그 차에 희생된 사람들의 장례식이나 치러주고 그 가족들을 위로나 하는 것으로 만족하겠는가? 만일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달려가는 자동차에 뛰어올라 그 미친 사람에게서 핸들을 빼앗아야 하지 않겠는가?”

본회퍼는 참된 교회는 ‘타자를 위한 교회’라고 보았다. 평화를 위해 일하는 교회야말로 하느님의 교회다. 본회퍼는 나치에게 박해받는 유대인들을 위하여 소리치는 자만이 그레고리오 성가를 부를 자격이 있다고 믿었다.

정부와 많은 언론매체들이 사드문제를 단지 ‘성주군민’만의 문제로 제한하려고 한다. 사드배치에 반대하는 다른 사람들은 이른바 ‘외부세력’으로 취급한다. 그러나 사드 문제는 한반도 전체의 존망과 상관있는 문제이기에, 박근혜 대통령이 사드 배치를 문제 삼는 것을 ‘정쟁’으로 부르는 것만은 천만부당하다. 설령 사드 문제가 사드가 배치될 성주군에 한정된 문제라 해도, 성주 군민들이 대한민국 국민의 일부라는 생각만 해도 그 문제는 우리 모두의 문제다. 더구나 불신과 증오에 기반한 전쟁보다 ‘형제애’를 강조하는 교회라면, 당연히 이 문제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저항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올리는 ‘평화를 위한 기도’가 울림이 있을 것이다.   

*<의정부주보> 7월 24일자에 실린 글을 수정보완한 글입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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