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락한 교회와 수도원 담 밖의 설교자 앙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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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락한 교회와 수도원 담 밖의 설교자 앙리
  • 가톨릭일꾼
  • 승인 2021.06.13 2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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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의 요한복음 묵상 [지상에 몸푼 말씀]-14

무릉 가는 길 2

-민영

누구든 그곳으로 가고 싶어 한다

들판에 끝난 곳에 여울이 흐르고
여울을 건너면 이끼 낀 돌문.
돌문 열고 들어가면 앵두꽃 마을
너와집 한 채가 그 속에 숨어서
일 마친 농부가 낮잠을 자고 있다.
머루알 같은 배꼽을
바지춤으로 드러낸 채 ...

이런 그림을 본 사람은 
씨가 말랐다.

 

축제의 가장 중요한 날인 마지막 날에 예수님께서는 일어서시어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목마른 사람은 다 나에게 와서 마셔라.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 말씀대로 ‘그 속에서부터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다.’” 이는 당신을 믿는 이들이 받게 될 성령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었다. 예수님께서 영광스럽게 되지 않으셨기 때문에, 성령께서 아직 와 계시지 않았던 것이다.

이 말씀을 들은 군중 가운데 어떤 이들은, “저분은 참으로 그 예언자시다.” 하고, 어떤 이들은 “저분은 메시아시다.”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성경에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그리고 다윗이 살았던 베들레헴에서 나온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렇게 군중 가운데에서 예수님 때문에 논란이 일어났다. 그들 가운데 몇몇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요한 7,37-44)

 타락한 교회의 단순한 진리

교회는 중세 문명을 창조하고 또 그 문명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이제 교회는 모든 사람들의 사고와 감정, 그들의 생활 구석구석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자신이 사람들에게 심어준 종교적 열망을 완전히 만족시키기에 역부족이었다. 교회 안에는 종교적 엘리트, 수사, 수녀들이 있고 그들의 삶은 이론에 있어서나 실천에 있어서나 전적으로 하느님께 헌신하는 그것이었다.

수사와 수녀들은 기도를 통하여 사회 전체를 대상으로 봉사했고, 때로는 궁핍한 자들을 돌보기도 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평신도들의 영적 필요에 응답하기 위해 일하는 사람들은 성직자였다. 그러나 성직자들은 주교에서 교구 사제에 이르기까지 세상에 너무도 깊숙이 개입해 있었다. 고위 성직자들의 부(富)와 정치적 야심, 하위 성직자들의 축첩과 성적인 방종이 나타났으며, 이런 현상에 대해 평신도들은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자연히 참다운 복음에 대한 간절한 염원이 싹퉜다. 민중은 자신들의 경험과 연결시킬 수 있는 단순하면서도 쉽게 알아들을 수 있는 복음이 선포되기를 갈망했다.

평신도들이 교회를 판단하는 기준은, 이전에 교회가 자신의 이상으로 삼고 있었던 복음서와 사도행전에 묘사되어 있는 초대 그리스도교의 삶이었다. 이러한 삶은 사도들의 생활을 모방한 수도원 생활 속에 어느 정도 보존되어 있었다. 성베네딕도 회칙에 “참된 수사가 되려면 그는 교부와 사도들처럼 자신의 손으로 노동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 있다. 10세기와 11세기에 클뤼니와 히르사우 수도원 개혁운동의 목적은 사도행전에 따라서 “모든 신자들이 하나로 뭉쳐 모든 물건을 공동으로 소유하고… 그들 중 누구도 자기가 가진 것을 자기 소유라고 말하는 이가 없었다.”(사도 2,22;4,32)는 말씀대로 살아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수도원 담장 안에서만 일어난 일이었을 뿐 평신도들에게는 별다를 감흥을 주지 못했다. 그래서 평신도 중 일부는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청빈과 소박함이 그 당시 부요하고 위계질서로 꽉 짜여진 제도교회와 얼마나 거리가 먼 것인가를 뼈저리게 느꼈다.

이들은 진정 자신들이 신뢰할 수 있을 만큼 거룩한 삶을 사는 사람을 보고 싶어했고, 초대교회 사도들의 생활과 가르침을 그리워했다. 그리고 이러한 설교를 하는 평신도들은 교회에서 추방당했다. 교회의 눈으로 볼 때 적법한 절차를 걸쳐 서품 받은 사제들만이 강론할 자격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평신도의 설교는 곧 제도교회에 대한 반항으로 여겨졌다.

 

교회 쇄신운동

그런데 이러한 개혁운동을 추진시킬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해 준 것은 우연히도 교황이었다. 수도원을 포함하여 중세시대의 교회는 당시 세속군주와 귀족들에게 지배당하고 있었는데, 이들 군주와 귀족들은 성직자 임명권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성직자를 임명하여 자신의 신하로 삼고 땅을 주었다. 이는 콘스탄틴 황제 이후 관행으로 굳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11세기에 들어서자 교회가 자율권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이는 곧 영적 엘리트로서 성직자의 지위와 위엄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특히 막강한 힘을 행사한 수도원 출신의 교황 그레고리오 7세가 성물(聖物)매매 또는 성직 매매를 금하고, 성직자의 독신생활을 권장하였다. 당시에는 많은 성직자들이 결혼하거나 첩을 데리고 살아 폐단이 많았기 때문이다.

교황은 세속화 된 성직자에 대한 평신도들의 불만을 부추겼다. 어떤 이들은 성직을 매매한 주교를 사탄의 하수인이라고 불렀고, 그런 주교가 집행한 서품은 무효라고 주장했다. 주교회의에서는 결혼한 성직자나 축첩 행위를 한 성직자들이 미사를 집전하는 것을 금지했다. 이러한 개혁운동은 모든 평신도들의 종교적 열정에 불을 질렀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참된 성직자의 증거는 서품을 받았다는 사실에 있지 않고, 사도적 생활을 살려는 헌신성에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공적 권위가 없는 유랑 설교자를 따르는 사람이 많아졌다.

유랑 설교자 앙리

12세기 프랑스 지방에 앙리(Henry)라는 한 유랑 설교자가 나타났다. 그는 수도자였지만, 어느 때부터인가 수도원을 떠나 유랑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1116년 재의 수요일에 그는 르망(Le Mans) 주변의 여러 지방을 돌아다녔는데, 그 앞에는 늘 두 명의 제자가 십자가를 들고 다녔다. 이 지역의 주교인 라바딘의 힐데베르트(Hildebert of Lavardin)는 앙리를 호의적으로 받아들이고, 그에게 사순절 강론을 하도록 허락하였는데, 그참에 자신은 로마 여행을 떠나려 했던 것이다. 그 주교가 여행을 떠나려고 등을 돌리자마자 고행자들이 입는 말총으로 짠 속옷만을 입고, 구레나룻을 길게 기른 젊은 설교자 앙리가 위엄있는 목소리로 그 주교를 책망하는 설교를 시작했다. 청중들은 진지하게 그 설교를 들었다.

르망 지방의 민중은 언제라도 성직자들에게 등을 돌릴 준비가 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지방 백작에게서 수탈당하고 있었는데, 그곳 주교들은 언제나 백작의 편을 들었을 뿐 아니라 부패와 방종의 상징이었기 때문이다. 앙리의 설교가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군중은 성직자들을 길바닥으로 끌어내어 몰매를 때린 뒤 진흙탕 속에 처박았다.

한편 앙리는 부인들을 설득해 비싼 옷과 장신구를 불에 태우도록 했고, 매춘부들을 결혼시켜 매춘관습을 없앴다. 앙리는 엄격한 성윤리를 가진 설교자였다. 또한 반(反)성직주의자로서, 서품 받은 성직자만이 죄를 사하고 결혼을 주례할 수 있다는 주장을 부정하면서 교회 권위를 배척했다. 세례는 신앙의 외적 징표로서만 주어져야 하며, 교회건물과 제도종교의 모든 장식물은 쓸데없는 것이며, 인간은 교회에서뿐만 아니라 이 세상 어느 곳에서라도 기도할 수 있다고 믿었다. 참된 교회는 청빈과 소박함을 내용으로 하는 사도적 삶을 사는 사람들로 구성되고, 이웃 사랑이야말로 참된 종교의 본질이라고 가르쳤다.

 

그리스도를 모방하는 청빈운동

중세 후기에 전례 없이 서유럽에 부가 쌓이게 되면서 사람들이 할 수만 있다면 사치와 허식으로 흥청거리며 살았다. 그러자 자발적으로 청빈하게 살려는 운동이 거세게 일어났다. 그들은 쾌락이 마귀의 온갖 유혹임을 발견하고 자신의 모든 재산과 권력과 명성을 떨쳐버리고 가난에 허덕이는 민중 속으로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자발적 포기의 삶에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참여했다. 이단 종파인 왈도파의 창시자 피에르 왈도와 성 프란치스코는 부유한 상인계급 출신이었다. 또한 하위성직자들도 고위성직자들의 사치와 세속성에 항의하여 자기 교구를 버리고 절대 가난의 길을 추구했다. 이들은 이 도시 저 도시를 여행하면서 대부분 지하활동을 했으며, 도회지의 불안하고 방향을 잃은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청중을 모으고 추종자를 만들었다.

그들은 자신을 사도라고, ‘그리스도의 참된 모방자’라고 여겼다. 따라서 그들은 옷 한 벌이라도 여분으로 갖고 있는 것은 구원에 장애가 되며 부자를 식탁에 초대하는 것은 죽을 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기 위해 부자들의 물건을 취하는 것은 정당한 것이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은 은총의 상태에 있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앙리와 마찬가지로 이단으로 여겨졌는데, 그 까닭은 신학적인 교리 때문이 아니라 이런 삶의 방식이 제도교회에 위협이 되었기 때문이었다.(노만 콘, 「천년왕국운동사」, 한국신학연구소, 43-65쪽, 194-212쪽 참조).

그리스도에 대한 구구한 생각

요한복음서에서는 예수의 형제들마저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다고 전한다(요한 7,5 참조). 그들은 예수님이 유명해지자 더욱 널리 알려지기를 바랐다. “이곳을 떠나 유다로 가서 당신이 행하시는 훌륭한 일들을 제자들에게 보이십시오. 널리 알려지려면 숨어서 일해서는 안 됩니다.”(7,3-4) 그러나 예수님은 이를 거절한다.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고는 세상과 자신의 관계를 밝힌다. “세상이 너희는 미워할 수 없지만 나는 미워하고 있다. 세상이 하는 짓이 악해서 내가 그것을 들추어 내기 때문이다.”(7,7) 이는 중세교회의 유랑 설교자들이 처한 상황과 너무도 흡사하다. 그네들이 타락한 제도교회를 비판했기에 이단으로 몰렸던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은 유다교 지도자들의 악행을 폭로했기에 항상 위험 속에 살아야 했다.

예수님은 초막절에 성전에 가서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반응은 너무도 다양했다. “군중들 사이에서는 예수를 두고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많았다.”(7,12) 어떤 이는 ‘좋은 분’(7,12)이라 하고, 배움이 없는 데 어찌 저리 아는 게 많은지 의아해하고(7,15), 대중 앞에서 거침없이 지도층을 비판하는데도 그들이 예수님을 체포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놀란다(7,26). 더구나 군중 가운데는 “그리스도가 정말 온다 해도 이분보다 더 많은 기적을 보여줄 수 있겠는가?”(7,31)하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또 어떤 이는 예수를 ‘그리스도’라 하고, 어떤 이는 ‘예언자’로 여겼다(7,40-41). 마침내 바리사이파와 사제들이 보낸 성전 경비병들조차 예수를 내버려 둔 채 돌아와 “저희는 이제까지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습니다.”(7,46) 하고 고백했다. 그분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충격을 주는 분이었던 것이다. 거기서 그분의 권위가 자연스럽게 배어 나왔다.

이 마당에서 유다 지도자들의 권위는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다. 예수를 미친 녀석이라 하고(7,20), 그분이 그리스도가 아니라는 근거를 대며 구구한 논란을 벌인다. 그 이유인즉 “그리스도가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모를 것인데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다 알고 있지 않은가?”(7,27), “그리스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있겠는가?”(7,42) 하는 것이었다. 결국 예수께서 홀연히 구름이라도 집어 타고 나타나지 않은 점과 비천한 출신성분을 가졌다는 게 이유의 전부였다.

이때 니고데모가 적절한 질문을 던지며 따진다. “도대체 우리 율법에 먼저 그 사람의 말을 들어보거나 그가 한 일을 알아보지도 않고 죄인으로 단정하는 법이 어디 있소?”(7,51) 만약 이때라도 유다 지도층이 예수님의 복음선포를 올곧게 따져보고, 그분의 자비행(慈悲行)을 이해하려고만 했다면 그들도 구원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니고데모의 말을 듣고 “당신도 갈릴래아 사람이란 말이오?”하며 핀잔을 주었다. 그래서 들어도 듣지 못하고, 보아도 보지 못하는 자는 불행한 영혼인 것이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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