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진짜 예수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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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진짜 예수쟁이?
  • 이원영
  • 승인 2021.06.28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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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영 칼럼

‘가장 저렴한 노동, 로숨의 로봇’, ‘신제품 열대지방용 로봇. 1개에 150달러’, ‘당신만의 로봇을 장만하세요!’, 생산비를 줄이고 싶으십니까? 로숨의 로봇을 주문하십시오!’

위의 내용은 카렐 차페크(Karel Čapek)의 희곡 <R.U.R.>(Rosuum's Universal Robots)의 첫 부분이다. 로봇의 어원은 체코어의 노동을 의미하는 단어 'robota'에서 나왔다고 알려지고 있다. 차페크는 <R.U.R.>에서 모든 작업능력에서 인간과 동등하거나 그 이상이면서 인간적 “감정”이나 “혼”을 가지지 않고 오직 노동력만 제공하는 인조인간, 로봇을 등장시키고 있다. 아이작 아시모프의 소설인 <I'Robot>을 보면 로봇의 행동에 관한 3가지 원칙이 나온다.

[제1법칙] 로봇은 인간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 되며, 위험에 처해 있는 인간을 방관해서도 안 된다.

[제2법칙] 로봇은 인간의 명령에 반드시 복종해야만 한다. 단, 제1법칙을 거스를 경우에는 제외다.

[제3법칙] 로봇은 자기 자신을 보호해야만 한다. 단, 제1법칙과 제2법칙을 거스를 경우는 예외다.

 

로봇은 인간과 같은 노동력을 제공하지만 생각하거나 감정을 표현하지 않고 주인을 해치지 않아야 한다. 인간과 같지만 인간이 아닌 로봇은 현대과학기술의 혁명인가? 아니면 인간사회의 산물인가?

고대사회로부터 근대문명까지 인간의 모습을 갖고 있지만 노동력만 제공할 뿐 사회 안에서 인간으로 대접을 받지 못하고 물건처럼 이용되는 이들이 있었다. 바로 노예다. 노예 역시 노동력을 제공하지만 자신의 생각과 감정 없이 주인을 해치거나 반항하면 안 되기에 오늘날의 로봇과 다르지 않다. 이런 측면에서 로봇은 과학기술에 의해 만들어진 인조인간이 아닌 인간사회의 산물이며 기계문명의 노예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오늘 한국사회에서 인간이 가진 생각과 감정을 억압한 채 노동력만 강요당하는 이들이 있다. 노동시간과 노동강도, 그리고 위험 가능성에 따라 계산된 적정한 임금의 가치를 생각하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하라고 내몰리다 죽는 이들이 있다. 인간이지만 인간으로 대우받지 못하고 로봇처럼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노동자다.

지난 4월 평택항에서 작업 중 숨진 청년 노동자 고(故) 이선호씨(23)의 장례가 6월 19일(토) 시민장으로 치러졌다. 이선호씨는 앞서 지난 4월 22일 평택항에서 작업하던 중 300㎏ 무게의 컨테이너 날개에 깔려 사망했다. 사고 당시 현장에서 안전을 위해 요구했던 노동자의 생각은 철저히 무시되었다.

2018년 12월 11일,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컨베이어벨트를 점검하던 비정규직 노동자 김용균씨가 기계에 끼어 목숨을 잃었다. 사망한 지 4~5시간이 지나서야 발견이 됐다. 김용균님은 25세 하청노동자로, 사망하기 불과 며칠 전 ‘비정규직 100인 기자회견’에서 사용할 피켓 사진을 찍었었다. 피켓의 내용은 ‘노동악법, 비정규직 철폐’였다. 당해 노조는 이미 오래 전부터 2인 1조 근무를 요구해 왔다. 하지만 노동자의 표현과 생각은 부정당했다.

 

이들의 생각과 요구는 왜 부정당해야 했을까? 자본가들은 노동법 대신 자본가가 생각하는 노동자의 윤리를 암묵적으로 요구했을 것이다.

[제1법칙] 노동자는 인간 자본가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 되며, 위험에 처해 있는 인간 자본가를 방관해서도 안 된다.

[제2법칙] 노동자는 인간 자본가의 명령에 반드시 복종해야만 한다. 단, 제1법칙을 거스를 경우에는 제외다.

[제3법칙] 노동자는 자기 자신을 보호해야만 한다. 단, 제1법칙과 제2법칙을 거스를 경우는 예외다.

노동이 천시되고 노동자가 인간으로 대우받지 못하는 시대에 성경을 절대 진리로 믿는다는 예수쟁이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비신앙인들이 그리스도교인을 지칭하는 말 하나가 있다. ‘예수쟁이’다. 어감이 좋지 않다. 그리스도교인을 속되게 부르는 말이다. 긍정보다 부정의 의미가 가득 담겨있다. 왜 예수쟁이라고 부르고 불리게 되었을까?

‘-쟁이’의 사전적 의미는 아래와 같다.

(1) 사람의 성질이나 특성, 행동 등을 나타내는 일부 어근 뒤에 붙어, ‘그러한 특성을 가진 사람’의 뜻과 얕잡는 뜻을 더하여 명사를 만드는 말.

(2) 일부 명사 뒤에 붙어, ‘그것과 관련된 일을 업으로 삼는 사람’의 뜻과 얕잡는 뜻을 더하여 명사를 만드는 말.

멋내기 좋아하는 사람은 멋쟁이, 매사에 겁을 내며 주저하는 사람을 겁쟁이라고 하듯 교회에 다니는 어떤 전형적 특성이 있는 사람들을 예수쟁이라고 한다. 또 직업으로 글쓰는 사람은 글쟁이라고 부르듯 그리스도교에 종사하는 목사나 목사는 아니지만 목사처럼 행동하는 그리스도교인을 예수쟁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런 부류의 사람을 얕잡아 부르는 말이다.

그리스도교인의 전형적 특성은 무엇일까? 먼저, 일주일에 1회 이상 예배라는 모임에 참석한다. 두 번째로 식사 전에 기도를 한다. 세 번째로 신앙적 이유로 술, 담배를 하지 않고 술이 있는 모임이나 장소를 꺼린다. 네 번째로 성경을 인용하거나 그리스도교 특유의 언어를 사용하면서 말하고 친절하고 온순하게 행동한다.

그리스도교인들은 어떻게 행동하고 말하길래 사람들이 얕잡아 볼까? 첫 번째로 전도나 선교라는 이름으로 타인에게 그리스도교 신앙을 강요한다. 두 번째로 신앙이란 이름으로 타인의 행동을 판단하고 정죄한다. 세 번째로 앞에서는 그리스도교적인 단어를 사용하면서 말하고 친절한 것 같지만 뒤에서 구분짓고 특정인을 배제시킨다. 네 번째로 술, 담배는 안하지만 신앙과 성공을 버무려 타인과 경쟁한다. 다섯 번째로 교회 일이나 모임, 또는 목사에게 지나치게 충성한 나머지 주변사람을 돌보지 않는다.(기타 등등)

 

사진출처=pixabay.com

위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그리스도교인이라는 티를 내고 친절하고 온순한 것 같지만 위의 특성으로 주변사람들에게 좋은 평판을 받지 못해서 예수쟁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주일 예배당에 갈 때 옆구리에 끼는 성서는 노동자들의 고통에 어떤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는지 예수쟁이들은 알고 있는가?

"이제 이스라엘 자손들이 울부짖는 소리가 나에게 다다랐다. 나는 이집트인들이 그들을 억누르는 모습도 보았다. 내가 이제 너를 파라오에게 보낼 터이니,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어라. "(탈출 3:9-10)

이 말은 떨기나무 불꽃에 임하신 하느님이 그의 종 모세에게 한 말이다. 이스라엘 자손은 다른 말로 히브리인이라고 한다. 히브리인이라는 말의 기원에 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으며 여러 가지 의견이 있다. 우선 아브라함의 조상 가운데 하나인 ‘에베르’에서 유래했다는 추측이 있다. 다음으로 ‘저쪽에서 넘어 건너왔다’는 뜻의 ‘아바르’라는 히브리어 동사에서 나왔다고 보는 견해가 있는데, 이는 히브리인들이 유프라테스 강 또는 홍해를 넘어 건너온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또 당시 나라 없이 근동 지방을 떠돌며 주로 하층 계급을 형성하고 있던 사람들을 지칭하던 말인 ‘하피루’와 연결시켜 히브리인이라는 말이 그들에게서 나왔다고 추정하기도 한다.(신약성경 용어사전)

출애굽 당시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후손만 탈출하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이집트에서 강제노역에 동원된 노예, 이집트의 하층계급 ‘하피루’들이었다. 피라미드 계급사회의 산물인 노예, 오늘날의 로봇들이었다. 하나님은 이집트의 하피루의 신음소리를 들으셨고 해방시키기 원했다. 하느님은 당신의 뜻을 구현할 모세를 부르셨고 하피루 해방의 대리자로 임명하셨다.

그렇다면 성서 속 모세의 이야기와 오늘의 우리는 무슨 연관성을 갖고 있는가? 조셉 캠벨의 이야기를 잠깐 인용해 보자.

감히 소명에 응하여, 우리의 운명을 화해시켜야 하는 존재의 거처를 찾아내는 현대적 인간인 현대의 영웅은 자기가 속한 사회가 자만심과 공포와 자기 합리화된 탐욕과 신성의 이름으로 용서되는 오해의 허물을 스스로 벗어던지기를 기다릴 수도 없고, 기다려서도 안된다. 니체는 <그날이 도래한 듯이 살라>고 하고 있다. 아니 사회를 지키고 구원하여야 할 사람이 바로 창조적 영웅이다. 그리하여 우리 각자는그 영웅의 족속이 대승을 거두는 그 빛나는 순간이 아니라, 그가 개인적으로 절망을 느끼고 침묵을 지킬 때 그가 겪은 모진 시련(구세주의 십자가를 지는 일)을 나누어 부담하는 것이다.(천의 열굴을 가진 영웅 중에서)

캠벨에 의하면 우리 대면하는 영웅의 이야기, 성서의 위대한 지도자를 읽는 것은 우리를 향한 하느님의 부르심이라고 한다. 이런 이야기를 읽을 때 과거의 아픔이 오늘의 아픔과 교차하면서 바로 우리를 향해 기쁨으로 치환할 창조적 영웅이 되라는 소명을 듣는다. 그리고 혼자가 아닌 같은 생각으로 연대하라고 말한다.

그리스도교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 예수의 흔적을 뒤쫓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예수는 자기 삶의 목적을 이사야 말씀을 읽으며 이렇게 설명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
(루카 4,18-19)

가난한 이들을 자본의 노예로 만들고, 노동자를 로봇 취급하며 억누르는 한국사회에서 예수의 발자취를 따르는 이들이라면 이들이 한 인간으로 살아가도록 은혜의 해(희년)를 전파하고 구현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아파하는 이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사회를 바꾸는 모임이 교회요, 새로운 세상을 노래하고 행동하는 것이 기도고 예배이지 않을까? 이런 삶을 사는 이들이 진짜 예수쟁이가 아닐까?

 

이원영 
노동이 기도요 기도가 노동인 삶을 추구하는
포천 사는 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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