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와 유리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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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유리천장
  • 김경집
  • 승인 2021.07.12 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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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오류

혼배미사 때 가장 흔히 인용되는 성경의 구절 가운데 “이야말로 내 뼈에서 나온 뼈요 내 살에서 나온 살이로구나! 남자에게서 나왔으니 여자라 불리리라.”(창세 2, 23)는 문장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지금이야 그렇게 강론하는 사제는 거의 없지만 예전에는 신부에게 일평생 신랑에게 순종하라고 훈계하는 말을 빠뜨리지 않았다. 어느 문화권에서나 남녀 차별이 엄존했다. 일반 문화에서는 시대의 변화에 따라 그 차별에 대한 인식과 반성을 통해 평등의 방식으로 회복하는 데 반해 종교에서는 경전의 엄격성과 무위성만을 강조하면서 시대의 변화를 무시하고 끄떡없이 그대로 존재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서 답답하다.

남녀의 차별만큼 오래 된 억압의 역사도 없다. 도대체 왜 남자의 우월성을 그토록 오랫동안 주장해 왔을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나는 그 핵심이 ‘근육의 차이’에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남자의 근육은 여자의 그것보다 ‘덩어리’가 훨씬 크다. 그래서 전쟁과 사냥 같은 강인한 체력이 필요한 일에 적합하다. 생존과 노동이라는 근본 문제를 남성이 수행하는 건 전적으로 근육의 차이 때문이다. 그런 근본적인 문제를 수행하니 권력을 자신들이 독점했을 뿐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게 인류 역사 내내 이어졌다.

현대 사회는 근육노동 의존도가 현저히 낮아졌다. 더 이상 남성의 근육 우월성은 무의미하다. 그런데도 여전히 여성에 대한 차별과 억압은 지속되고 있다. 그런 차별과 억압을 용인하는 건 사악하다. 완전한 양성평등이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페미니즘은 역사적 당위의 과정이다. 여성에 대한 폭력을 행사하는 어리석은 일부 남성들의 태도가 왜 사라지지 않는 것일까? ‘차이’와 ‘차별’은 분명 다르다. 그런데도 차이를 근거로 차별을 정당화하려는 모자란 남성들이 존재한다. 이른바 ‘마초’들만 그런 게 아니다. 심지어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남성들에게서도 그런 편향된 생각이 엿보인다. 사회학자 거더 러너(Gerda Lerner)는 “차이를 근거로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에 열등감을 주입하고 반복 학습함으로써 차별이 생겨난다.”고 지적했다. 그런데도 사회적 성(gender)차별을 생물학적 성(sex)의 차이를 빌미로 강요하는 것은 비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아직도 우리 사회와 교회에는 섹스와 젠더를 구별하지 못하는 시대착오적인 일들과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구약성경은 그 시대의 상황에 따라 혹은 시대에 맞춰진 방식으로 서술되거나 은유된 것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만약 지금 성경이 쓰였다면 과연 그런 서술과 정의(definition)이 가능이나 하고 가당키나 할 것인가? 모든 경전은 초시간적이고 초공간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는 그것을 읽는 사람들의 시대와 수준에 맞춰 이루어졌다는 점까지 부인할 수는 없다. 절대자는 절대적이지만 그 외의 것은 절대적이지 않을 수 있다는 기본적 유연성은 필요하다. 고대인들의 생활방식이나 문화에 따라 서술된 성경 내용을 21세기 현대에도 그대로 무비판적으로 따르는 게 능사가 아니다.(그렇다면 도대체 모세오경에서 금지한 돼지고기는 왜 먹는가?) 시대에 따라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게 아니라 하느님과 인간의 근원적 관계의 참된 의미를 파악하며 이해해야 한다. 그런데도 문자적 맹목성에 함몰된 종교적 태도는 어리석은 일이다.

 

마리아와 마르타

복음서에서, 마르타와 마리아 자매의 사례는 예수의 여성관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잘 알고 있는 것처럼, 이 자매들은 라자로의 누이들이다. 그녀들의 집에 예수가 찾아왔다. 으레 그랬던 것처럼 언니는 귀한 손님 대접하느라 부엌에서 바삐 움직였다. 그런데 마리아는 그런 언니는 본 체 만 체 예수의 발치에 앉아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게 아닌가? 참다못한 마르타는 마침내 예수께 달려갔다.

“주님, 제 동생이 저에게만 일을 떠맡기는데 이것을 보시고도 가만 두십니까? 마리아더러 저를 좀 거들어주라고 일러주십시오.”(루카 10,40)

어쩌면 일을 돕지 않는 동생 마리아보다 그런 동생을 두고 보는 예수가 더 야속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동생을 야단치지 않고 엉뚱하게(?) 예수께 푸념 섞인 요청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의 대답은 마르타의 뜻에 부합하지 않았다.

“마르타, 마르타, 너는 많은 일에 다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했다. 그것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루카 10,41-42)

매정한 대답이 아니다. 그것은 당신이 그 집에 머문, 더 확대하자면 당신이 세상에 온 이유를 역설적으로 재확인하는 것이다. 이 자매의 집에 들른 것은 단순히 휴식하고 음식을 대접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의 말씀으로 억압과 부당한 비인격적 태도를 지닌 당시 사람들이 그 굴레를 벗어나도록 하기 위한 것임을 상기시킨 것이다. 마리아는 그런 예수가 전하는 복음의 본질을 꿰뚫고 있었던 것이다. 여자라고 대접하는 일에 전념해야 한다는 마르타의 생각은 복음의 관점에서 본다면 전근대적인 사고일 뿐이다. 그러나 지금도 많은 교회공동체에서 여전히 여성들의 시중을 받으려는 태도가 관성처럼 이루어지고 있지 않은가! 멀리 볼 것도 없다. 한국 가톨릭교회의 각 본당에 ‘여자’ 사목회장이 몇 명 있는지 헤아려보라. 손가락이 남을 만큼 민망할 것이다.

가톨릭교회는 완고한 교계제도(hierarchy)의 틀 안에 있다. 그 교계제도는 사제 중심이다. 사제는 전적으로 남성의 독점물이다. 가톨릭교회도 시대의 변화를 무시하지 못한다. 그런데도 여전히 사제는 남성의 전유물이다. 성공회는 최근 여성 사제를 허용했다. 성공회가 여성 사제를 허용해서 붕괴했는가? 타락했는가? 안타깝게도 여전히 가톨릭교회는 적어도 이 문제만큼은 요지부동이다. 성직 수행은 오로지 남성만 할 수 있다는 것은 시대착오적이며 반복음적인 어리석은 생각이다. 처음에는 모든 새로운 미래가 낯설다. 서울대교구가 여성 복사(服事)를 공식적으로 허용한 게 1994년이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사실이다. 놀라운 일이다. 처음에는 여자 복사 때문에 분심이 들어 미사에 집중할 수 없다는 보수적인 신자들도 있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걸 시비하는 사람도, 그 때문에 미사에 집중할 수 없다고 불평하는 사람도 없어졌다. 처음에만 어색할 뿐이다. 익숙한 것이 능사가 아니다.

물론 1,000년 넘게 이어온 전통을 하루아침에 바꾸기는 쉽지 않겠지만 그것이 그릇된 것이라고 판단되면 과감하게 깨뜨려야 한다. 그게 복음의 당위다. 만약 남성 성직자 중심의 교회가 교회의 전통 때문이라고 한다면, 예수를 따르던 이전의 여성 제자들이나 초대 교회를 이끌던 여성 사도들의 모습은 뭐라 설명할 것이며, 예수가 여자들에 대한 태도의 변화를 촉구했던 것은 과연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사회에서는 성불평등이 허물어지고 있는데, 부끄럽게도 교회에서는 여전히 그 불평등이 엄존하는 걸 부끄러워해야 한다. 교회의 ‘유리천장’을 깨뜨려야 한다.

휴머니즘은 모두가 똑같은 하느님의 자녀라는 선언이다

“남자도 여자도 모두 인간이다. 남자와 여자는 완벽하게 하나다. 남자가 여자보다 더 우월하다는 주장은 뒤집으면 여자가 남자보다 우월하다는 주장과 상통한다. 인간은 남자와 여자로 태어날 뿐이다. 그들의 뿌리는 하나다.”

17세기 작가 마리 르 자르 구르네(Marie le Jars Gournay, 1565~ 1645년)가 1622년에 했던 말이다. 지금은 21세기다. 놀랍고 부끄럽지 않은가? 아직도 성불평등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입을 댄다는 것 자체가 부끄러운 일이다. 따지고 자시고 할 일이 아니다. 진짜 중요한 것은 몸의 근육이 아니라 정신의 근육, 마음의 근육이다. 더 이상 외면하고 질질 끌 일이 아니다.

페미니즘은 반남성주의도 아니고 전투의 선언도 아니며 휴머니즘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일찍이 예수는 그것을 몸소 실천하였다. 그 옛날 철옹성 같던 남성 주도의 시대에 이미 예수는 단호하게 맞서 싸웠다. 그런데 현대를 사는 우리는 어떤가? 그러고도 입으로 예수를 따른다고 넙죽대는가? 부끄러운 일이다. 우리가 예수의 삶에서 가장 따라 하기 쉬운 실천이 바로 남녀의 평등이다. 성평등을 남성의 권위와 독점적 권력을 박탈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방어적으로 움츠러들거나 과잉 대응하는 꼴통 짓은 버려야 한다. 교회가 그 모범은커녕 악습의 못자리가 되어서야 하겠는가. 여성 사목회장(이건 신자들의 생각만 바뀌어도 쉽게 실천할 수 있는 일이다), 여성 사제를 외면하는 교회에 무슨 미래가 있을까! 

* 이 글은 종이신문 <가톨릭일꾼> 2021년 여름호에 실린 것입니다.

 

김경집 바오로
인문학자
<눈먼 종교를 위한 인문학>, <생각을 걷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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