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도의 응답, 피터 모린
상태바
내 기도의 응답, 피터 모린
  • 도로시 데이
  • 승인 2016.07.21 18:0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도로시 데이의 <빵과 물고기> -2: 모든 이의 신문-1

내가 <가톨릭일꾼> 신문을 내는 데에는 12월부터 다음해 5월까지 5개월이 걸렸다고 누군가가 말한 적이 있었다. 그 말도 사실이었다. 그렇게 늦어진 것은 주로 돈에 대한 낙관적인 피터의 태도 때문인데, 그는 웨스트 가에 있는 매우 호화스런 사제관을 가진 한 신부에게 의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피터의 그 성직자 친구는 우리에게 인쇄기와 종이 그리고 사제관 지하실의 공간을 주기로 했었다. 그런데 그것들 중 아무 것도 주어지지 않았으며, 그런 생각들은 그저 피터 혼자의 낙관적인 생각에 불과했었다.

그러나 그런 와중에서도 피터는 나를 교육시키고 있었다. 그가 말하길 나는 세속적인 교육을 받았기에 역사에 대한 가톨릭적인 이해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역사를 연구하는 한 가지 방법은 여러 세기동안에 걸쳐있는 성인들의 삶을 읽는 것이었다. 피터는 이 방법을 선택하였던 것 같은데, 그 이유는 내 개인 서가에서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 전기와 그녀의 저서들, 특히 영성적인 저서들과 시에나의 성 카타리나의 전기를 보았기 때문이었다. “아, 데레사는 자신이 살고 있었던 시대에 영향을 미친 성인이었지!”하고 피터가 외쳤다. 그 후 그는 14세기의 교종들과 다른 공직자들에게 보낸 성녀 카타리나의 편지들에 관한 토론으로 뛰어들었는데, 성녀 카타리나의 편지들은 이 공직자들의 실패를 문제 삼고 있었다.

내 기도의 응답으로 찾아온 피터 모린

내가 피터를 만났던 그 날은 내 마음 속에 선명한데, 그 날이 바로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녀 마리아의 축일인 12월 8일 다음날이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기아 해방을 위한 행진자들을 위해 기도하기 위해 워싱턴에 있는 가톨릭대학의 전국 성당을 방문했었다. 나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의 비참함과 가난한 이들의 고통에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으며 편안하게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보다는, 굶주린 이들과 비참한 이들과 실업자들의 편에 하느님이 더 계신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다. 나는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어떤 길이 내게 열리고, 가난한 이들 편에서 그들을 위해서 내가 일할 수 있도록 기도했으며, 그리하여 새롭게 발견한 신앙을 받아들이면서 내가 그들에게 거짓을 저지르고 있다고 더 이상 느끼지 않기를 기도하였다.

내가 깊이 확신하건대 피터 모린의 출현은 내 기도의 결과였다. 선하신 하느님께서 사자굴 속에 있는 다니엘을 추수할 일꾼으로 쓰기 위하여, 그에게 음식을 제공하도록 농부인 하바국을 쓰신 것처럼, 그 분은 그 분을 위해 일할 수 있도록 나를 강하게 해 줄 좋은 지적 음식을 주시기 위하여 피터 모린을 보내셨다.

나는 그가 나를 보기 위해서 어떻게 오게 됐는지 즉시 알았다. 그는 뉴욕시의 유명한 월간지이며 평신도들이 편집하는 <공공복지>을 방문했을 때 나에 관하여 들었다. 나에 관한 정보는 베테랑 언론가인 마이클 윌리암스에게 얻어들었는데, 그는 수년 전에 나의 아버지와 함께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같은 신문사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 피터는 또한 유니온 광장의 한 벤치에서 함께 대화에 빠져들었던 어떤 빨간 머리의 아일랜드 공산주의자에게서 나의 회개에 관한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 아일랜드 사람은 피터와 내가 비슷한 생각을 지니고 있다고 말했는데, 그 같은 생각이란 가톨릭교회가 우리 시대의 문제에 적용될 수 있는 사회적 가르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피터는 나를 찾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집요한 개인교사, 피터 모린과 크로포트킨

이제 그는 그의 프로그램을 제안할 수 있는 누군가를 얻게 되었다. 아마도 그는 전에도 여러 번 사회적 행동 모임들이나 미국 내 여러 지역의 공직자와 법원들을 방문하여 자신의 프로그램을 제시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아무 곳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 같다. 그의 초라한 모습과 강한 엑센트 때문에 사람들이 그의 말을 듣지 않으려 한 것 같았다.

피터가 특히 내 주의를 끈 <들판, 공장과 일터>라 불리는 크로포트킨 저서들의 요약본을 어느 날 내게 준 것은 아마도 나의 급진적인 배경 때문이었으리라. 그는 또, 랜드 사회과학학교에 가서 조심스럽게 이런 주제와 관련된 부분을 복사하였다. 그는 <상호협력>과 <빵의 정복>도 좋아하였다.

나는 다만 <한 혁명가의 기억>이란 그의 글을 통해서 크로포트킨과 친숙해 있었는데, 그는 원래 아틀란틱 월보에 그것을 시리즈로 냈었다.

피터는 매일같이 왔다. 그는 내게 읽을 책들과 가장 최근의 그의 글들을 가져왔다. 내 배움엔 끝이 없었다.

어느 날 나는 우연히 피터의 친구 신부의 교회에서 그를 만났다. 나는 그 곳에 기도하기 위하여 잠깐 갔었다. 몇 분 후에 나는 위를 보았다. 그리고 성체 앞에서 깊은 관상 속에 빠져있는 피터를 보았다. 그는 교회 안에 다른 누구의 현존도 전혀 의식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저 침묵 중에 거기에 앉아 있었다. 때때로 그는 그의 머리를 끄떡였으며, 너무도 조용히 성체 앞에 앉아서 마치 어떤 결론에 도달한 것처럼 손을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그를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또한 잠재의식 속에서 나는 아마도 그의 끊임없는 대화에 싫증이 났던 것 같았다. 그의 사상과 나에게 읽으라고 주었던 책들은 모두가 새로운 것이었으며 부담스러웠다. 너무나 많은 이론들이 있었다. 나는 크로포트킨이란 사람에 대해서, 그의 삶과 모험에 대하여 읽었다. 어떤 면에서 그것들은 내게 많은 것을 말해주었다. 나는 내가 더 알기를 원하는지 확실하지 못했다. 피터는 크로포트킨의 이론적인 작품들을 읽었다. 그가 붙잡았고, 또 내가 붙잡기를 희망했던 것은 이상적이며 추상적인 사상이었다.

테사와 나는 음악을 좋아했지만...

거기에 앉아서 지나간 주간들을 돌이켜 생각했을 때, 나는 피터가 남의 말을 듣는 것을 매우 힘들어한다는 사실에 직면해야 했다. 나는 콘서트나 교향곡을 듣기 위하여 라디오를 틀어놓고 피터에게 조용히 해 달라고 부탁했었다. 테사와 나는 음악을 좋아했으나 피터는 음악을 들을 귀가 없는 것 같았다. 그는 한동안은 우리의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나의 용납하지 않는 표정을 보고 양보를 얻어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곧바로 온순한 테사에게로 가버린다. 그리고 테사에게 가까이 의자를 끌어가서 그의 팔에 기댄 채 말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어쩔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도 우리는 점차 그를 좋아하게 되었고 그가 돌아왔을 때 따뜻하게 맞이하려 했으며 그가 하루에 한 끼만 먹는 것을 알면서도 음식을 내놓으며 먹으라고 하였다.

어쨌든 어떤 방문자에게도 말을 하려는 그의 의지는 우리에겐 은혜가 되었는데, 집안의 허드렛일로부터 우리를 해방시켜 주었던 것이다. 예를 들면, 나는 내 타이프가 있는 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고, 일을 할 수 있었다. 나는 특별히 한 방문자를 기억하는데, 그는 꽤 자주 왔었고, 키가 크고 육중하고 과묵하며 큰 갈색 눈을 지닌 조각가 휴라고 불렀다. 그는 플룻을 가져와선 피터가 그에게 말하는 동안 연주하곤 했었다.

그는 “당신이 정말 옳아요. 피터”라고,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면서 가끔씩 이렇게 말했었다. 그리고 나선 곧 단순한 곡조를 연주하곤 하였다. 어느 날 우리의 여자 친구가 방문하고 가버린 후에 그는 그녀가 그의 작업실에 와서 벽난로 옆에 나체로 앉아 있었다고 말하여 우리를 놀라게 했었다. 우리는 언젠가 그의 모델이 되어준 어떤 모델과 그녀가 닮았을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우리는 보통 10시나 11시에 방문객들이 돌아가도록 하였다. 우리는 그들과 편안하게 있었고, 또 그렇게 그들을 보내는 것이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따뜻한 밤이면 휴와 피터는 유니온 광장의 공원 벤치에 앉아 있으려고 나가곤 하였다. 거기에서 그들은 소위 그들 식의 대화를 계속하였는데, 휴는 그의 플룻을 불고 피터는 다음날 내게 교육할 과목을 미리 연습하는 것처럼 역사 토론과 낡고 새로운 생각들에 대해 분석하면서 온갖 손짓, 몸짓으로 열변을 토하곤 하였다.

실천하기 쉽지 않은 쉬운 글

침착하게도 테사는 그녀의 아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나는 내 직업을 계속해 나갔다. 밤마다 내 남동생과 나는 (그때 존은 낮에 일하고 있었다) 피터와 신문 만드는 일에 대하여 말하고 있었는데, 피터는 언론에 대해선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는 아이디어를 제공하였으며, 우리는 ‘거리의 사람들’을 위한 신문을 만들 것이었다.

내 정신과 마음은 내가 해야 할 일로 꽉 차 있었고, 그처럼 나는 자기중심적인 피조물이었다. 나는 조판과 인쇄를 계획하였는데, 내가 쓰려고 한 이야기들은 피터의 쉬운 글들에 관한 것이었다. 우리는 그의 글들을 신문에서 ‘쉬운 글들’이라고 이름 붙였는데, 그가 이 제목을 좋아하는지 않는지에 관하여 그의 의견을 묻는 것조차 하지 않았다. 피터는 그저 자신의 생각들이 인쇄된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좋아서 그 겉모양에 대해선 아무런 표현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그의 글의 제목이 ‘쉬운 글’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글들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복음서의 글들처럼 그의 글들은 말하기도, 일상 삶에서 실천하기도 어려웠다.

창간호 신문 만들기

수주일 후 신문 일에 대하여 확신한 다음, 당시 나의 좋은 영성 지도자이며, 한때 성바오로회의 관구장이었던 요셉 맥솔리 신부의 충고에 따라 성바오로 출판사에 갔다. 그리고 신문 2000부를 만드는 데에 비용이 57달러라는 말을 들었다.

나는 신문 창간호를 발행하기 전에, 현금이 내 손 안에 있을 때까지 기다리기로 결정하였다. 나는 무리해서 빚지길 원하지 않았다. 나는 어떤 할부도 하지 않았으며, 집세가 늦어져도 개의치 않았고, 창간호에 드는 비용을 지불하기에 충분한 돈을 저축하기 위해 식품비를 줄이지도 않았다. 맥솔리 신부는 내가 할 만한 일을 주선해주며 많이 도와주었다. 해롤드 퍼셀 신부가 나에게 10달러를 주었으며, 클래버 베드로 수녀는 누군가에게서 방금 기부받은 1달러를 주었다.

그 해 겨울에 피터는 뉴욕 북부에 있는 트렘퍼 산에서 돌아와서, 다음해 4월까지 시내에 머물고 있었다. 우리의 계획들은 구체화 되어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피터는 신문이 진행되고 있는 방식에 분명히 만족하지 않았다.

나는 인쇄업자에게 나의 사본들을 보냈는데, 그 안에는 남부 흑인들의 착취에 관한 소식들과 소작인들의 어려운 처지, 우리 이웃들 안에서 행해지는 어린이 노동, 몇 가지 최근의 강제 추방들, 임금과 노동시간에 관한 한 지방의 분규, 보다 나은 가정 구호를 위한 청원 등이 있었다. 우리는 인쇄소에서 교정본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교정본이 도착하자 우리는 그것들을 잘라서 편집하기 시작했는데, 국보판 타블로이드 사이즈 8쪽짜리로 만들어 표제를 쓰는 등, 여러 종류의 모양으로 시도해 보았다. 피터는 인쇄소에서 교정본이 왔을 때 내가 쓴 비용을 자세히 보았다. 나는 그가 만족하기는커녕 점점 더 혼란스러워 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느 날 몇몇 새로운 편집형태를 훑어보면서, 피터가 그의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의 그런 표현은 가장 슬플 때 하는 표현 중 하나였다.

“그건 모든 이의 신문이군요.”라며 피터가 말하였다. 나는 만족했다. 나는 그것이 우리 둘 모두 원했던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모든 이의 신문은 그 어떤 이의 신문도 아니지요.”라고 그는 탄식하며 덧붙였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일어서서 문밖으로 나가 버렸다. 우리는 간접적으로 그가 뉴욕 북부로 돌아갔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도 그에게서 다시 소식을 듣기 얼마 전이었다.

유니언 광장에 종교를

우리는 우리가 그 신문의 첫판(창간호)을 팔기 위해 유니온 광장으로 과감히 나갔던 1933년의 그 역사적인 노동절에 그가 함께 있어주길 여전히 희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없었다. 한 친절한 사제가 나를 도우라고 3명의 청년들을 보내주었다. 그들 중 한사람은 덴버에서 온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금발의 소년인 조우 베네트 였는데, 그는 몇 달 동안 우리와 함께 있으며 도와주었다. 그 날은 맑고 따뜻하고 화창하였다. 광장은 데모대와 시위대로 꽉 채워져 있었는데, 그들은 연설을 듣고 자기들끼리 논쟁을 하고 무료로 배부하거나 파는 엄청난 선전문들을 힐끗 보곤 했는데, 그것들은 곧 광장 마당 위에 쓰레기가 되었다.

노동 운동가들과 좌파사람들이 경멸하며 비판하자, 위축되고 용기를 잃은 나머지 어린 두 청년은 곧 달아났다. 유니온 광장에 종교를! 그것은 터무니없었다. 만일 우리가 여호아의 증인을 대표했었다면 좀 더 우정 어린 대우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로마 가톨릭교회에 속해 있었다! 조우 베네트와 나는 맑은 봄 햇볕을 한껏 즐기면서 그냥 내어 맡기고 있었다. 우리는 많은 신문을 팔지는 못했지만, 우리가 관심을 두었던 토론을 즐겼다. 한 아일랜드 남자는 발행란을 보고 ‘한 부에 1페니’라고 썼기 때문에 우리를 비난했다. 그는 ‘우리는 영국인에게 고용되었다’라고 말했다. 다음 달에 우리는 그 아일랜드 사람이 제안한 것처럼 그 문구를 ‘한 부에 1센트’로 바꾸었다.

우리는 피터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일을 이런 식으로 내버려두지 않을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한 아일랜드 남자가 한 아일랜드 남자를 천 년 전에 만났을 때 그들은 수도원을 시작했다. 지금 한 아일랜드 남자가 한 아일랜드 남자를 만날 때, 당신은 그들이 무엇을 시작하는지 안다!”라고. 그 후 그는 켈트 문화에 대하여, 또한 중세 암흑기에 아일랜드 사람들이 어떻게 문명을 지켜 왔는가에 대해 긴 토론을 계속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의 반대자가 페니에 대하여 열을 냈던 것을 모두 잊을 때까지 말했을 것이다.

“왜 백인과 다른 유색인이 곡괭이와 삽을 들고 있으면 안 되는가?”

또 다른 항의는 어떤 흑인에게서 제기되었는데, 그는 우리 신문의 제목인 <가톨릭일꾼> 글자 다른 편에 있는 로고에 두 명의 노동자들이 모두 백인이라는 사실을 지적하였다. 그 중 한사람은 곡괭이를 다른 한사람은 삽을 들고 있었다. “왜 백인과 다른 유색인이 곡괭이와 삽을 들고 있으면 안 되는가?” 그는 이유를 알고 싶어 했다.

우리는 그것이 좋은 제안이라고 생각하였다. 다음 신문이 발행되기 전 우리는 한 미술가를 찾았는데, 그는 우리를 위해서 그리스도 모습을 배경으로 백인과 유색인이 각각 노동기구를 들고 악수하는 새로운 로고를 만들어 주었다. 조우 베네트와 나는 신문을 판 그 첫날 햇볕에 그을린 채 공원 벤치에 앉아서 점차 긴장이 풀렸다. 보잘 것 없는 판매와 미래에 대한 불확실한 예견에도 불구하고, 이스트 15번가로 돌아온 그 날 밤 나는 행복한 성취감을 느꼈다.

그러나 나는 피터 모린을 그리워했다. 우리는 비록 작지만 새로운 신문을 발간한다는 생각에 너무도 흥분했었고, 고려해야 할 너무도 많은 세부적인 일들이 있었기 때문에, 신문이 발행되기 전까진 그를 그리워할 시간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그가 보고 싶었다. 그의 부재는 비록 신문이 피터가 우리에게 전해 준 생각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상을 반영하지 않았다는 것을 상기시켜 불편한 느낌을 나에게 주었다.

그런 후, 한 동안 나는 다시 바빠졌기 때문에, 피터에 대하여 많이 생각할 수 없었다. 우리는 교구 신문의 편집자들과 가톨릭교회 안에 잘 알려진 남녀 신자들에게 신문을 우편으로 보내야 했다. 그러자 우리의 첫 번째 노력에 대해 칭찬하는 우편물이 오기 시작했다. 몇몇 편지들은 심지어 우리의 일을 계속하도록 도와주는 기부금까지 같이 보내왔다. 나는 이런 성공적인 반응 때문에 머리가 어리둥절했다. 우리는 시작한 것이다. 테사의 아기는 <가톨릭일꾼>이 발행된 그 다음 주간에 태어났다. 며칠 지난 후, 내 동생은 허드슨 강 위쪽 돕스 페리의 지방신문 편집 일을 얻게 되어 그 곳으로 이사갔다. (계속)


[<빵과 물고기>는 미국 메리놀선교회 출판사인 올비스사에서 1997년에 발간된 Dorothy Day의 <Loaves and Fishes>(빵과 물고기)를 '참사람되어'에서 2000년 3월호에 번역한 것입니다. 도로시 데이가 이 책을 쓴 것은 1963년으로, 가톨릭일꾼공동체 운동이 시작된 지 30년만에 운동의 시작과 일꾼들의 삶을 간결하고도 따뜻하게 회상하고 있으며 운동의 입장과 신앙과의 통합을 선명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편집자]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