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시 데이, 흠결 많은 교회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
상태바
도로시 데이, 흠결 많은 교회를 어떻게 대해야 할까?
  • 로버트 콜스
  • 승인 2021.06.13 21:2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로버트 콜스의 [DOROTHY DAY, A RADICAL DEVOTION]
스펠만 추기경
스펠만 추기경

뉴욕시의 프란시스 스펠만 추기경과 도로시 데이의 관계는 그가 살아있는 동안에 전설처럼 되었다. 1949년 뉴욕시의 갈바리 묘지에서 일하는 묘파는 사람들이 그들의 고용주인 가톨릭 교회에 항의하는 파업을 하고 있었다. 추기경은 그들과 교섭하기를 거부하였다. 결국 노동자들은 포기하였고 다시 일터로 돌아갔다.

도로시 데이는 인부들 편에 섰고 가톨릭일꾼 공동체 구성원들이 묘지에서 피켓 시위를 하였다. <가톨릭 일꾼> 신문에 도로시 데이는 자신의 느낌을 분명히 밝히면서 “추기경은 잘못된 충고를 듣고 가난한 노동자들에 대해 힘을 지나치게 과시하는 쇼를 하였다. 그것은 모든 전쟁 가운데 가장 최악의 전쟁, 성직자와 평신자 간의 전쟁을 야기시키는 악마의 유혹이었다,”라고 선언했다.

이 전쟁이 <가톨릭 일꾼>신문을 삼켜버리려고 약간의 위협을 가했고 뉴욕 대교구는 도로시 데이에게 교구청으로 오라고 요청하였다. 그곳에서 에드워드 가프니 몬시뇰은 도로시 데이에게 <가톨릭 일꾼> 신문의 이름을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가톨릭'이라는 말은 공식적인 교회와 연결될 때에만 쓸 수 있기 때문이라는 형식적인 이유를 대면서. 도로시 데이는 이 문제를 동료들과 상의 하였고 교구측의 요청을 거부하였다.

몬시뇰에게 보낸 서한에서 도로시 데이는 “가톨릭 전쟁 전우회(이 경우에도 가톨릭이라는 이름을 쓰는데)가 <가톨릭 일꾼> 신문이 그러는 것처럼 뉴욕 대교구의 입장을 대변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그는 충고와 비판을 받아들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작가로서 편집자로서 보다 겸손한 삶을 살기 위하여 최선을 다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는 8년이나 된 신문, 세계 도처에 수천 명의 독자들을 갖고 있는 신문의 이름을 바꾸고 싶지는 않았다. 교회는 이후 한번도 <가톨릭 일꾼> 신문에 대해 압력을 행사하지는 않았다.

교회가 만일 그의 순종을 요구했다면 어떻게 했을까? 스펠만 추기경이 신문 발간을 중지하라고 요구했다면, 그는 의무로서 제안을 받아들였을 것이고, 더 이상 신문은 계속되지 않았을 것이다. 후에 어떤 기회에 만일 추기경이 그에게 그만두라고 명령을 했다면 정말로 신문을 폐간했을 것이냐고 솔직한 답변을 내가 요청했을 때 그는, “아, 나는 추기경이 그런 상황으로 자신을 몰고 가리라고 전혀 생각하지 않아요,”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나서 더 이상 말이 없었으나 얼굴에는 큰 웃음이 번져나갔다. 나는 1950년대 중반에 한두 번 그가 이 문제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리고 교회 권위에 도전하는 가톨릭인이 당면하는 심각한 위기의 문제들에 대해 생각해 달라고 1972년도에 그에게 요청한 적이 있었다. 그는 내가 이런 식으로 청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즉시 분명하게 표현했다.

“나는 나 자신을 교회 권위에 도전을 제기하는 사람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때 나는 가톨릭이었고 지금도 가톨릭이며 죽을 때에도 가톨릭이기를 희망하며 기도합니다. 나는 교회에 도전하기를 원하지 않았으며 교회의 어떤 교의적인 입장에 충실하려고 노력합니다. 나는 내 온 마음과 영혼을 다해 교회를 사랑합니다. 나는 전능하신 하느님께 나에게 집을 주신 것을 감사하지 않고서 절대로 교회 안으로 들어가지 않습니다. 교회는 나의 집이고 나는 집을 잃고 싶지 않습니다. 나는 집 없는 사람들과 일하지만 그 같은 처지에 합류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바로 거기에서 그는 말을 멈추었고 침묵이 꽤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나는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침묵을 마감해야겠다고 느꼈다: “그러면 신문 보도가 ­추기경, 교구청과 당신이 어려움을 가지고 있다고 한 것은  과장이라는 말씀입니까?” 그는 가만히 앉아서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마침내 나는 주제를 바꾸기로 결정했다. 나는 그가 토론하고 싶지 않은 문제를 끄집어내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 그의 평화주의에 대해 말하자고 제안했다. 그는 마침내 웃었다.

“그러니까, 추기경 얘기로 다시 돌아가 보지요! 당신도 확실히 알다시피 추기경은 평화주의자가 아니었어요. 그는 교회 전사들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나는 그가 함께 하는 사람들만 있었다면 즐겁게 크레믈린으로 가는 시위 행진을 이끌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추기경이 말했던 것처럼, 크레믈린이 무신론과 전체주의 그리고 미움과 박해의 중심이라고, 악의 중심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곳에도 우리는 많은 악을 지니고 있습니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이상하게도 비슷한 점들이 많습니다: 무정함, 독단성, 군사적인 열정 등 이런 것들은 역사를 말하고 운명을 말함으로써 합리화되고 있는 측면들입니다.

그러나 스펠만 추기경은 그와 함께 러시아로 가서 러시아인들과 싸우자고 나에게 명령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내 나름의 방식대로 러시아인들에게 동의하지 않습니다. 어쨋든 문제는 그가 우리의 우두머리 사제이고 고백성사를 집행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이곳 뉴욕시에 사는 우리 모두의 영적인 지도자입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의 지배자가 아닙니다. 그는 모든 가톨릭인들이 그의 말 하나 하나에 귀를 기울여야 하고 그의 모든 행위를 따라해야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을 당신도 이미 다 알고 있으리라고 짐작합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이 사실을 잊어버리거나 전혀 올바르게 기억하지 못합니다. 가톨릭 교회는 어떤 의미에서 권위주의적입니다. 가톨릭 교회는 그것이 믿고 있는 바를 보호하고 옹호하고 지지하기 위하여 움직거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양떼들에게 그들이 자신들의 권리를 갖고 있지 않고, 교종이나 추기경의 믿음이나 충실성을 따라야만 한다고 절대로 말하지 않습니다. 교회안의 아무도 나에게 사회, 정치, 경제적 문제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한다면 사람들은 ‘나를 혼자 내버려두고 당신 문제나 신경쓰라’고 말할 것입니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한다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스펠만 추기경이 우리가 「일꾼」신문에 쓴 것이나 공적으로 말한 것들에 대해 큰사랑이 없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때때로 그는 우리에게 화가 났을 것이고, 아마 우리에 대해서 실제로는 별로 아는 것이 없었고 관심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나는 왜 교구청에 오라는 요구를 받았는지 영원히 알지 못하며, 그곳에 갔을 때 만일 추기경이 나에게 설교를 했다면 긴장했던 것만큼, 아니 그보다 더 긴장했었다고 인정합니다. 나는 가능한 방법을 다해 그에게 충실하려고 노력했습니다. 나는 그를 우리시대의 영적 지도자로 여기고 절을 했으며 하느님의, 교회의 중요한 대변자로 생각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주제가 종교적인 것이 아닌바에는 말입니다.

나는 스펠만 추기경이 「가톨릭일꾼」의 정책을 좋아하지 않았다고 확신합니다.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그만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프랑코를 서양의 그리스도교적 문명의 위대한 수호자라고 말하기를 거부한 것에 대해 많은 가톨릭인들이 분노했습니다. 수많은 가톨릭인들이 1950년대에 폭탄 방공호를 만들지 않았다고 해서, 핵시대에 방공호라는 미친짓에 대해 항의했을 때, 모든 시대에 전쟁의 광기에 대해 항의했을 때 우리에게 분노했습니다. 아마 스펠만 추기경은 <가톨릭 일꾼> 신문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그가 이곳 아래편 동쪽구역에 있는 우리들에 대해 걱정하는 것 이상의 무슨 좋은 것을 가졌을까 의심하는 나도 그럴 자격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우리를 좀 더 가까이 보았더라면 우리가 얼마나 그의 교회에, 우리 교회에 충실하고 그것을 사랑하고 있는가를 알았을 것입니다. 당신은 도전이라는 말을 썼습니다만, 나는 교회에 도전하기를 절대 원하지 않았으며 교회의 일부가 되고 교회에 복종하며 그래서 교회의 자비와 사랑, 예수님의 자비와 사랑을 받기를 원했을 따름입니다.

나는 우리가 문을 닫거나 신문에서 가톨릭이라는 단어를 빼버리기를 원했던 몬시뇰이 결코 독단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적어도 몇 명의 몬시뇰이 함께 행동하고 있었다고 확신합니다. 아마 추기경도 있었는지 모르지요. 아니면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나는 우리가 교회와 집과 심지어 길에서 매우 열심히 기도할 것이라는 사실을 그들이 알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성 패트릭 성당에 가서 그곳을 가득 채우고 바깥에도 서서 침묵의 기도를 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미국에서 자유의 권리라는 혜택을 이용하여 옳은 일이라고 여겨지는 것을 생각하고 말하고 행할 수 있다고 선언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전능하신 분의 이끄심을 구하는 것이었습니다.“

후에 또 다른 기회에 그는 이 전략에 대해서, 이 세상과 다른 세상에 함께 적용했던 이 전략을 밝히고 확인하였다. 그는 “사랑스러운 추기경은 우리들보다 더 중요한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그 덕분으로 우리가 풀려났을 것입니다. 그는 미국의 애국주의에 대해 염려하고 있었고 건물들을 짓기 위해 돈을 모금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길이 막히지 않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좋으신 주님께 매달렸고 그분은 우리가 풀려날 수 있도록 도와주시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것을 보셨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눈을 반짝였다.

그리고 나서 그는 덧붙였다. “우리는 오랫동안 스펠만 (추기경)을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기도할 때에 오만하지 않기를 기도했지만, 어쨋건 계속 기도했습니다. 만일 그가 문을 닫으라고 명령했다면, 즉시 성 패트릭 주교좌 성당으로 가서 그곳에서 좋으신 주님이 우리를 거두시거나 문제를 해결하실 때까지 밤낮으로 기도를 계속했을 것입니다.”

마지막에 나는 더 이상 그 당시 그의 의도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단호하고도 거침없이 대응하기로 선택하였고 교회 지도자들이 가톨릭일꾼공동체에 가할 모든 행동의 결과에 대해 가장 조심스럽게 계산하도록 그들을 주의 깊게 관찰하는 전략을 택했던 것이다. 이런 말들을 할 때에 그에게서는 간디와 같은 단순함이 보였다. 그러나 간디에게서도 볼 수 있었던 것처럼, 거침이 없고 빈틈없으며, 또한 정치적인 민감함이 이 상황에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모습이기도 했다.

비록 도로시 데이가 교회의 대표자들을 다루는 방법을 알았다해도, 그는 성찰적이고 겸손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한 노력과 그들을 비판하고자 하는 그의 성향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친구들은 수도 없이 나에게 전사가 되라고, 추기경과 싸우라고, 많은 추기경들과 싸우라고, 교회와 전쟁을 하라고 초대하였습니다. 나는 언제나 뒤로 물러섰고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나에게 편지를 쓰거나 말로써 내가 겁장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눈을 감고 개종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가톨릭 교회가 그 안에 얼마나 많은 죄를 품고 있는지 알았습니다. 남자들과 여자들로 이루어진 교회안에 어떻게 죄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나는 베르나노스가 실망감을 느끼고 혐오스러워 했을 때 ‘자만심이 모든 곳에 있다’고 한때 말했던 것을 생각합니다. 나는 그것이 그가 너무나 사랑했던 같은 가톨릭 교회에 대한 말이라고 확신합니다!

“1930년대로 다시 돌아가서 피터 모린이 나에게 그 모든 아름다운 공부를 시키고 있었을 때, 나도 문을 두드리며 다른 이들을 가르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때 우리는 신문을 시작했고 곧 이어 사람들은 나를 지도자라고 불렀으며 나는 그들이 운동이라고 부르는 어떤 것의 우두머리가 되었습니다. 나는 길을 가다가 멈추고 무엇인가를 말하고 무엇인가를 해야한다는 요청을 받았으며, 심지어 우리 공동체 안에서도 사람들이 나에게 와서 무슨 말을 하고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물었습니다.

당신 자신에게 푹 빠지는 것은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습니다. 프랑코 장군을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비판했으나 그것보다 솔직히 말해 장기적인 차원에서 더 걱정스러웠던 것은, 매우 느리게 깨닫기 시작했는데, 우리에게 박수를 보냈던 사람들, 특히 나에게 가장 큰 박수를 쳤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나를 가톨릭 교회에 대항해 싸우는 쟌다크로 만들었지요. 그 사람들은 대부분 가톨릭이었습니다. 그들은 나에게 편지를 보내거나 말했습니다. 교회가 부패했고 파시스트이며 그것과 싸울 수 있는 사람은 바로 나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나에게 OO주교 그리고 신부들에 대한 엄청난 얘기들을 들려주었고 아마도 내가 군대를 모집해서 모든 파시스트들을 뽑아버릴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요, 교회 안에는 사람들이 있고 나와는 정치적 입장이 다른 중요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측면은 조심스럽게 표현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짜로 슬픈 순간은 나에게 교회 정치에 참여하도록 촉구하는 사람들의 꿈과 비슷한 꿈을 내가 꾸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는 순간입니다. 나는 앉아서 읽고 그러다가 내 마음은 방황합니다. 그리고 어떤 가톨릭 고위 성직자에게 어떤 것을 말하면 좋을까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면 나 자신에게로 돌아와 이렇게 말합니다. 도로시, 너는 진짜 문제를 일으키고 있구나. 빨리 고백성사를 보는 것이 좋겠다고 말입니다. 고백성사를 볼 때에 신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만심은 모든 사람의 문제이므로 내 자신에 대해 너무 심하게 대하지 말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엄격하게 하는 것 자체가 자신의 특별하고 죄많은 과오에 대해 자만심을 갖게 되는 길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다른 방법을 모두 그치고 나 자신의 내면에 대해 더 날카로운 성찰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교회를 정화하기 위하여 가톨릭이 되지 않았습니다. 몇년 전에 내가 (가톨릭일꾼공동체들이) 교회를 정화시킬 수 있다면 자기도 가톨릭으로 개종할 것이라고 계속 말했던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난 그가 처음 그렇게 말했을 때 나를 놀리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얼마가 지난 후 진심으로 그런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나서 마침내 그에게 교회를 개혁하려고 노력하지 않겠으며 교회가 관련된 모든 문제들에 관여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내가 익살스럽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내가 자본주의와 미국에 대해 비판적이었다는 점을 상기시키고 왜 가톨릭주의나 로마에 대해서도 그러면 안되느냐고 물었습니다. 내 대답이요? 나는 종교로서 가톨릭주의에 대해 또한 바티칸이 있는 장소로서 그리고 교종이 교회의 지도자로서 다스리고 교회의 믿음과 실천에 대해 말하고 있는 장소로서 로마에 대해 비판할 이유가 없다는 대답을 했습니다. 교회의 구성원들을 포함하여 전세계에 있는 가톨릭인은 그들을 가장 비판하는 사람들보다 더 나을 것이 없으며 아마 우리중의 어떤 가톨릭인들은 우리를 가장 비판하는 사람들보다 더 나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교회를 생명처럼 떠받들려는 구실과 변명에 대한 단호한 종지부였다. 도로시 데이는 오랫동안 교회를 어떤 특별한 지성소로 여기는 그의 성향과 싸워왔음이 분명하였다. 그리고 그런 지성소에서 많은 악이 발견될 수 있다는 사실도 알았다. 자신 안에 있는 어떤 본능, 직관들­, 미국적인 인민주의, 과시와 허식에 대한 혐오같은 것들­이 그로 하여금 교회가 "왼편으로 향하도록”, 가난한 이들과 노동자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도록 만드는 거룩한 십자군을 상상하도록 촉구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뱀과 비둘기에서처럼 어떤 정치적인 전사의 책략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또한 너무나 개인주의적이었기 때문에 어떤 기관, 심지어 가톨릭 교회에게조차(가톨릭 교회의 옹호자이든 비판자이든) 자신이 사로잡히는 것을 허용할 수 없었다.

<빵과 물고기>에서 도로시는 그의 동맹이 어디 있는지 대답하고 있다:

가톨릭 복지기관으로 우리는 교회의 도움을 얻는가? 우리는 이 질문을 자주 받는다. 우리는 도움을 호소할 때에 청하는 곳이 교회나 국가가 아니다, 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다. 스펠만 추기경이 우리에게 이 일을 하라고 청하지 않았으며, 뉴욕시의 시장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냥 이런 일이 일어났을 뿐이다. 다만 매일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고 내일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며 우리에게 오는 모든 사람들 속에서 그리스도를 보고 복음을 문자 그대로 따르려고 노력할 때에 이런 일이 결과로 생겨났을 뿐이다.

그리고나서 마태오 복음 5,42­-44절을 인용하며 충고를 덧붙인다: “달라고 하는 사람에게 주고 꾸려는 사람의 청을 물리치지 말아라.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미워하는 사람들에게 잘해 주며, 박해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헐뜯는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

이와 같은 방식이 그가 세상에 접근하고 교회에 다가가는 방식이었다. 그는 스펠만 추기경과 교회권위로부터 떨어져 있었다. 그를 문자 그대로 복음을 따르는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복음이 가르치는 것을 실천하려는 그의 의도를 분명히 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그가 소중하게 붙잡고 있는 것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의 도덕성에 대해서도 선언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모든 개혁자들이 허세를 부리고 비난의 손가락질을 하며, 과시적으로 위험을 무릅쓰는 성향들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개종자로서 자신의 상황도 잊지 않았다. 다음의 말들은 그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교회 안에 내 자리를 찾는 데에 수년이 걸렸습니다. 그 자리는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얻은 자리도 아니고 젊었을 때 얻은 자리도 아니었습니다. 중년기가 시작되면서 그 자리에 가게 된 것입니다. 나는 사람들이 생각해야 하고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고 내가 생각하는 것을 서둘러서 성급하게 말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한동안 운이 좋은 손님같이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나서 집에 있게 되었고 다음에는 집주인이 만든 모범에 따라 가능한 한 그것에 충실해 보려고 결정했으며, 만일에 그것이 성취되면 그 충실함이 나의 증언이 되고 나의 비판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말들을 다 끝냈을 때 그는 가까이 있는 십자가를 흘낏 보고나서 스프를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기 위해 일어섰다.

[원출처] <Dorothy Day, a Radical Devotion>, Robert Coles, 1987
[번역문 출처] <도로시 데이, 뿌리로부터 온전히 살다>(<참사람되어>2002, 7월호)

로버트 콜스(Robert Coles)

하버드 의과대학의 정신의학과 및 사회윤리학과 명예교수. 청소년 문제 상담 전문가로 활동해 왔으며, 50여 권이 넘는 책을 집필한 작가. 1973년 미국의 다양한 계층과 인종의 아이들을 직접 취재하고 분석한 <위기의 아이들>로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종이신문 <가톨릭일꾼>(무료) 정기구독 신청하기 
http://www.catholicworker.kr/com/kd.htm

도로시데이영성센터-가톨릭일꾼 후원하기
https://v3.ngocms.co.kr/system/member_signup/join_option_select_03.html?id=hva82041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