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구원이란 어떤 경험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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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에게 구원이란 어떤 경험인가요?
  • 이원영
  • 승인 2021.07.05 1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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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영 칼럼
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회당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랍비가 이야기를 시작했다.
“쌍둥이가 굴뚝을 청소했다. 굴뚝 청소한 후 한 명은 얼굴이 더럽고, 한 명은 얼굴이 깨끗했다. 둘 중에 누가 얼굴을 씻겠느냐?”

제자 중 한 사람이 ‘더러운 아이가 씻었습니다.’ 다른 제자가 ‘깨끗한 아이가 씻었습니다. 그 이유는 더러운 아이를 보고 자신도 더러울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옆에 있던 제자가 말했다. ‘둘 다 씻었습니다. 더러운 굴뚝을 청소하고 씻지 않을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마지막 제자가 말했다. ‘청소를 하고 난 후 너무 피곤했기 때문에 둘 다 씻지 않았습니다.’ 랍비는 제자들의 여러 가지 생각에 대해 놀라워하면서도 불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 이야기는 전제가 잘못되었다. 어떻게 좁은 굴뚝을 청소하면서 한 사람은 더럽고 한 사람은 깨끗할 수가 있느냐?”

언젠가 ‘내가 생각하는 천국과 지옥’이란 주제로 생각을 나눈 기독교 대안학교의 글을 보았다. 학생 대부분은 동화책에서 묘사한 것처럼 천국과 지옥에 대해 설명했다. 자신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에 대한 질문에 분명한 확신을 갖지 못한 대답을 했다. 그와 더불어 자신이 지옥에 갈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스스로 점쳤다.

그 후로 기독교 대안학교 중고등과정 학생들의 신앙에 대해 질문하면서 구원에 대한 확신이 있는지 물었을 때 ‘확신이 없다’는 응답에 우려하는 목소리를 들었다. 이런 대답은 공동체학교 학생들뿐만의 일일까?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성인들도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예상해 본다.

왜 구원의 확신이 없을까? ‘구원에 대한 확신이 있느냐’라고 질문하면 ‘죽으면 천국에 갈 수 있느냐’로 듣는다. 그와 함께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선행조건이 머릿속을 어지럽힌다. 죄를 짓지 않고 윤리적인 삶을 살아야 할 것 같다. 엄격한 잣대에 자신을 비춰보면 천국행 티켓은 물 건너 간 것 같고 그와 더불어 구원의 확신이 흔들린다.

우리는 이 때 질문해야 한다. ‘구원은 착한 행위로 얻는가?’라고 말이다.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은 ‘오직 믿음’으로란 슬로건으로 시작되었다.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착한 행실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아무리 거룩하고 착한 일을 한다고 해도 우리의 죄성은 지워지지 않는다. 그래서 행위보다 믿음이 중요하다.

믿음으로 구원 받아 가는 천국은 어디에 있는가? 천국(天國)은 하늘이란 특정 공간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따라 통치되는 하느님 나라를 말한다. 그렇다면 천국은 죽어서 가는 미래적 허상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는 지금, 여기에서 경험되는 현재적 실상이다. 살아서 천국을 경험하지 못하면 자신의 구원을 의심해도 좋겠다.

사실 종교개혁의 전통을 따르는 신앙공동체라면 ‘구원의 확신’을 질문하기보다 ‘삶 속에서 구원을 경험하고 있는냐’고 질문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구원의 확신이 있습니까?’라는 말은 신학적 전제가 잘못된 질문이다.

구원을 어떻게 경험할 수 있을까? 먼저 구원이란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사전에서는 ‘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돕거나 구하여 줌’으로 정의한다. 구원이란 단어는 교회 안에 갇힌 언어로 일상에서 거의 사용하지 않는지만 야구에서는 자주 사용한다. 구원투수다. 상대팀에게 더 이상 실점하지 않도록 마운드에 등판하는 투수다. 실점을 막고 승점을 지키면 진짜 구원투수, 말 그대로 경기에서 패할 위험에서 팀을 구한 구원투수가 된다.

그렇다면 기독교인들은 구원을 받았는가? 대부분 구원받은 경험을 나누라고 하면 생활 속 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졌을 때 교회에 나와 문제해결을 받았고 하느님의 살아계심과 구원의 확신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예를 들어 믿음을 갖고 교회에 출석하고 기도해서 불치병을 치유받고, 경제적 어려움 극복을 극복하고, 부부관계의 회복되었다고 한다. 외형적 삶의 변화로 구원받았다고 말한다. 그런데도 시간이 흐르고 생활이 변화되면서 회복된 육체로 방탕한 생활을 하고, 경제적 여유는 신앙생활보다 개인의 여가를 즐기는데 사용하고, 회복된 부부관계는 쇼윈도(show window)로 전락하곤 한다. 그들은 정말 구원받은 것일까?

헬렌 켈러는 자신의 자서전 ‘사흘만 볼 수 있다면’에서 구원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누구나 한 번쯤은 얼마 남지 않은 시한부 삶을 선고받은 주인공이 등장하는,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이야기를 읽어보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주인공이 살 수 있는 시간은 길어봐야 1년, 짧으면 겨우 하루 24시간 정도라 할까요. 독자들은 그러한 운명을 짊어진 사람이 자신의 마지막 날 또는 마지막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궁금해합니다.

(중략)

그런 이야기를 읽으며 우리는 내가 만약 그와 비슷한 상황에 처한다면 나는 어떻게 할 것인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살아 있는 존재로서 보내는 마지막 시간을 어떤 사건이나 경험, 관계들로 채워야 할까요? 과거를 돌이켜보았을 때 행복한 기억은 무엇이고 후회스러운 일은 또 무엇일까요?

(중략)

이야기 속의 주인공은 대부분 마지막 순간에 행운의 여신에게 구원을 받곤 하는데, 대개의 경우 구원은 가치관의 전환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삶의 의미와 그 영원한 정신적 가치를 더욱 깊이 이해하게 된다고나 할까요?

헬렌 켈러는 구원의 핵심을 ‘가치관의 전환’이라고 말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교회 안에서 간증의 형태로 이야기하는 구원은 ‘상황의 전환’이다. 건강이 회복되고, 경제적 상황이 좋아지고, 상대의 변화로 관계가 회복되는 상황은 구원이 아닌 신의 행운이며 뜻하지 않은 선물이다. 하지만 행운의 여신은 변덕스럽고 뜻하지 않은 선물은 빼앗기거나 잃어버리기 쉽다. 구원은 상황의 전환이 아닌 가치관의 전환이다.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의 눈이 바뀌면 건강이나 돈을 잃어도, 관계가 어려워도 극복할 힘이 내부에서 솟아오른다.

구원의 확신이 아닌 구원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어떤 가치관을 가져야 해야 할까? 하느님의 나라의 가치관이다. 로마서 14,17은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와 기쁨입니다."라고 했다. 성령 안 안에서 의로움(정의)을 구하면 함께 하는 이들과 평화를 누리고 그 결과 희락(기쁨)을 누리게 된다. 이걸 어찌 구원받은 삶이라 말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렇게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느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을 수 있다(로마서 14,18).

정의, 평화, 기쁨이란 하나님 나라의 속성은 개인이나 교회란 종교적 울타리를 넘어 사회를 변화시킨다. 신앙인들이 하느님을 믿는다면서도 현재적 구원 경험을 넘어 미래적 구원을 확신하지 못하는 이유는 각자의 삶 속에서 정의, 평화, 기쁨을 일구고 나누기보다 하느님의 전능성에 기대어 자기만의 세속적 욕망(돈, 명예, 권력)을 더 추구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진짜 구원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구원의 확신이 날마다 흔들리는 것이다.

 

이원영 
노동이 기도요 기도가 노동인 삶을 추구하는
포천 사는 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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