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일꾼 여름 영성강좌 “그리스도교 영성을 읽는 다섯 권의 책-그리스도인이라서 행복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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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일꾼 여름 영성강좌 “그리스도교 영성을 읽는 다섯 권의 책-그리스도인이라서 행복하십니까?”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1.06.16 18: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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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 동영상 강의, 7월 15일~8월 26일(격주로 총 5회)

코로나 팬데믹으로 답답한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곧 숨통이 좀 열릴만한 기운이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래도 남는 건 공부밖에 없다는 생각을 잠깐 해봅니다. 이번 시즌 마지막 강의를 하려고 합니다. 그동안 아름다운 투혼들의 삶과 생각을 나누어 보았습니다. 이번엔 우리가 사랑할만한 신학자/영성가들에게서 귀담아 들을만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다섯 권의 책을 선정했고, 이 책을 통해 신비와 예언을 사는 그리스도교 영성의 물가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이번 강의는 2주에 한 번씩 격주로 하려고 합니다. 한 주일에 책을 한 귄씩 독파하는 게 쉽지 않을 것이란 판단 때문입니다. 두 주에 한 권씩 책을 읽고 강의를 듣는 방식으로 진행합니다.    

믿음과 수행은 한 묶음입니다. 얼마전에 읽은 정양모 신부님의 전갈은, 세례를 받고 교회에 나간다고 모두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합니다. 예수를 알고 예수를 닮아야 그리스도인이라 합니다. 지당한 말씀입니다. 이번 동영상 강좌는 관습적인 신앙생활에 균열을 일으키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우리 자신에게 어떤 질문을 던져야 할지 가늠해 보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사랑하기 위해 자유롭게 되라고 하십니다. 영적 자유를 얻는 방법을 터득해야 행복한 그리스도의 수행자가 될 것입니다.

주제: 그리스도교 영성을 읽는 다섯 권의 책 : “그리스도인이라서 행복하십니까?”
강사: 한상봉 이시도로(가톨릭일꾼 편집장)
일시: 7월 15일~8월 26일(격주로 총 5회)           
제공: 강의 동영상 링크 + 강의록 PPT + PDF
           + 음성파일을 이메일로 보내드립니다.
강의 내용

1강 (7/15)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전사戰士들이다
             <영적 전투 배우기>, 피델리 루페르트, 분도출판사, 2017

2강 (7/22) 그리스도인의 복종과 사랑
              <나를 따르라> ,본회퍼, 복있는 사람, 2016

3강 (8/5) 하느님의 창조는 끝나지 않았다
              <사랑과 노동-창조의 신학>, 도로테 죌레, 분도출판사, 2018

4강 (8/19) 자캐오에게 길을 묻다
              <하느님을 기다리는 시간>, 토마시 할리크, 분도출판사, 2016

5강 (8/26) 인간은 사랑을 통해, 사랑 속에서 구원받는다
             <신성한 목소리가 부른다> 존 니프시, 분도출판사, 2019

교재(참고서적)를 미리 읽고 강의를 들으시면 더 좋습니다.
    복습보다 예습후, 강의로 정리하시면 공부에 도움이 됩니다.
    이번 여름에 책 5권 마음먹고 읽어 봅시다.
 
    책 읽기 어려우신 분은 강의 동영상를 2번 이상 들어보시라고 권합니다.  

수강료: 5만원
              송금계좌: 농협 352-1189-4554-13 한상봉(가톨릭일꾼)
문의: 031-941-2736 (도로시데이영성센터)/isihan@hanmail..net

강의를 신청하시려면 아래 주소를 누르시고, 신청서를 작성하시면 됩니다.

https://docs.google.com/forms/d/1oiIgGmxxaX7Q9Uc4SuENRfUUO1uESvTU27efBTrL9O8/

 

[강의 세부 내용]

1강 그리스도인은 하느님의 전사戰士들이다
     <영적 전투 배우기>, 피델리 루페르트, 분도출판사, 2017

그리스도인은 복음을 거스르는 불의한 세계와 언제나 내면을 엄습하는 악의 권세에 맞서 한결같이 ‘믿음의 전투’를 하도록 부름 받았다. 

영적 전투(pugna spiritalis)는 “하느님의 영에 힘입은 내적 전투”이기 때문에 여기서 내 영혼 안에서 실제로 싸우는 전사는 하느님 또는 예수님이다.

이를 두고 성 베네딕도는 “수도승은 잠에서 깨어나야 하고, 결국 일어나야 하며, 매일 큰소리로 외치시는 하느님의 음성에 놀라 일어서야 하고, 아직 시간이 있을 동안 달려가야 하며, 나그네나 전사처럼 허리를 동여매고 거룩한 장막에 이르는 길을 선행을 실천하며 앞장서서 가야 한다.”(성규 머리말 8-22)고 말한다. 베네딕도는 이 말을 수도승들에게 말하고 있지만 정작 수행(영적 전투)을 해야 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도 해당된다.

 

2강 그리스도인의 복종과 사랑
     <나를 따르라>, 본회퍼, 복있는 사람, 2016

“예수를 따르는 것은 몇몇 사람의 칭찬할만한 특별한 업적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내리신 명령이다. 하지만 수도원에서는 예수를 따르는 겸손한 행위가 성인들의 칭찬할만한 행위로 변질되었고, 따르는 자의 자기부정은 경건한 자들의 최종적이고 영적인 자기주장으로 둔갑하였다.”

본회퍼는 예수를 따르는 것 자체가 그분이 주시는 은혜라고 말한다. 그러니 하느님의 은혜 가운데 있다면서도 ‘예수 따르기’는 거절하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그는 자신과 자신의 신앙을 기만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교회 주변에는 “까마귀처럼 ‘값싼 은혜’라는 시체 주위에 모여. 그 시체로부터 독(毒)을 받아 마시는 사람”이 많은 게 사실이다. 그 결과, 예수 따르기가 교회에서 실종되었다고 본회퍼는 한탄한다.

 

3강 하느님의 창조는 끝나지 않았다
     <사랑과 노동-창조의 신학>, 도로테 죌레, 분도출판사, 2018

“삶이란 무엇인가?”라고 누군가 묻는다면, 한마디로 답하기 참 난감하다. 그래도 답해야 할 때, 인생에 끼어든 거품을 다 걷어내고 나면 “평생 사랑하고, 평생 노동하는 것”만 남을 것 같다.

세상과 인간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일하고, 일하지 않고서는 타인을 사랑할 도리가 없다.

그리고 사랑과 노동 사이에서 발생하는 것이 기쁨이다. 성경에서 “보시니 좋았다”라고 표현된 이 기쁨은 제 사랑이 구체적 형상을 얻었을 때 발견하는 창조의 기쁨이다. 인간이란, 어쩜 하느님이 누렸다는 이 기쁨을 나누어 갖기 위해서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4강 자캐오에게 길을 묻다
     <하느님을 기다리는 시간>, 토마시 할리크, 분도출판사, 2016

할리크는 “하느님의 현존의 표징들이 세상 표면에서 쉽게 손닿을 수 있는 곳에 있다면 진정한 신앙이 필요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했다. 하느님께서 침묵하시는 차가운 밤, 우리 삶과 세상이 불확실함으로 가득 찬 어스름한 순간에 신앙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때 신앙은 확실성과 평안에 대한 목마름을 달래주는 것이 아니라 “이처럼 숨어 계신 하느님과 더불어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몸에서 무신론의 가시가 떠나게 해달라고 청해서는 안 된다. 무신론은 우리의 신앙에서 ‘종교적 환상’을 걷어 내는데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다만 무신론에게 최종발언권을 넘겨주어서는 안 된다.

우리 교회와 신앙이 하느님을 온전히 만나려면 갈 길이 멀다. 우리는 아직 그분을 만나지 못했고, 교회는 관료화된 주식회사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가 바닥까지 지쳐 있을 때에도 호렙산을 향해 가던 엘리야에게 천사가 전한 메시지를 받아들여야 한다. “일어나 먹어라. 갈 길이 멀다.”(1열왕 19,7)

 

5강 인간은 사랑을 통해, 사랑 속에서 구원받는다
     <신성한 목소리가 부른다> 존 니프시, 분도출판사, 2019

“하느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장소는 우리의 깊은 기쁨과 세상의 깊은 갈망이 만나는 곳이다.”(프레드릭 비크너)

비크너의 말처럼, 성스러운 부르심의 장소는 우리의 내적 갈망과 사회적 요청이 만나는 곳이다. 그래서 호세 가르시아는 “세상은 마음을 움직이고 마음은 세상으로 나아간다.”고 했다. 사람들은 보통 소명(성소)을 성직자나 수도자의 삶으로 부름 받는 것이나 세속적 의미의 ‘직업’을 가리키는 단어로 생각한다. 그러나 소명이란 ‘삶의 우선순위’를 재정비하는 일이다.

우리는 인생의 시기마다 다른 소명을 경험하기도 하고, 특정한 때에는 한꺼번에 여러 부르심을 받기도 한다. 이십 대에 의미 있었던 삶이 사십대에는 달리 보일 수 있다. 은퇴가 가까워진 사람은 자신의 재능과 시간을 이제 어찌할까, 새로운 소명을 기대한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하느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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