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도 꽃처럼 돌아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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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도 꽃처럼 돌아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1.06.14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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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의 [성경이 삶에게 말을 걸다: 봄에 이별]

오늘 비가 내리고 어제는 기다리고 기다렸던 연분홍 작약이 피었습니다. 작년에는 배롱나무에서 백일홍 돋기를 기다렸는데, 작약은 첫해라서 꽃을 볼 수 없었던 것이지요. 우리집 마당에 입양되어 한 겨울을 견디고 나서야, 나무들과 구근들이 자리를 잡아나가는 것 같아요. 파주가 북쪽에 치우쳐 있는지 꽃소식은 언제나 늑장이지만, 반드시 봄은 오고 연두빛은 장미가 꽃망울을 터뜨리는 순간부터 초록빛이 됩니다.

이렇게 뜰의 정경을 먼저 말하는 것은 저도 어쩔 수 없습니다. 글을 쓰려고 창가에 앉으면, 무조건 시선이 그곳에 꽂히는 까닭입니다. 올해는 단풍나무 한 그루 입양을 했습니다. 새싹부터 붉다는 홍단풍입니다. 농장 한 구석에서 가지 끝이 모질게 끊어진 채 서 있던 단풍입니다. 수관은 굵지만 옹이진 상처가 가득합니다. 농장주는 단풍이 볼품없어 팔리지 않았다 해요. 우리 집 뜰에서 튼실하게 잎을 내는 단풍에게 ‘찬실이’라는 이름도 붙여 주었습니다.

김초희 감독의 <찬실이는 복도 많지>. 영화 프로듀서로 일하다가 갑자기 감독이 죽는 바람에 실업자가 된 마흔이 넘은 찬실이. 달동네로 거처를 옮겨 가사도우미로 나서는 찬실이지만, 열심히 살았지만 지지리 복이 없을 법한 찬실이지만, 영화 마지막 엔딩에 등장하는 OST에선 찬실이가 복도 많다고 열네 번이나 반복해서 노래합니다. 집도 없고 돈도 없고, 남자도 없고 새끼도 없고, 사랑도 가고 청춘도 가고, 웃다가 울고 울다가 웃고, 에헤이 에헤이야 어어라 우겨라, 찬실이는 복도 많다고 합니다.

‘영화’라는 존재이유가 사라진 뒤에 그녀를 아끼던 후배들이 찾아오고, 사람이 빈자리에 고입니다. 일과 사랑보다 귀하게 정든 사람들이 발견됩니다. 찬실이가 머물던 집주인 할머니의 한글 숙제를 돕다가 먼저 간 딸을 그리며 지어놓은 할머니의 한 마디가 가슴에 사무칩니다. “사람도 꽃처럼 돌아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할머니 윤여정의 언어이며, 찬실이 강말금의 언어입니다.

 

 

봄에 오히려, 너의 죽음을 생각한다

뜰에 나무를 심으면서 생각합니다. 해마다 나무들은 더 깊이 뿌리내리고, 더 푸르게 잎사귀를 흔들고, 봄이 오면 더 환하게 꽃망울을 터뜨립니다. 봄이면 어김없이 굳은 각질을 뚫고 나오는 연두빛을 생각하면 가슴이 함박꽃처럼 부풀어 오릅니다. 하지만, 사람의 목숨은 때로 자연을 거스르는 것이어서 슬픕니다. 노인들은 자연의 이치대로 겨울에 죽어가지만, 청춘들은 자연을 거슬러 봄에 죽어야 하니 말입니다.

저희 아버지도 어머니도 한겨울 정월에 돌아가셨습니다. 메마른 목숨이 바람에 날아간 듯싶습니다. 슬퍼도 여한이 적은 이유입니다. 그네들의 영혼이 하늘에서 생기를 다시 얻기 바라는 까닭입니다. 하지만 연두빛이 초록으로 갈채를 보내는 계절에는 ‘빼앗긴 목숨’이 있습니다. 그래서 억울한 죽음이라 합니다. 살아남은 이들의 가슴에 상처를 남기는 죽음입니다.

붉은 동백꽃처럼 떨어져 내린 4.3 제주항쟁의 희생자들, 개나리처럼 환한 얼굴들을 진도 앞바다에 수장한 4.16 세월호 참사, 목련꽃처럼 한 순간에 목이 부러져 나간 5,18 광주의 원통한 죽음이 아직 옛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유월이 오면 박종철의 영정과 이한열의 장례식 행렬이 떠오릅니다. 그날 목이 터져나가라고 사무치게 민주열사들의 이름을 부르다 영영 목이 쉬어버린 문익환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분 역시 돌아가시고, 그만큼 흠모하던 김종철 선생님과 백기완 선생님도 먼 길을 떠나셨습니다. 한 시대의 스승이었던 분들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김대중 대통령, 그 많은 잊을 수 없는 이름들 앞에서 제 삶의 자리를 다시 곱씹어 봅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죽어가는 젊은이들이 있다는 사실을 놀랍기만 합니다. 그들의 죽음은 사실상 일상이 되고 있습니다. 비정규직과 아르바이트, 최저시급 노동자가 지천인 세상입니다. 이들은 생계를 위해 위험으로 내몰리고, 초록이 짙어질수록 목숨 줄을 놓으라고 강요받고 있습니다. 괴테가 <색채론>에서 초록이란 생명의 빛깔이면서, 동시에 부패와 죽음의 빛깔이라 했는데, 이게 한국사회에선 빈말이 아닌 모양입니다.

용역회사 아르바이트를 하던 대학생 이선호(23살)는 지난 4월 22일 경기도 평택항 부두에서 컨테이너 정리작업 도중 구조물에 깔리는 사고로 숨졌습니다. 안전교육도 안전장비도 없이 투입된 노동이었습니다. 2018년에는 김용균(당시 24살)은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입사 3개월 만에 혼자 위험 업무를 하다 컨베이어벨트에 끼여 숨졌습니다. 2017년 이민호(당시 19살)는 특성화고 현장실습 도중 프레스에 눌려 죽었습니다. 2016년 김아무개(당시 19살)는 서울 지하철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 수리 작업을 하다 열차에 치여 이승을 떠났습니다.

 

사진출처=경향신문
사진출처=경향신문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원안이 대폭 완화된 ‘중대재해처벌법’이 되어 사실상 ‘중대재해기업보호법’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으니, 산업재해에 대한 이런 정치권의 인식수준으로는 비정규직, 용역, 아르바이트, 택배 및 배달노동자들의 젊은 죽음은 거듭되고 늘어날 것입니다. 이미 우리 곁을 떠난 목숨과 그렇게 떠나고 있는 목숨들과, 언제든지 떠날 공산이 높은 목숨들 앞에서, 살아남은 이들이 “사람도 꽃처럼 돌아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고 말할 때, 이들을 위로하는 언어들은 허공에 흩어져 버립니다.

2017년에 김형석이 작곡하고 나윤권이 부른 세월호 추모곡 <그리움 만진다>는 이승을 떠난 그 모든 그리운 이름들을 다시 호명하면서, 마치 곁에 살아있는 것처럼 안부를 묻고, 봄나들이 가자고 말합니다. “이 바람 따라 걸으면 널 만날 수 있을까. 저 물결 따라 떠나면 널 만질 수 있을까” 묻고, 참 고왔던 “봄날 같던 네 기억” 안에 머물러 있고자 합니다. 그 간절한 그리움이 안타까운 기다림을 넘어서는 자리에 서면, 그는 없지만 있고, 떠났지만 이리로 다시 오고 있음을 직감합니다. 다석 유영모 선생님은 하느님을 “없이 계신 분”이라고 했지만, 정작 하느님이 아니더라도, 그리움 안에서 모든 목숨들은 다시 호명되고 다시 되살아오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노래하게 됩니다.

“닿을 수도 없지만
널 볼 수도 없지만
난 보고 또 본다 널 부른다 바람따라 간다
봄 맞으며 널 만진다
그리움 만진다”

 

 

사무치게 그리웠던 그 사람, 예수

그리움에서 기다림으로 나아간 종교가 있습니다. 강제로 분리된 사랑을 늘 새롭게 기억하자고 말하는 신앙이 있습니다. 그건 그저 그런 평범한 이별이 아니었습니다. 예수의 죽음은 로마제국과 유다의 성전세력이 공모한 결과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이가 ‘죄없이’ 죽임을 당했다고 기억합니다.

그이가 매달렸던 십자가는 로마가 노예들을 처형하던 도구였습니다. 기원전 73년경 스파르타쿠스(Spartacus)는 카푸아 검투사 양성소의 잔혹한 대우에 반발하여 74명의 동료 검투사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이들이 로마에서 파견한 토벌대를 격퇴시키면서 스파르타쿠스의 이름이 로마 전역에 퍼졌고, 그 소식을 들은 이탈리아 전역의 노예들과 양치기들이 반란에 합류했습니다. 결국 로마의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의 로마군단에 진압된 노예들 가운데 6,000명이 포로로 잡혔습니다. 이들에게 주어진 극형이 십자가 처형입니다. 크라수스는 로마에 이르는 아피아 길가에 노예들을 줄지어 새카맣게 매달아 놓았습니다.

비정한 세상에서 벌어진 스파르타쿠스와 노예들의 비장한 죽음입니다. 스파르타쿠스는 무분별한 살육을 제지한 고결한 성품의 사내였다고 합니다. 그래서일까요. 스탠리 큐브 감독은 영화 <스파르타쿠스>(1960)에 이런 에피소드를 삽입시켜 놓았습니다. 전투에 패배한 반도들 사이에서 로마군대가 스파르타쿠스를 색출하려고 찾아다닐 때, 살아남은 반도들은 저마다 “내가 스파르타쿠스요!”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이윽고 모든 반도들이 한 목소리로 자신이 스파르타쿠스라고 외쳤다는 이야기입니다. 비록 이 내용은 허구로 밝혀졌지만, 노예들의 해방을 위해 봉기한 스파르타쿠스에 대한 존경심이 배어나온 결과입니다.

이천 년 전 인물인 스파르타쿠스는 지금도 사회변혁을 갈망하는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사회민주주의를 주장하며 1919년 베를린에서 봉기를 일으키고 자유군단에 의해 체포되어 고문당하고 살해된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 1871-1919)가 활동했던 단체가 ‘스파르타쿠스 연맹’이었다는 사실은 특별한 감회에 젖게 합니다. 그의 투쟁과 죽음이 시공간을 넘어서 거듭 기억되는 까닭입니다.

스파르타쿠스가 십자가에서 처형되고서 100년 만에 다시 십자가에 처형된 사람을 기억하고 사모하고 따르는 이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이의 이름은 예수였고, 예수는 섬기는 자가 다스리는 나라를 꿈꾸었습니다. 생애의 마지막 식사를 나누면서 굳이 이방인 노예의 처지로 내려와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었던 분입니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는 하느님께서 “당신 종의 비천함을 굽어보셨기 때문에”(루카 1,48)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1,51-53) 하고 노래했다고 복음서는 전합니다.

예수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열정에 휩싸여 행동했으며, 그래서 결국 노예들과 반도들처럼 십자가에서 처형되었습니다. 그렇게 예수는 억울하게 죽은 모든 이들과 한 몸이 되신 분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마태 25,40)이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유례가 없는 일입니다. ‘주님’으로 고백하는 분을 굳이 그이의 ‘죽음’ 안에서 기억하려는 종교는 그리스도교뿐입니다. 사도들의 신앙고백을 다루는 ‘사도신경’은 그분께서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 마리아께 잉태되어 나시고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 고난을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시고 묻히셨다”고 합니다. 하느님께 생명을 얻은 자가 죄없이 억울하게 수난을 당하고 죽었다는 전갈입니다. 후렴처럼 부활신앙을 고백하는 게 다행입니다.

교회에서 가장 주의 깊게 준비하는 것도 성탄절과 사순절입니다. 먼저 겨울에 탄생의 기쁨을 나누지만, 이내 봄이 오면 절망적인 시간을 보냅니다. 그 절망 가운데 위로와 희망을 찾는 신앙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날마다 가정에서도, 성당에서도 십자가 앞에 앉아 기도 합니다. 안타깝게 이승을 떠난 자의 곁을 지키고 있는 것이지요. 노예로 반도(叛徒)로 죽은 이를 주님으로 고백하면서 말입니다. 세상에서 버림받은 분을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드님으로 받아주셨음을 가슴에 새기며 사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사진출처=pixaba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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닿을 수 없는 이를 만진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상처받은 이들의 신앙입니다. 사랑하는 이의 목숨을 빼앗긴 자들의 신앙입니다. 그이를 배신했지만 다시 그이의 그늘을 되찾기로 작심한 이들의 신앙입니다. 예수를 밀고했던 유다는 스스로 목을 매고 죽었지만, 카야파의 저택에서 심문받던 그분과 눈길이 마주쳤던, 아예 그분 곁에서 달아나지 못했던 베드로들의 신앙입니다. 그가 참회의 눈물을 보였지만, 달아났던 제자들도 그분을 아예 잊지 못합니다.

약한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던 예수였기 때문에, 죽는 그 순간까지 단 한번도 자신을 두고 달아난 제자들을 원망하지 않았던 예수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온 세상을 얻어도 사람의 마음을 얻지 못하면 허사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예수였습니다. 예수는 마지막 만찬을 마치고 고별사를 나누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너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고 너희에게 다시 오겠다.”(요한 14,18) “이제 조금만 있으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 너희는 나를 보게 될 것이다.”(14,19)

세상이 예수를 죽음의 세력에게 넘겨준 것처럼, 세상은 예수를 따르는 그리스도인들도 박해할 줄 예수는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15,18) 하고 말합니다. 예수와 그분의 사람들이 세상과 다른 질서 안에 머물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15,19)

세상이 가난하고 무력한 이들, 그리고 이들 편에서 새 세상을 꿈꾸는 이들을 여지없이 차별과 배제를 통해 변방으로 밀어내겠지만, 하느님께서 그들을 언제든 다시 일으켜 세울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신앙인입니다. 무고한 이들의 죽음 앞에서, “너희는 울며 애통해하겠지만 세상은 기뻐할”테지만,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15,20)이라고 예수는 약속합니다.

“해산할 때에 여자는 근심에 싸인다. 진통의 시간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이를 낳으면, 사람 하나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기쁨으로 그 고통을 잊어버린다. 이처럼 너희도 지금은 근심에 싸여 있다. 그러나 내가 너희를 다시 보게 되면 너희 마음이 기뻐할 것이고, 그 기쁨을 아무도 너희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겪을 것이다. 그러나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15,21.22.33)

예수는 세월호의 아들처럼, 4.19의 김주열처럼, 1980년 광주의 윤상원과 김군처럼, 1987년 유월의 박종철과 이한열처럼, 컨테이너 구조물에 깔려죽은 알바생 이선호처럼 봄꽃이 환하게 터지던 계절에 이승을 떠났습니다. 하지만, 세월호 유가족이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는 동안,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호명하는 동안, 닿을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다고 믿었던 그이들을 여전히 지금도 생생하게 보고 있고, 만지고 있습니다. 그이들을 다시 보듯 봄을 만지고 있습니다. 사람도 꽃처럼 봄이 오면 다시 돌아온다고 믿습니다. 우리가 그이들을 기억하고 만지고 있는 동안, 그이들은 우리들과 함께 호흡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세상을 이길 것입니다, 마침내 결단코.

 

*이 글은 <가톨릭평론> 32호(2021 여름호)에 실렸습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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