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시 데이 "그 시골사제가 살았던 마을은 우울한 마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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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시 데이 "그 시골사제가 살았던 마을은 우울한 마을이었다"
  • 로버트 콜스
  • 승인 2021.07.05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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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어떻게 할 것입니까?” 하고 도로시 데이가 물었다, “만일 무장한 미치광이가 당신과 아이, 어머니를 공격한다면?” 그는 「긴 외로움」에서 이 질문을 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 질문이 다른 많은 잊혀지지 않는 질문들을 얼마나 예리하게 이끌어내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이 질문을 얼마나 많이 들었는지 모릅니다,”하고 말하면서 그는 대답을 주었다: “물론 그를 제지해야 하지요, 그러나 죽이지는 말아야 합니다. 필요하다면 그를 감금해야지요. 그러나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내고 사랑은 증오를 이깁니다. 이 모든 말들이 평범하게 들리지만 경험은 결코 평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중에 누가 세상에 완전한 사랑을 제시할 수 있을까, 그리고 우리는 완전한 사랑이 증오를 극복한다는 것을 참으로 알고 있을까? 무장한 미치광이가 히틀러인 경우 우리는 어디까지 그를 억제해야 하는가? 

도로시 데이는 전기를 쓰면서 평화주의의 문제와 계속 씨름하고 있었고, 실제로 그 싸움을 결코 중지해 본적이 없었다. “그것은 나에게 슬픔이었어요,”하고 그는 선포했었다. “가톨릭일꾼들 대부분이 평화주의자들이 아니라는 사실이요. 그러나 또한 나는 우리들 사이에서 이런 태도들이 표현될 수 있어 좋다는 것도 알아요.” 그리고 나서 아주 짧고 날카로운 의견을 말했다: “우리는 상아탑 속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지요.”

 

그는 민주적이고 무장을 잘 갖춘 사회, 미국같은 사회가 가톨릭일꾼그룹이 있도록 해준 것이며, 반면에 나치 독일 같은 전체주의국가들을 성공적으로 물리치지 못했다면 가톨릭일꾼운동은 즉시 무너졌을 것이라는 논쟁을 알고 있었다. 평화주의, 그리고 아마도 가톨릭일꾼운동의 전체적인 운용방식에 관한 그의 궁극적인 입장은 국가정부에 대한 확고부동한 반대의 입장으로, 국가가 사회경제적 정의의 결정적인 도구가 아니라는 입장이었다. 이러한 입장은 어떤 확신이나 회의가 아니라 자기자신을 한결같이 용감하게 성찰하는 것에서 나온 입장이었다.

올바른 전쟁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는가? 토마스 성인이 그러한 전쟁에 관해 말한 조건들이 채워질 수 있는 것일까? 원자폭탄 사용의 도덕적인 근거는 무엇인가? 하느님은 우리가 무엇을 하기 원할까? 그리고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나는 국가와 교회에 반대하는 입장에 설 수 있을까? 세계가 지금까지 결코 볼 수 없었던 가장 거대한 독재자의 얼굴에다 내가 영적인 무기를 쓸 수 있는 영적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만심, 억측일까? 내가 고통을 견디고 순교를 직면할 수 있을까? 그것도 혼자서? 다시 한번 긴 외로움에 직면해야한다.

이런 질문들은 나머지 우리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사회의 기관들로부터 확신에 근거하여 독립적인 입장을 취하는 이유들을 충분히 가지고 있지만, 어떤 측면에서는 그 기관들로부터 떨어져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 던지는 질문들이다. 도로시 데이에게 이런 질문들에 대한 대답들은 매일의 행동속에 있다. 1973년 어느날 우리가 지역주의에 대해 말하고 있었을 때 그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우리는 결론적으로 지역주의에 관해 무엇을 해야 할지 정리할 수 없었어요. 실상 우리는 지역주의에 대해 글을 많이 쓰지도 않았어요. 우리는 삶에, 예수님께 그리고 그 분이 살기로 택했던 방식에 응답하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선택이 수십 세기 후에 살고있는 우리들에게 지금까지도 무엇인가 말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나는 우리들의 매일의 삶 속에서 하느님이 우리를 심판하시는 것이지, 문제들에 관해 우리가 취하는 입장에 대해, 우리가 서명하는 글, 합류하는 정치적 정당에 대해, 우리가 옹호하는 명분들에 대해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고 믿습니다. 아, 우리는 매달 신문을 만들어냅니다 ­ 우리는 옹호하고 비판합니다. 우리는 ‘예’하고 ‘아니오’를 말하지요. 그리고 비록 매번 실패하지만 겸손한 마음으로 ‘예’,‘아니오’를 하기 바랍니다. 자기독선은 우리 모두에게 낯선것이 아니니까요.

그러나 나는 우리 일의 핵심이 매일의 사목적인 책임감들이라고 믿습니다. 매일 스프를 만들고 나누어주는 것, 병원에 가야 한다는 것조차 알지 못하는 사람들, 혼동스러워서 병원에가지 못할 사람들을 병원에 데려가는 일들이 사목적인 책임이라고 믿습니다. 아침내내 채소를 다듬고 오후에는 어떤 사람을 의사에게 데려가는 주선을 하느라고 또한 그 사람과 함께 병원 외래 진찰의자에 앉아 시간을 다 보내고 난 후 저녁에 피곤하게 앉아서 삶을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의심하면서 보내는 날들도 있지요.

나는 젊은이들이 하는 말을 듣습니다, 받은 대학교육을 이용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혹은 인권 민권 그리고 가난한 이들에 대한 정의라는 더 큰 명분들을 갖고 싸워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말들입니다. 왜 안 그렇습니까? 물론 그래야지요, 우리는 모든 곳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말하고 있는 것이 추상적인 의미의 도덕이라면 말입니다. 그러나 매일의 시간은 정해져 있고 그래서 우리는 선택을 하고 결정을 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곳에서 우리는 그렇게 합니다. 이곳에 있기로 결정하고 에너지를 다 쏟아 넣는 것입니다. 이 구역에 말입니다.

이런 우리의 결정이 다른 이들의 결정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말입니까? 난 그렇치 않기를 바랍니다. 어떤 때 나는 걸어나가고 싶을 때가, 그저 걷고 또 걷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계속 이야기하고 논쟁하며 시위하고 행진했던 그린위치 빌리지 시절의 저녁들을 되돌아보는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저녁으로 돌아가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내가 그들과 단 오분도 견디지 못할 것임을 알면서도 말입니다.

내 의도를 잘 표현하고 있지 못하네요, 생각해보니 그 시절의 저녁에 나는 앉아서 듣곤 했었지요. 그리고 자주 나 자신에게 말하곤 했어요, 도로시, 사람들은 다른 기질들을 갖고 있고 너의 기질은 거실에서 지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을 오래 견딜 수 없으며, 정부기관 사무실에 혹은 아무리 네가 함께 하고 싶다해도 피켓 시위에도 오래 동안 함께 할 수 없다라고 말입니다.

나는 많은 유식한 사람들이 가서 ‘사람들’과 함께 있고 싶다고 말하는 것을 들었어요. 난 참 빈정대는 성질이 있어요, 나도 압니다. 내가 다른 사람들에 대해 방금 비판했던 그런 똑같은 죄를 나도 수 없이 자주 지었지요. 나는 ‘사람들’에 대해 말했었지만 그들의 세계로 가서 나누고 싶은 욕구가 없었어요. 그저 그들의 지도자가 되고 그들에게 무엇을 해야 하고 그들과 함께 그들을 위해서 그들에게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를 세상에 말하려는 욕구밖에 없었습니다. 친구들이 우리가 말하는 공동체의 의미를 알고 싶어할 때에 나는 공동체가 우리 모두에 관한 것이며, 서로 도우려고 노력하고 우리 중에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어디로 가고 무엇을 하고 왜 해야하는 가를 말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는 말을 멈추고 그의 책들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웃으며 모순을 알아차렸다. 그는 운동의 실천과 목표들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자신이 스스로 말하는 것보다 “더 높은 곳에 있는” 어떤 사람, 어떤 권위, 책들의 저자를 찾으려고 애썼던 것이다.

“나는 우리들이 소위 지도자들, 다른 사람들의 멀리 있는 권력에 보통의 평범한 사람들이 종속되어있는 관계를 깨뜨리려고 애써왔다는 것을 방금 당신에게 말했지요. 그런데 여기에서 나는 나 자신을 위해서 멀리 있는 권력을 갖고 있는 지도자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지금 여기에서 전능하신 분께 버금가는 어떤 기관에 우리를 맡기고 싶어합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특히 「카라마죠프 형제들」의 위대한 탐구자에 관한 장면에서 우리에게 계속 이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지역주의에 대해 아주 짤막하게 말해야 한다면, 난 정치적이고 영적인 속성을 지닌 이웃간의 정이라고 말하겠습니다.”

난 도로시 데이가 계속하기를 원한다고 생각했으나 그는 계속 할 수가 없었다. 대신 좋아하는 도스토예프스키 책들이 놓인 선반으로 가서 「카라마죠프 형제들」을 뽑아냈다. 그리고 전혀 어렵지 않게 원대한 탐구자의 장면을 찾았다.

그는 때때로 우리가 대화를 하는 도중에도 좋아하는 책의 구절들을 크게 읽었고, 나는 도스토예프스키가 세속 사람들에게 하는 도덕적 심리적 도전을 기뻐하는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에 큰 기대를 하곤 했다. 나는 그가 어떤 구절을 뽑을까 궁금해 하고 있었다. 그러나 10~15초 동안 몰두해서 살펴본 후 그는 갑자기 책을 닫았다. 그리고 나서 즉시 책을 다시 선반에 갖다 놓고서 책장 전체를 살펴보더니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비가 시끄럽게 퍼붓고 있었다.

그때까지 난 전혀 빗소리를 듣고있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 빗소리가 반갑지 않은 경쟁자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는 온통 빗소리를 듣는 것에 빠져있는 것 같았으며, 비의 끈질김에 대해 말하기도 했다. 나는 그의 마음이 앞에 있는 어려운 주제 때문에 “방황하고”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비 때문에 집없는 사람들, 이미 우울하고 슬퍼하는 사람들이 느끼고 있을 부담을 지적했다. 그는 자신이 비오는 날씨를 기뻐하며 그런 느낌을 가질 수 있어서 행운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런 행운이 어린 시절 덕분이라고 하면서 그와 오빠들 그리고 여동생이 어머니와 함께 비오는 오후에 과자를 먹었던 기억을 되살렸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그런 좋은 기억들을 갖고있지 않다고 나에게 (그리고 자신에게도) 상기시켰다.

 

도로시 데이는 내가 주제를 바꾸거나 그 날의 만남을 끝내고 싶어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그는 죠르쥬 베르나노스의 소설 「어떤 시골 신부의 일기」에 나오는 비에 관해서 말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난 늘 그 사제, 그 훌륭한 사제, 비를 견디고 있었던 그 사제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그가 살았던 마을은 우울한 마을이었습니다. 나는 시작하는 문장을 기억합니다, ‘내 본당은 다른 본당과 다를 바 없었다’. 그리고 나는 그 신부가 본당이 권태로움으로 가득차 있었다고 말하며 날씨에 대해 말하던 것을 기억합니다. 비가 퍼붓고 있었고 숨길 속에, 폐까지 스며들고 있었다고 묘사하던 신부를 기억하지요.

난 그 설명 때문에 그때가 ‘황량한 11월의 어느날’이었다고 상상도 했지요. 아마도 그건 내 생각이고 다른 사람의 생각은 아닐 겁니다. 그러나 나는 비가 오는 우울한 날씨가 그 본당신부의 삶에, 매일의 의무에 동반자였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이들은 그들 스스로가 날씨를 깨끗한 날씨로 바꿔 버립니다! 그들은 쓰고 말하고 그들 자신이 모든 문제를 없애버리고 모든 당황스러움들을 해결한다고 상상합니다. 그들은 앞으로 밝고 빛나는 미래가 올 것이며, 정신만 차리고 모든 말해지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쓰여진 모든 말을 읽으면 그런 밝은 미래를 맞을 것이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그러나 그 신부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가장 최고의 날씨도 임시적이라는 것을, 구름과 폭우가 곳곳에 숨어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어두운 그곳에 있기를 선택합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면서 말입니다. 이것이 참다운 실제입니다. 주님께서 써야할 책과 인도해야 할 제국 대신 사명을 선택하실 때 우리에게 말씀하신 실제입니다. “당신은 지역주의에 대해서 묻지요, 왜 지역주의입니까? 나는 우리 중 어떤 사람들에게 지역주의가 아닌 다른 모든 것은 낭비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것들은 실제가 아니고, 우리가 살기를 원하는 삶이 아닙니다. 그런 삶, 권력의 회랑에서 사는 것, 영향, 돈,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큰 결정을 하는 삶을 원하는 사람들은 너무도 많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따라갈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자칭 하인들, 노예들을 갖고 있습니다. 주님과 베르나노스의 그 신부의 길을 따르고 싶은 남녀들이 살 수 있는 작은 공간이 이 세계 속에, 우리의 문화 속에 없을까요? 주님의 길은 사제와 베르나노스 자신에게도 이 이야기를 쓸 때 영감을 주었다고 생각되지요. 그 길은 여기 이 공동체에 있는 우리들 모두에게도 너무나 많은 의미를 주고 있습니다.”

이런 대화가 그에게 힘을 준 것 같았다. 그의 얼굴에 다시 고요함이 떠올랐다. 그는 잠시 멈추었다가 진한 차를 마셨다. 나는 지역주의에 관해서, 지역주의정치에 관해서 계속 이야기하는 것을 주저하였다. 왜냐하면 토론 자체가 모순이 많기 때문이다. 즉, 토론에서는 지역주의에 관한 생각들이 지나치게 많이 나타나고, 사람들로 하여금 워싱톤에 가서 혹은 언론에서 지역주의에 관해서만 말하는 직업을 갖도록 유혹하는 등 지역주의 자체를 자주 위태롭게 만들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원출처] <Dorothy Day, a Radical Devotion>, Robert Coles, 1987
[번역문 출처] <도로시 데이, 뿌리로부터 온전히 살다>(<참사람되어>2002, 7월호)

 

로버트 콜스(Robert Coles)

하버드 의과대학의 정신의학과 및 사회윤리학과 명예교수. 청소년 문제 상담 전문가로 활동해 왔으며, 50여 권이 넘는 책을 집필한 작가. 1973년 미국의 다양한 계층과 인종의 아이들을 직접 취재하고 분석한 <위기의 아이들>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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