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더호프 공동체에서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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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더호프 공동체에서 배운다
  • 이원영
  • 승인 2021.07.18 18: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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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나요?”
“다른 사람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 수 있죠?”
"인생에서 중요한 건 뭔가요?”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요?”

지구에 태어나 살아가면서 위의 질문을 던지며 고민하지 않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질문은 하지만, 답을 찾기 위해 치열한 구도의 길을 걷는 이들은 드물다. 그냥 남들처럼 살다 생을 마감한다. 그렇게만 살아도 다행이지만 타인의 희생으로 자기를 만족시키는 거머리는 또 얼마나 많은가?

<부서진 사람>의 저자인 피터 맘슨은 그의 할아버지 요한 하인리히 아놀드(J. Heinrich Arnold)의 삶을 추적하며 위의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해 이 책을 썼다. 저자가 인생의 답을 찾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지혜롭다. 한때 나 역시 아름다운 삶을 산 이들의 삶을 평전이란 도구로 추적한 때가 있었고 길을 찾을 수 있었으니까.

 

브루더호프 공동체, 산상수훈을 따라 사는 삶

브루더호프(Bruderhof)란 이름의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정치, 경제적으로 혼란기에 있던 독일에서 하이너(하인리히 아놀드의 애칭)의 아버지 에버하르트 아놀드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대격변입니다. 모든 사회적 규범과 질서를 뒤엎고 재평가해야 합니다. ... 답은 바로 예수님의 가르침에 있습니다.”

에베하르트 아놀드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세상을 바로잡을 대격변, 혁명의 시작이라고 보았다. 그가 이해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무엇일까?

“에버하르트는 ‘완전히 새로운 삶’을 찾고 있었다. 그는 다른 무엇보다 구약에 나오는 유대 예언자들의 예언과 평화로운 왕국에 관한 비전에서 영감을 얻었다. ... 에버하르트에게 영감을 준 또 다른 예언자가 있었는데 바로 구스타프 란다우어였다. 무정부주의자, 평화주의자, 신비주의자이자 널리 읽히는 사회주의 저작의 저자로도 유명했던 그는 구약 예언자의 비전을 현실화할 때가 무르익었다고 믿었다. 란다우어는 새로운 사회의 출발점이 될 수 있도록 지방에 자급자족할 수 있는 정착촌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에버하르트는 먼저 성경이 지속적으로 말하고 있는 하느님 나라를 건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는 하느님 나라를 여기서 실현하는 자급자족하는 농촌 공동체를 설립하자는 것인데, 공동체 설립의 구체적 실천을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의 모습에서 보았다. 그래서 그는 아래와 같이 말한다.

“계층을 형성하는 근본 원인, 바로 사유 재산이 폐지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이웃이 우리와 같은 교육과 의료 혜택, 주택, 식량을 얻을 수 없는데 어떻게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따른다고 할 수 있단 말인가요? ... 우리는 오순절에 시작된 성령의 역사에 동참하고 싶습니다. 초대 예루살렘 신도들은 가진 것을 모두 나누었습니다. ‘그들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서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했습니다.’ 성령이 그들에게 부어지는 순간 누구도 사유 재산에 매달리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진실한 삶을 추구합니다. 가장 단순한 일이 실용적일 뿐 아니라 예술적 경험이 되는 삶, 지성주의와 그 함정에서 자유로운 삶, 새로운 인류 곧 참된 것을 창의적으로 드러내는 사람을 길러내는 그런 삶을 꿈꿉니다. ...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이론이나 이상적인 목표, 예언자와 지도자가 아닙니다. 우리에겐 형제애와 자매애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정의와 용서, 일치의 삶이 오늘날에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줘야 합니다.”

예수님를 따르기로 결심한 신앙공동체는 위와 같은 삶의 형태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오늘날 교회는 왜 이런 모습을 찾기 힘들까? 예수님를 따르는 삶보다 제 한 몸의 안녕과 영생복락을 추구하는 출석교인만 배출했기 때문이다. 에버하르트가 한국에 있다면 오늘날에도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저는 현존하는 교회 제도에 전쟁을 선포합니다.”

공동체는 어떤 어려움을 겪었는가

후세들이 기억하는 선각자들의 삶은 아름답다. 하지만 선각자가 살았던 삶의 현장은 고통으로 얼룩져 있다.

(1) 경제적 어려움

“하늘의 새들을 눈여겨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는다. 그러나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것들을 먹여 주신다. 너희는 그것들보다 더 귀하지 않으냐?”(마태 6,26)

에버하르트는 예수님의 말씀을 철저히 신뢰했다. 하지만 공동체가 시작된 3년, 공동체는 활기차게 돌아갔지만 멤버들의 생계는 어려웠다.

“영적인 삶뿐 아니라 물질적인 삶에 이르지 못하는 믿음은 쓸모없는 믿음입니다.”

하지만 멤버들의 생각은 달랐다.

“우리 보고 믿음으로 살라고? 재정적인 지원, 안정적인 운영 자금을 마련할 수 있는 철저한 계획을 세우라고. 예수님이 어쩌고저쩌고 떠들기만 하면 뭐해? 현실을 생각해야지, 현실을!”

(2) 시대적 어려움, 정치적 음모와 오해

“더 이상 나치의 국가사회주의에 거스르는 가치를 말과 글로 선전하는 공동체가 독일에 존재해선 안 됩니다. 하지만 브루더호프는 처음부터 사유재산을 부정하고 인종차별에 관한 법과 집총을 거부했습니다.”

히틀러가 집권한 나치 독일이 브루더호프에 내린 평가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산 결과 세상은 그들을 그렇게 평가하고, 그들에게 고통을 줬다. 하지만 고통 중에 그들은 예수의 가르침에 더 붙잡혔다.

“가장 위대한 일은 이런 상황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으로 원수를 사랑하고 교회 지체들을 절망과 파멸로 몰아넣는 자들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무릎을 꿇고 찬송을 부르며 손을 모으고 십자가에 관해 아무리 많은 얘기를 한다 해도 십자가를 짊어지신 예수님의 길을 마지막까지, 목숨이 끊길 때까지 따라갈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이것만이 진정한 제자도입니다. 다른 것은 다 기만이요 위선입니다.”

오해와 정치적 음모 속에서 그들은 믿음을 지키기 위해 독일을 떠나 영국으로, 영국에서는 독일 스파이란 의심을 피해 파라과이로 거주지를 옮기게 되었다.

(3) 공동체 내부 문제

“우리 중 누구도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해선 안 됩니다. 오히려 사랑으로 서로를 섬겨야 합니다. 대중이 소위 위대한 지도자를 따르듯 인간을 좇을 때 안 좋은 결과를 맺는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 경험했습니다. 이런 태도를 버려야 합니다. 어떤 이에게 책임을 맡길 때 그 사람을 위대한 지도자로 바라보지 맙시다. 그보다 그 사람 안에 있는 하느님의 불꽃에 집중합시다. 모든 게 서로 용서하는 일에 달려 있습니다.”

에버하르트 하이너가 공동체의 지도자를 세우면서 한 말이다. 공동체 안에서 이 말이 지켜질 때 공동체는 하나가 되지만 그렇지 않을 때 공동체는 분열된다.

“연이어 벌어진 모임에서 에버하르트는 한스와 그의 조력자들을 꾸짖었다. ‘여러분들은 공무원처럼 행세했습니다. 우리가 위에서 군림하는 관료제를 만들려고 공동체로 사는 겁니까?’ 에버하르트는 1년 동안 모든 공식 직함을 없애자고 제안했다. ‘참된 지도력의 개념이 오염됐습니다. 우리에게 고정 관직이 아니라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섬김만 있을 뿐입니다. 지금까지 여러분은 저를 공동체의 장로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장로라는 이름이 직함으로 생각된다면 저는 내려놓겠습니다. 여러분이 장로를 사회적 계급으로 본다면 저는 사탄의 일로 생각하고 그 이름을 버리겠습니다.”

이런 비판은 한국교회가 아프게 받아들여야 할 대목이다. 신앙공동체를 위협하는 두 가지는 관료적 조직의 구성과 이에 따른 위계질서다. 이렇게 조직과 위계로 공동체를 운영하려는 것은 발전과 성장이란 이름 아래 자행되는 인위적 비전과 효율성이다. 한스와 그를 추종하는 무리의 문제는 에버하르트가 사망한 뒤 파라과이에서 같은 문제로 불거졌고, 그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을 공동체에서 배제하고 압박했다.

“청천벽력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수십 년 동안 지속된 갈등이 수면 위로 떠오른 것에 불과했다. 한편에는 공동체를 시작했던 사람들의 비전이 있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처럼 서로 사랑하고 섬기며 예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삶이었다. 다른 한편에는 지난 20년 동안 프리마베라를 이끈 비전이 존재했다. 유능한 사람이 이끄는 외형적으로 성공하고 잘 굴러가는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었다.”

“우리는 공동체 전문가였지만 서로를 학대했습니다. 공동체주의가 그리스도를 몰아낸 것입니다. ... 이 모든 게 나사렛 예수님의 가르침과 아무 상관이 없고, 이들이 하는 건 너무 부드러운 표현입니다. ... 그러나 가장 끔찍한 건 이 모든 일이 형제애라는 이름으로 자행됐다는 사실입니다.”

 

공동체의 상처를 치유하려면

외부의 공격은 오히려 공동체가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 정체성을 확인하고 구성원들을 하나로 묶는다. 하지만 공동체를 위기에 빠지게 했던 첫 번째 시련이 경제적인 문제라는 점이 알려주는 바가 크다. 경제적 어려움을 걱정하는 이면에는 하느님 나라보다 물질주의가 더 팽배하고 있다는 증거다.

브루더호프 공동체를 오랫동안 괴롭힌 내부 문제도 어떻게 보면 물질주의와 관련이 있다. 능력주의, 탁월성, 전문가를 강조하는 전체주의적 공동체는 지도자 중심의 위계와 권력을 만들고, 소수의 권력자가 선택한 비전에 따라 공동체 구성원이 공동체를 위한 도구로 전락하기 때문이다. 훗날 하이너는 이런 말을 남겼다.

“진정한 리더십은 섬김입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을 조종하려고 리더십을 사용하는 건 끔찍한 일입니다. 특히 형제자매들이 신뢰하고 열린 마음으로, 자발적으로 헌신하는 공동체에서 그처럼 지위를 남용하는 건 사악한 행위입니다. 독재 정권 아래에서 사람들은 속으로는 악이라고 거부하면서도 폭정에 굴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서로 신뢰하는 신자들의 공동체에서 사리사욕을 채우려 리더십을 오용하는 건 영혼의 살인입니다.”

에버하르트가 50세 생일을 맞아 공동체 앞에서 이런 말을 했다.

“제가 꼭 전하고 싶은 또 다른 주제는 인간의 무력함입니다. 어떠한 일이 맡겨졌을지라도 사람은 무력합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능력을 지니십니다. 심지어 지금 맡은 일을 감당하기에도 우리는 그저 무력할 뿐입니다. 우리는 공동체에 단 하나의 벽돌도 끼어 넣을 수 없습니다. 공동체가 세워져도 지킬 능력이 우리에겐 없습니다. 우리의 힘만으로는 하느님 나라를 위해 헌신할 수 없습니다.”

초기 브루더호프 공동체가 겪은 위기는 정체성과 생활규범의 문제였다면, 후기 브루더호프 공동체에 닥친 위기는 공동체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관계와 소통, 의사결정의 문제였다. 이런 두 가지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아래의 대안이 제시되었다.

첫 번째 치유책 : 일과의 조정

공동체가 성장하면서 일종의 질서가 필요하다는 사실만큼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었다. 곧 슈파호프는 시험 삼아 새로운 일과를 시도했다. 가족들은 집에서 아침 식사를 했고 점심과 저녁 식사 때만 공동 식당에 모였다. 예배나 사업과 관련한 모임은 주중 저녁 시간에 이뤄졌다. 회원이 되는 과정도 형식을 갖추게 되었다. 공동체에 합류하기 원하는 장기 손님은 먼저 수련 과정 혹은 분별의 시간을 거친다. 그 후 세례를 통해 평생 공동체의 삶에 헌신할 것을 약속한다.

두 번째 치유책 : 공동체 규율

1925년 에버하르트가 작성한 공동체 규율은 이러하다.

“사랑 외에는 어떠한 법도 없습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과 기쁨을 나누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다른 형제자매에 대해, 또한 그들의 개인적인 특성에 대해, 그들 앞에서든 그들이 없는 곳에서든 험담하거나 빗대어 이야기해서는 안 됩니다. 가족 사이에서도 그래서는 안 됩니다. 이런 침묵의 규율 없이는 어떠한 신뢰도, 공동체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직접 이야기하는 것이 유일한 길입니다. 이것은 어떤 사람의 연약함이 우리의 마음을 힘들게 할 때 그 사람에게 우리가 형제로서 마땅히 해야 할 자발적인 섬김입니다. 이러한 방법으로 신속히 화해하지 못할 때에만 두 사람 모두 신뢰할 수 있는 제삼자에게 찾아가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문제를 해결하면 우리는 더 깊고 높은 차원의 일치를 이룰 수 있습니다.”

치유를 넘어 하느님 나라를 이루려면

예수님 앞에서 한 사람의 제자로 살아가든 눈으로 볼 수 있는 하느님 나라를 이루는 공동체로 살아가든 여러 가지 문제로 혼란을 겪기 마련이다. 이런 어려움을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에버하르트가 하이너에게 한 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감정에 기초해서 살 수는 없는 법이다. 어떨 때는 바라는 만큼 감정이 따라오지 않을 수도 있어. 하지만 그럴 때조차도 계속 가야한다. 네가 받은 소명에 묵묵히 순종하면서 말이다. ...

하이너, 초심으로 돌아가라. 다시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말이다. 아늑한 결혼 생활이나 계획하면서 소시민적으로 살지 말고 중요한 문제를 먼저 생각해! 불의가 하늘에 사무치는 이 세상은 어떻게 될까? 나치 독일과 소비에트 러시아의 미래에 대해 생각해 봤니? 이런 상황에서 우리의 책임은 무엇이겠니? 네겐 건강한 몸과 영혼이 있어. 재능도 있고 능력도 있어. 사용해라! 넌 우울함에 젖어서 산송장처럼 살고 있어.

성공이 뭐 그렇게 중요하니? 하느님 앞에 훈장이라도 달고 가려고? 넌 네가 충분히 잘하고 있지 못하다고 생각하지. 그리고 죄책감의 원인을 찾으려고 너 자신을 분석해. 하느님에게 동정심을 유발하려면 더 겸손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인데, 그건 자기중심적인 생각이야! 창조주를 네 짐꾼처럼 대하는 거라고! ... 저 아래 사는 사람들을 생각해 본 적이 있니? 사랑과 고통과 죄로 얼룩진 삶을 말이다. 저 사람들이 마땅히 발견해야 할 인생의 의미는 무엇일까? 이 땅에 하느님의 통치가 시작돼서 저 계곡 아래 집들이 빛으로 가득 찰 날은 어떤 모습일까? 이런 질문들로 고민하며 씨름한 적이 있니?”

오늘의 과제

그럼 이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나?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얻기 위해 공동체에 대한 에버하르트의 음성에 귀 기울여 보자.

“우리는 이곳에 집만 세우거나 사람들의 조직만을 확고히 하길 바라지 않습니다. 우리는 시온을 건설하고 ‘산 위에 있는 마을’을 세우기 바랍니다. 지금 같은 어둠의 시기, 세계적인 어려움과 절망의 시기에 이곳은 하나 됨을 보여주는 그림, 하느님의 영이 일하시어 어두운 세상에 횃불처럼 타올라 우리 시대가 가야할 곳을 보여주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공동체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 중요합니다.” 

 

*종이신문 <가톨릭일꾼> 2021년 여름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이원영 
노동이 기도요 기도가 노동인 삶을 추구하는
포천 사는 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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