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전지대 벗어나 던져진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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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지대 벗어나 던져진 나
  • 정다빈
  • 승인 2021.06.28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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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다빈 칼럼
사진=정다빈
사진=정다빈

2년 전 이사를 하고 좋았던 점은 공항을 오가기 편하다는 것이었다. 아직 코로나19가 일상을 덮치기 전이었다. 한두 달에 한 번 공항으로 향하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늘 비슷했고, 길 위에서 느끼는 감정 또한 대개 반복됐다.

우울한 감정은 ‘짐을 꾸려야 하는데’ 생각만 하다 결국 침대에 누워버리는 출발 전날 밤에 최고조에 이르렀다. 아무리 반가운 얼굴들이 기다리고, 평소에 한 번쯤 가보고 싶었던 새로운 곳으로 향하는 발걸음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출발 전에는 늘 귀찮고, 번거롭고, 떠나고 싶지 않은 마음에 사로잡혔다. 보통은 급하게 꾸린 가방과 함께 낯선 환경에 오롯이 던져지고 나서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일단 한번 여정이 시작되면, 출발 전의 괴로움과 귀찮음과는 달리 감사와 기쁨의 마음이 일어난다. 아무리 고된 상황도 대개는 즐겁고 견딜만한 경험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코로나19 이전 마지막으로 떠난 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2019년 연말과 2020년 연시에 걸친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치앙마이로 떠나는 길, 내 상태와 기분은 최악이었다. 바쁜 한해가 끝나는 시점, 나는 이미 충분히 지쳐있었고 낯선 공간과 시간에 기꺼이 던져질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 하필이면 그때 참가했던 프로그램은 가장 낯설고 불편한 환경에 내던져지는 체험이었다. 나는 여전히 전통적인 생활 방식을 지키며 산 위에서 살아가는 미얀마 카렌 민족 마을에 들어가 나흘을 보냈다. 사람들은 친절하고 자연은 아름다웠지만 역시 많은 것이 불편했다.

먹고 마시고 자는 생활의 여러 부분에서 오는 불편함은 견딜만했다. 아무리 낯설고 불편하다 한들 겨우 며칠인 것을. 그러나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내 시간과 일정을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 주는 불안이었다. 호스트 가족이 챙겨주는 밥을 먹고, 산허리에 걸쳐 넓게 자리잡은 마을을 산책하는 것 외에 그 마을에서 내가 할 일도, 할 수 있는 일도 없었다. 일이 너무 많아서 힘들다고 불평해왔지만 정작 더 견딜 수 없는 것은 어떤 해야 할 일도 없는 상황이었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스스로를 견디는 것은 더 괴로웠다.

 

사진=정다빈
사진=정다빈

안전지대

이 시간이 언제 끝날지 유독 힘겹게 느껴졌던 어느 날 밤, 잠자리에 들기 전 내 눈에 들어온 글귀는 ‘안전지대’(comfort zone)를 벗어날 수 있도록 청하는 기도였다. 그리고 이 ‘안전지대’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왔다. 맥락에 따라 이 말은 익숙한 상황, 일상, 안락함, 편안함, 현실 등의 다양한 의미로 쓰일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일에 도전할 때, 불편과 어려움을 감수할 때 사람들은 자신의 ‘Comfort Zone’을 벗어나기 위해 도전한다고 말하곤 한다. 그러나 그 순간의 나에게 그 말의 의미는 무엇보다 스스로 설정해 놓은 틀 또는 모든 것을 통제하고 싶은 욕구를 뜻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돌아보면 막상 떠나면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새로운 상황에 적응하는 것을 어려워하는 성향의 사람이 아닌데도 낯선 환경으로의 여정이 부담되고 괴롭게 느껴진 것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에 던져지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아무리 바쁘고 아무리 몸이 힘들어도 내가 이해하고, 내가 고민하고, 내가 계획하는 대로 움직이는 상황이 나에게는 가장 안락했기에, 예측할 수 없고 내 의지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은 상황이 거북했던 것이다. 나에게는 내가 벗어나기 힘들어하는, 자꾸만 머무른 채 안주하고 싶어지는 내 마음 안의 안전지대가 어디인지 확인한 경험이었다.

고되고 시시하고 안락한 세상

예측할 수 없기에, 통제할 수 없다고 느끼기에, 두렵고 피하고 싶은 것은 사실 여행이나 출장만이 아니었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있던 시절, 존경하던 선생님은 나에게 “가난을 너무 두려워하지 마라.”고 이르셨다. 그때 나는 번듯한 직장을 구하기도, 자신의 재능으로 활개를 펴기도 어려운 분야를 공부했고, 먼저 졸업한 선배들의 삶도 고만고만 힘겨워보였다. 결국 나는 대학원 진학을 선택했는데, 어쩌면 예측할 수 없는 고단한 현실을 마주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결국 닥치고 마는 마감처럼 대학원에서도 떠나야 할 날은 다가왔고 충분히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냥 그래야만 했기 때문에 나는 세상 밖으로 던져졌다.

그렇게 마주한 세상은 생각보다 더 고되기도, 기대보다 시시하기도, 걱정보다 안락하기도 했다. 그러나 요즈음 들어오는 것은 정작 내 의지로, 내 힘으로 결정하고 추동하며 이끌어 온 것은 그다지 없었다는 생각이다. 내 삶의 많은 일이 어쩌다 일어났고, 대개는 내 의지와는 다른 방향이었다. 그리고 대체로 나는 불안과 두려움을 끌어안은 채 버티다 더는 버틸 수 없는 상황에서야 새로운 상황에 던져졌다. 그래서 나에게 “스스로가 정한 안전지대를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라는 기도는 새로운 도전에 임할 수 있는 용기를 청하는 기도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결코 안주할 수 없는 상황으로 던져주시기를 청하는 기도로 느껴진다.

 

사진=정다빈
사진=정다빈

순명이야말로 진정한 자유

내가 가장 안락하게 느끼는 순간은 스스로가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때이나, 실상 그 안락함은 착각에 불과하며, 내가 했다고 믿은 많은 것들은 그저 내게 주어진 것임을 깨닫자 나는 한 뼘 더 겸허해졌다. 내가 가진 많은 것들이 그저 나에게 주어진 것이듯, 내가 했다고 믿은 선택도 그저 내게 던져진 것이었으며, 스스로의 힘과 의지로 통제하고 있다고 믿은 많은 상황도 일종의 오만이었다. 그리고 이 오만 뒤에는 내 자신의 힘과 의지에 관한 지나친 믿음과 오직 내 중심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며 스스로를 확인하고 확인받고자 했던 욕망이 숨어있음을 고백한다.

돌아보면, 부모님과 고향을 떠나며 신앙에서도 멀어져 있다 훌쩍 자란 몸과 마음으로 다시 돌아온 나에게 유독 낯설게 느껴졌던 것은 스스로를 ‘종’이라 칭하는 교회의 언어들이었다. 내 자신이, 내 자아가 무엇보다 소중하고 강했던 나에게는 “나는 주님의 종이오니, 당신 뜻대로 하소서.”라고 청하는 기도를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나는 나인데, 내가 왜 종인가”라는 생각이 불쑥 들어왔기 때문이다. 몸과 마음으로 진심을 다해 “당신께서는 나의 주인이시고, 나는 당신의 종이며, 나를 당신 도구로 쓰소서.”라고 고백하게 되기까지는 제법 시간이 필요했다.

몇 년 전, 60년 간 수도생활을 한 할머니 수녀님 한 분을 인터뷰했다. 당신께서는 아직 이십대였던 나에게 “순명이야말로 진정한 자유”라고 일러주셨다. 수녀님의 주름진 얼굴은 기쁨과 평화로 반짝였지만 당신의 귀한 말은 아직 어떤 준비도 되어 있지 않던 젊고 미성숙한 마음에 가닿지 못한 채 튕겨져 나가고 말았다. 시간이 흐르며 어쩌다 보니 나는 계속 교회 안에서 일하고 공부하게 되었고, 수도자들의 삶을 가깝게 지켜보며 살게 되었다. 그리고 청빈, 정결, 순명의 수도 서약 가운데 가장 어렵고도 핵심적인 서약은 역시 ‘순명’임을 점점 더 깊이 느끼는 나날을 보내고 있다.

코로나19 대유행이 시작된 이후로 참 오랜만에 나는 다시 먼 길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여느 때처럼 이번에도 흔쾌한 마음은 아니다. 이런 시기에 먼 곳을 향하는 발걸음이 무겁고, 두렵고, 더 솔직하게는 귀찮다. 그러나 며칠 남지 않은 여정의 항공권을 다시 확인하며 나를 낯선 시간과 공간에 던져 넣는 손길을 느낀다. 그리고 기도한다. 이 여정 위에 나를 혹독하게 던져주시기를, 거짓 안락함을 벗어나 당신께서 베푸는 자유를 느끼도록 허락하시기를. 

 

* 이 글은 종이신문 <가톨릭일꾼> 2021년 여름호에 실렸습니다. 

정다빈 멜라니아
예수회 인권연구센터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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