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을 이끌어주는 사부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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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이끌어주는 사부가 필요하다
  • 유형선
  • 승인 2021.07.05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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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이 필요한 시간-삶을 바꾸는 두 가지 만남, 사사와 사숙], 홍승완, 예문아카이브, 2021
사진출처=pixabay.com
사진출처=pixabay.com

‘스승’이란 말은 일상에서 쉽게 쓰진 않는다. ‘선생’이란 단어는 워낙 흔히 사용하고, ‘멘토’라는 외래어도 매스컴에서 많이 쓰지만, ‘스승’은 분명 격이 다르다. ‘스승’이란 말은 ‘영혼을 이끌어 주신 분’이라는 뜻이 짙게 배어있기 때문이리라.

‘스승’은 예나 지금이나 혼이 서린 말이다. 글을 찾아보니 ‘스승’이라는 말은 원래 ‘무당’이라는 뜻이었다. 지금도 함경도 방언 ‘스승’에서 ‘무당’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그리 놀랄 필요가 없다. 아주 먼 옛날엔 왕도 무당이었고, 의사(醫師)도 무당이었다. 무리를 이끄는 지도자 ‘스승’이라는 뜻이 시대에 따라 불교 사회에서는 ‘스님’을, 유교 사회에서는 ‘선생(선비)’을 부르는 말로 변했을 뿐이다.

농부철학자 윤구병 선생이 펴낸 <보리 국어사전>은 ‘스승’과 같은 말로 ‘사부’를 소개하는데, 지금도 가톨릭 수도자들은 수도원 창립자 혹은 영적 스승을 ‘사부’라고 부른다. 요컨대 ‘스승’이라는 명칭은 대자연의 섭리 혹은 진리를 깨우쳐 주신 특별한 분에게만 조심스럽게 쓰이고 있다.

인문학은 인간에 대해 캐묻고 탐험하는 학문이다. 당신은 한순간이라도 당신을 떠나서 살 수 있는가?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누구인가? 이런 질문에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내던지는 학문이 인문학이다. 이처럼 인문학의 시작이 질문이었다면 대답은 ‘남이 아닌 나로 살아가는 삶’이리라. ‘상처 받은 네가 곧 나였구나!’ 알아채고 공감하며 연대하는 삶이리라. 그러므로 인문학이 사라진 시대란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이 사라진 시대이다. 남과 다른 나만의 삶이 사라진 시대이며, 타인의 아픔에 함께 눈물 흘리는 공감과 연대가 사라져가는 시대라는 뜻이다.

스승의 어원이 ‘무당’이라고 했다. 무당은 신(이라는 말이 거북하다면 ‘무한한 대우주’ 정도로 여겨 보자)과 사람 사이에서 서로의 질문과 대답을 중개하는 사람이었다. 스승이란 말 속에 무당의 뜻이 숨어있음을 곰곰이 짚어보면, 스승은 제자를 대우주로 인도하는 존재라는 풀이가 가능하다. 스승을 만나려는 제자는 더 이상 갇혀 있는 존재가 아니다. 제자가 되고픈 존재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웅크렸던 등을 펴고 다리에 힘을 주고 일어나 얼굴을 들고 대우주와 눈을 한번 맞춰 보고픈 소망을 가진 존재다.

당신은 진심으로 대우주 앞에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싶은가? 대우주 앞에서 자신은 참으로 무지하고 불능한 존재일 뿐이다. 무지하고 불능한 자기 스스로를 알아챘을 때, 울음부터 터진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 수 없는 미지의 저곳에서 흘러오는 소리 없는 공명을 몇 번이나 분명히 느꼈기에, 더이상 이곳에 안주할 수 없었다. 무지하고 불능한 자신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데서, 이제 나는 알 수 없는 저 곳, 대우주를 향해 과감히 마음과 목숨과 정신을 내던지고픈 존재로 변화한다.

이제 나는 대우주로 나를 인도해 줄 ‘스승’을 찾아 나선다. 나는 이제 ‘제자’가 될 준비가 되었다. 물론 ‘스승’은 쉽게 만나지는 게 아니지만, 만나는 순간 서로를 알아보고 받아들이는 데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도 아니다. 때가 되었다면 인연이 맺어지는 시간은 찰나에 불과하다.

인류의 대가들은 한결같이 자신의 스승을 떠올리며 끝을 알 수 없는 분으로 기억한다. 그 말을 뒤집어 보면, 참된 스승은 제자에게 어쩜 그리 한결같이 대우주를 보여주었던 셈이다. 스승을 만나 수련을 시작한 제자는 스승의 가르침(사실은 대우주)을 하나씩 하나씩 인식하고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데에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안테나로 삼을 수밖에 없다. 그렇게 하여 제자는 대우주를 받아들이는 것 같지만 사실은 자기 자신만의 고유성과 독자성을 알아가는 과정을 수련하는 셈이다. 그러므로 제자가 자기 자신으로 다시 태어나는 길은 오로지 대우주를 보여주려는 스승과 만날 때만이 가능한 일이다.

홍승완 작가의 <스승이 필요한 시간>은 일단 두껍다. 사백 사십 쪽이다. ‘구본형(具本亨) 사부에게’라는 헌정 문구로 시작해 석박사 논문을 방불케 하는 방대한 주석과 참고문헌으로 마무리한다. 제목이 말해주듯, 이 책은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로 인간과 인간, 존재와 존재, 순수한 있음과 순수한 있음이 만나 서로 스며들어 마침내 서로의 꽃을 피워내는 과정을 면밀하게 관찰하고 기록하고 추슬러 낸 대하 다큐멘터리다.

스승에게 배우는 방법은 스승을 직접 만나서 배우는 사사(師事)와 스승의 책과 작품 등을 통해 마음을 본받는 사숙(私淑)이 있다. 이 책의 매력은 스티브 잡스, 구본형, 에리히 프롬, 정약용, 워런 버핏, 신영복, 데이비드 소로, 리처드 파인만, 김수근, 칼 융, 헤세, 카잔차키스, 법정 등 동서고금 여러 대가들의 성장 과정에서 사사와 사숙의 여정을 다각도로 포착하여 정밀하게 추적하며 종합한 데 있다.

작가는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한 번에 한 명씩 포착한 후 정밀하게 추적한 행로를 뒤따라가다 보면 그대도 분명 느끼리라. 작가는 수도자처럼 성실했다. 스스로 마음을 엄숙하게 삼가하겠다는 다짐을 담아 ‘심재’(心齋)라고 이름 붙인 서재에서 대가들의 글을 만났고, 글 속에서 그들의 영혼을 만났고, 다시 우주를 만났다. 대가들이 자신들의 인생에서 때론 제자로 때론 스승이 되어 변화하며 성장하는 모습을 밀착하여 지켜보며 경이로움과 황홀경에 심취하면서도, 성실하게 추적하여 정밀하게 기록했다. 절로 숙연해진다

책 말미에 홍승완 작가는 구본형 스승과 함께 찍은 사진을 실었다. 활짝 웃고 있는 스승과 달리 제자는 가지런히 두 손을 모은 채 수줍게 웃고 있다. 사진 아래 이렇게 적었다.

“존경이 그 사람처럼 되고 싶은 마음이라면 사랑은 그 사람이 되어보는 마음입니다. 이 책은 스승을 그리워하는 마음의 기록이자 뒤늦게 제출하는 졸업논문입니다. 나답게 내 길을 가겠다는 다짐이기도 합니다. 사랑과 존경을 담아 구본형 사부님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417쪽)

혼이 서린 책이다. 홍승완 작가의 <스승이 필요한 시간>은 혼신을 다해 질문을 던지고 답을 구하는 분들에게 권하는 책이다. 아직 자신의 혼이 살아있음을 느끼는 분들은 스승이 필요하거나 스승이 될 분들이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_____
구본형 스승도 제자 받아들이는 스타일이 레알 하드코어였다. 홍승완 작가를 처음 만나자고 했던 곳이 광화문 교보빌딩 앞 다섯 번째 나무였다나? 그날 북한산 산행을 하고서 하산 길에 목욕탕에 함께 가셨단다. 나무 아래서 처음 만나서 산을 거쳐 목욕탕에서 알몸 확인으로 마친 셈이다. 어쨌거나 작가는 “이 만남을 계기로 구본형은 나의 ‘사부’가 되었다.”(38쪽)고 적고 있다.

* 이 글은 <가톨릭일꾼> 2021년 여름호에 실린 글입니다.  

유형선 아오스딩
<가족에게 권하는 인문학>
<중1독서습관>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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