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밥으로 남아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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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밥으로 남아 계신다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1.06.07 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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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의 요한복음 묵상 [지상에 몸푼 말씀]-13

무릉武陵 가는 길 1

-민영

이제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정해야 한다
가까운 길이 있고 먼뎃길이 있다
어디로 가든 처마끝에
등불 달린 주막은 하나지만
가는 사람에 따라서 길은
다른 경관을 보여준다

보아라 길손이여,
길은 고달프고 골짜기보다 험하다
눈 덮인 산정에는 안개 속에 벼랑이
어둠이 깔린 숲에서는
성깔 거친 짐승들이 울고 있다
길은 어느 곳이나 위험 천만
길 잃은 그대여 어디로 가려 하느냐?

그럼에도 나는 권한다
두 다리에 힘 주고 걸어가라고
두 눈 똑바로 뜨고 찾아가라고
길은 두려움 모르는 자를 두려워한다고
가다 보면 새로운 길이 열릴 거라고

…… 한데, 어디에 있지
지도에도 없는 꽃밭
무릉(武陵)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빵을 내려 준 이는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참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시다. 하느님의 빵은 하늘에서 내려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빵이다.” 그들이 예수님께, “선생님, 그 빵을 늘 저희에게 주십시오.” 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요한 6,32-35)

사진출처=v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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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의 밥과 똥 한가운데 육화하신 분

“로마 제국의 식민지, 식민지 중에서도 작은 식민지요, 지중해 연안의 수없이 많은 나라 중에서도 작은 팔레스티나, 팔레스티나 중에서도 이스라엘이요, 그 중에서도 찌그러진 갈릴래아, 갈릴래아 중에서도 아주 자그마한 나자렛 사람이 예수였다. 이것은 예수가 그다지 고상한 출신성분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말한다.

또한 ‘베들레헴 출생설’에 따르면 마구간에서, 그 중에서도 여물통에서, 그것도 아비 없는 호래자식으로 태어났다. 이것은 예수가 인간의 밥, 인간의 똥 한복판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짐승의 밥, 짐승의 똥 한가운데서 태어났다는 것을 뜻한다. 여물통은 짐승의 밥통이며, 마구간은 짐승의 똥이 널려 있는 곳이다. 여물통은 짐승의 밥통이며, 마구간은 짐승의 똥이 널려 있는 곳이다. 그런 조건 속에서 전대미문의 한 생명이 탄생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 안에는 말도 소도 풀도 흙도 새도 바람도 다 살고 있다. 예수는 민중이며 중생이고, 중생으로서 중생을 해방하는 똥구덩이 역사 속의 참 부처이다. 그야말로 ‘진흙탕의 연꽃’이다. 바로 그런 점에서 예수는 ‘하늘에서 내려온 밥’이다. 먹고 사는 밥이며 하늘의 밥, 생명의 밥이다. 이 밥이신 예수를 먹는 게 ‘영성체’다.”(김지하, <밥>, 분도출판사)

우리가 먹는 밥은 그저 먹을 거리가 아니다. 하늘과 땅의 공동작품이다. 그 쌀 속에는 비와 바람과 별빛, 풀벌레 소리, 사람들의 기운이 우주적으로 스미고 꼬이고 어우러져 지어낸 생명이 들어 있다. 그 생명 없이 인간생명은 한시도 버틸 수 없다. 살아 남을 재간이 없다. 그리고 그 우주생명은 하느님의 선물이며, 하느님의 작품이며, 하느님의 사랑 그 자체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밥으로 오셨다. 생명을 주시는 밥으로 오셨다. 말 밥통 위에 누인 채 사람들에게 첫 선을 보이고, 마실 것으로 첫 기적을 보이셨으며, 광야에서 밥 때문에 첫 유혹을 당하셨다. 굶주린 백성들의 허기를 채워주셨고, 밥을 드시며 마지막 밤을 보내시고, 부활하시고 나서 제자들에게 밥을 나누어 주시고 예전에 계시던 곳으로 떠나셨다. 그래서 제자들의 마음 속에 예수님은 밥으로 남아 계신다. 영원한 밥, 영원한 생명을 주는 밥, 마지막 날에 하느님 백성을 일으키실 밥으로 말이다.

 

Dmitry Zhilinsky - Last Supper. 2000
Dmitry Zhilinsky - Last Supper. 2000

육신의 굶주림

그러나 누구나 이 진리를 깨달았던 것은 아니었다. 요한복음서는 5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 바로 뒤에 ‘생명의 빵’에 대한 이야기(요한 6,22-59)를 놓았다. 이미 빵의 기적을 보았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찾느라 혈안이 되어 있었다. 결국 가파르나움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뵙고 “선생님 언제 이쪽으로 오셨습니까?”(6,25) 하며 반색한다. 그러나 예수님의 반응은 냉담했다.

예수님은 그들의 질문에 한마디 답변도 하지 않은 채 “너희가 지금 나를 찾아온 것은 내 기적의 뜻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영원히 살게 하며 없어지지 않을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6,26) 그러자 단번에 그들은 하느님의 일을 위해 뭘 해야 할지 알려 달라고 조른다. 그들은 아마도 경신례를 생각했든가, 아니면 율법준수를 떠올렸을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일’이라면 으레 본당활동 열심히 하고, 미사참례 거르지 않으며, 성체조배 부지런히 하고, 교무금 꼬박꼬박 밀리지 않고, 성전 증‧개축 신립금 잘 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예전부터 열심한 신자들은 성전 짓는 데 열성을 보였고, 성직자들은 최고로 아름다운 성전을 지어 봉헌하는 걸 가장 큰 보람으로 여겼다. 그러나 예수님은 한마디로 답변하신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6,29)이라고.

요한복음서는 어느 정도 교회가 제도화될 즈음에 씌어진 것이다. 사람들은 성만찬에 점점 의미를 부여했고, 예수님에 대한 기억은 성만찬을 통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전례에 대한 집착을 비판했던 요한복음서 작가는 ‘믿음’을 강조한다. 성체(聖體) 그 자체가 아니라 예수님의 인격을 받아들이라고 권고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오히려 믿게 하려면 모세보다 더한 기적을 다시 보여 달라고 한다. 그러자 예수님은 모세가 만나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먹였다고 하지만 사실 이들을 먹인 것은 하느님이라고 한다. 하느님이 주시는 빵이 세상에 생명을 준다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 사람들은 “선생님, 그 빵을 항상 저희에게 주십시오.”(6,34) 하고 간청한다. 이는 사마리아 여인이 더이상 우물물을 길러 나오지 않아도 되도록 ‘생명의 물’을 계속 공급받고자 했던 것과 마찬가지다(4,15).

이들은 예상하지 않았던 음식을 공짜로 얻게 되는 것을 좋아했으며, 그런 것을 제공해 주는 사람에게 기꺼이 기적 행위자에 대한 깊은 존경을 드렸던 것이다.

 

사진출처=gorbutovich.livejournal.com
사진출처=gorbutovich.livejournal.com

생명의 빵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양식을 주겠다고 선언한 것을 깨달았으나, 예수님 자신이 하느님의 양식임은 깨닫지 못했다. 여기서 예수님은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6,35)라고 선포한다. ‘나는… 이다’라는 표현은 요한복음서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문체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8,12), “나는 양의 문이다.”(10,7), “나는 선한 목자다.”(10,11),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11,25),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14,6), “나는 참 포도나무요.”(15,1) 이러한 형식은 구약성서에서 하느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실 때 쓰던 신적 언어이다. “나는 네 선조들의 하느님이다.”(출애 3,6) “내가 너희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하느님이다.”(20,2) 이는 곧 예수님이 당신의 정체를 적극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예수님은 스스로 당신을 생명을 주는 밥이라고 하셨다.

그러나 유다인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자기가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라니!” 도대체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 아버지가 요셉이란 걸 우리가 다 아는데!” 예수는 보통 사람이며 그의 가족이나 출신지도 잘 알려져 있다. 게다가 별 볼일 없는 시골뜨기에다 지금은 실업자 떠돌이에 지나지 않았다. 조금 그럴싸해서 건질 게 뭐 있나 찾아왔더니 순전히 헛소리라고 취급했을 게 뻔하다.

그러던 차에 예수님은 한마디 더 하신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6,54)이라는 것이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서 살고 나도 그 안에서 산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의 힘으로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의 힘으로 살 것이다.”(6,56-57) 이는 곧 예수님의 인격을 자신의 인격 안에 받아들이는 삶을 뜻한다. 온전히 그리스도와 결합되어야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아버지의 가르침을 듣고 배우는 사람은 나에게 온다.”(6,45)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아버지의 뜻이 곧 아들의 사명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참된 생명, 참된 평화를 주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유명한 랍비였던 힐렐은 “평화를 사랑하고, 평화를 추구하며, 인간을 사랑하고, 그들을 율법에 가까워지도록 하는 아론의 제자가 되라.”고 당부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조차도 “이렇게 말씀이 어려워서야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는가?”하며 수군거린다. 그들 역시 예수님께서 영적 양식이 되신다는 것을 알아듣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자 예수님은 “내 말이 귀에 거슬리느냐?”라고 묻는다. 이때부터 많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고 물러갔으며, 더 이상 따라 다니지 않았다. 베드로만이 나서서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 우리는 주님께서 하느님이 보내신 거룩한 분이심을 믿고 또 압니다.”(6,69)라고 답한다.

 

사진출처=gorbutovich.livejournal.com
사진출처=gorbutovich.livejournal.com

생명을 나눈 존재

백인들에게 땅을 빼앗긴 시애틀 추장의 이야기를 덧붙인다.

“만일 우리가 당신네들에게 땅을 팔게 되더라도 우리에게 공기가 소중하고, 또한 그것이 키워주는 온갖 생명과 영혼을 나누어 갖는다는 사실을 당신들은 기억해야 한다. 우리의 할아버지에게 첫숨결을 베풀어 준 바람은 그의 마지막 한숨도 받아줄 것이다. 바람은 또한 우리의 아이들에게 생기를 넣어준다. 우리가 우리 땅을 팔게 되더라도 그것을 잘 간수해서 백인들도 들꽃들로 향기로워진 바람을 맛볼 수 있는 신성한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 모든 짐승이 사라져 버린다면 인간은 영혼의 외로움으로 죽게 될 것이다. 짐승에게서 일어난 일은 인간들에게도 일어나기 마련이다. 만물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땅은 우리의 어머니이다. 땅 위에 닥친 일은 그 땅의 아들들에게도 닥칠 것이니, 그들이 땅에 침을 뱉으면 그것은 곧 자신에게 침을 뱉는 것과 같다. 땅이 인간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땅에 속하는 것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만물은 마치 한가족을 맺어주는 피와도 같이 연결되어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녹색평론」, 창간호 61쪽)

이들은 물소를 함부로 사냥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인디언들이 물소 고기를 먹으면 그 영혼이 그들 안에 깃들인다고 여기며, 물소와 인간은 서로 피와 뼈와 살을 나눈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예수님은 당신의 살과 피를 사람들에게 먹임으로써 그들 영혼 안에 살고자 원하신다. 그러기 위하여 하느님은 피와 살을 가진 인간으로 육화하셨고, 그 육을 인간에게 내어주심으로써 인간의 영혼과 영적으로 결합하신다. “영적인 것이 생명을 주기 때문”(6,63)이다. 이렇게 영과 육은 생명을 내어주는 예수님의 행위 안에서 통합된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는 군인들이 ‘짬밥수’를 자랑하듯이, 얼마나 오랫동안 영성체를 모셨나를 자랑하기보다 복음이 얼마나 다른 사람들의 영혼의 심금을 울리고 있는지 끊임없이 성찰해야 한다. 더구나 요한복음서가 말하듯이 전례의 신비를 강조하기에 앞서 육화의 신비를 높이 평가해야 한다. 이는 곧 우리가 얼마나 예수님처럼 살며 증거하는가에 달려 있다. 성체/제병(祭餠)이 곧 영원한 생명의 보증수표가 되거나 신비의 영약(靈藥)은 아니기 때문이다.

 

마무리 기도

내 혀가
당신 살을 받아 들이고
내 입술이
당신 피를 마십니다, 주님.
이렇게 당신이 내 피톨이 되어
내 몸속에서 돌아다니는 동안
저는 어느덧 당신 꿈에 빠져듭니다.
당시느이 사랑,
당신의 갈증,
당신의 굶주림을,
아니, 당신의 열망을
함께 나누어 갖습니다.
당신은 생명의 빵,
우리는 모여서 식탁 위에 놓인
당신의 육신을 바라보며
영혼을 정갈하게 비우고
그 육신이 내 영혼을
새로 태어나게 하도록 기도합니다.
이제 내가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서
더 어리고 연약한 영혼을 위해서
아니 당신을 위해서
제 살과 피를
나누어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느님.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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