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를 예배하고 황제에겐 충성하는 교회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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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 예배하고 황제에겐 충성하는 교회란?
  • 한상봉 편집장
  • 승인 2021.05.31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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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봉의 요한복음 묵상 [지상에 몸푼 말씀]-12

수라(修羅)

- 백석(1912∼1996)

거미새끼 하나 방바닥에 나린 것을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문밖으로 쓸어 버린다
차디찬 밤이다

어니젠가 새끼거미 쓸려나간 곳에 큰거미가 왔다
나는 가슴이 짜릿한다
나는 또 큰거미를 쓸어 문밖으로 버리며
찬 밖이라도 새끼 있는 데로 가라고 하며 서러워한다

이렇게 해서 아린 가슴이 싹기도 전이다
어데서 좁쌀알만한 알에서 가제 깨인 듯한 발이 채 서지도 못한 무척 작은 새끼거미가 이번엔 큰거미 없어진 곳으로 와서 아물거린다

나는 가슴이 메이는 듯하다
내 손에 오르기라도 하라고 나는 손을 내어미나 분명히 울고불고 할 이 작은 것은 나를 무서우이 달어나버리며 나를 서럽게 한다
나는 이 작은 것을 고이 보드라운 종이에 받어 또 문밖으로 버리며
이것의 엄마와 누나나 형이 가까이 이것의 걱정을 하며 있다가 쉬이 만나거나 했으면 좋으련만 하고 슬퍼한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표징을 보고,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와서 당신을 억지로 모셔다가 임금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아시고,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다.

저녁때가 되자 제자들은 호수로 내려가서,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 카파르나움으로 떠났다. 이미 어두워졌는데도 예수님께서는 아직 그들에게 가지 않으셨다. 그때에 큰 바람이 불어 호수에 물결이 높게 일었다. 그들이 배를 스물다섯이나 서른 스타디온쯤 저어 갔을 때,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하는데,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 (요한 6,14-21)

십자가를 통해 얻는 승리

고통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피할 수 없는 경험으로 여겨졌다. 예수님은 적들에게 살해당했고, 박해받는 그리스도인들이 그분의 발자취를 따랐다. 교회의 역사는 4세기까지 간헐적으로 때로는 집중적으로 박해를 받았다. 로마 황제의 전통이 위협받는 듯할 때는 어김없이 그리스도인들의 먼저 박해를 받아야 했다. 그래서 교부 테르톨리아노는 “우리가 너희에 의해 소탕될 때는 언제든지 더 성장한다. 그리스도인의 피가 씨앗이다.”라고 말했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을 배신하지 않으며, 악을 통해서 승리를 추구하기보다는 오히려 기꺼이 죽음을 감당하겠다는 용기를 내는 가운데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였다. 그러므로 역사 속의 예수님과 초대교회의 신앙은 궤를 같이하고 있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약함과 굴욕당함에서 나타나는 계시를 이렇게 표현한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이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의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세속적인 견지에서 볼 때에 여러분 중의 지혜로운 사람, 유력한 사람, 또는 가문이 좋은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었습니까?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지혜있다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려고 이 세상의 약한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 또 유력한 자들을 무력하게 하시려고 세상에 보잘 것 없는 사람들과 멸시받는 사람들, 곧 아무것도 아닌 사람들을 택하셨습니다.”(1코린 1,26-28) 그들의 구세주도 스스로 나약해져서 굴욕을 받았으며 그들의 고통을 함께 나누었다. 이것은 우리가 세상에서 믿도록 배워온 방식에 반대된다.

세상의 방식을 배우고 권력을 얻어 행사하는 데는 특별한 계시가 필요없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계시를 찾는다면 그것은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길이 세상의 지혜와 권력에 모순된다는 점이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이 사람의 눈에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사람들이 하는 일보다 지혜롭고, 하느님의 힘이 사람의 눈에는 약하게 보이지만 사람의 힘보다 강합니다.”(1,25) 초대교회는 박해를 통해 이 계시의 새로운 진리를 배웠다. 그리스도인들은 박해를 경험하면서 더욱 강해졌다. 교회는 황제의 보호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리고 수세기가 지나면서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이미 로마 제국을 내용적으로 정신적으로 인수받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승리는 콘스탄틴 황제의 십자깃발을 통해서가 아니라 십자가를 통해서였다.

콘스탄틴 황제가 그리스도인들을 계속 박해하였다면 그는 결코 그리스도교를 정복하지 못했을 것이다. 콘스탄틴 황제는 칭찬과 더불어 이곳 저곳에 새 교회의 설립을 허가하면서 고문과 죽음의 위협도 유린하지 못했던 그리스도교 신앙을 갉아먹었다. 황제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교회에 제공하였다. 그는 적어도 세상 왕국의 한몫을 교회에 떼어 준 것이다. 자기야말로 하느님의 추종자라고 유혹하면서.

콘스탄틴은 매우 현실적인 전략가였다. 그는 로마를 두고 막센시우스와 싸우면서 십자가를 자신의 문장으로 사용하고, 군기로 차용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리고 에우세비오와 같은 교회사가들은 이를 신화(神話)로 만들어 콘스탄틴 황제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고 선전했다. 그러나 그는 단지 정치적으로 그리스도교를 이용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교묘하게 교회에서 가난한 이들의 복음과 역사적 예수를 제거해 갔다.

이제 교회는 황제가 더 이상 박해자가 아니라 친구라고 믿게 되었고, 그의 길에서 하느님의 손을 보게 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을 더 이상 박해에 항거함으로써 십자가에 달린 분에 대한 신앙을 새롭게 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들의 욕구는 황제가 채워주었으며, 고통을 통해 승리하시는 ‘하느님의 어리석음과 약함’은 더 이상 신앙에 소용되지 않았다.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은 이제 ‘조언자’로서 제국의 궁정에 끌려들어갔다. 그들은 세상 일에 현명한 것처럼 보였고, 제국 안에서 지위와 세력을 얻었으므로 거꾸로 이교도들에 대한 소규모 박해를 즐길 수 있었다. 그리고 콘스탄틴 황제는 또 다른 메시아로서 변방의 이교도들을 학살하였으며 그리스도교의 영토를 확장하는 것처럼 보였다. 콘스탄틴은 죽기 직전까지 결코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았지만 교회는 예전의 신앙을 버리고 제국의 질서에 순응했다. 그들은 이제 그리스도에게 예배를 드리면서, 황제에게 충성하였다.

 

 

이 표지 안에서 정복하라

콘스탄틴의 목표는 하나였다. 자신의 절대적인 통치 아래 제국을 통합시키는 것이었다. 그의 야심에 가장 만만치 않은 상대가 교회였고, 그는 이 교회를 아주 짧은 기간 안에 자기에게 굴복시키고 충성하도록 개조시켰다. 새로운 유다의 입맞춤을 당하고 나서 그 배신의 칼날을 알아채지 못했던 그리스도교 교회는 어느새 카이사르와 친구가 되어버린 것이다. 따라서 콘스탄틴은 십자기의 표지로써 그리스도교를 정복한 셈이다. 제국이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혁신된 국가가 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은 복음을 팔아 연금을 얻었으며, 국가종교의 공무원이 되었다. 예수님은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려고 생활의 안정을 포기했지만 4세기 이후 교회는 윤택한 생활을 위해 하느님 나라를 잊어버렸다.

초대교회의 테르툴리아노는 언제나 빈민을 옹호하고 부자를 비난했으나 이제 더 이상 부자들은 가책을 느끼지 않아도 좋았다. 신학자들은 예수님의 “가서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고 내 뒤를 따르라.”는 명령을 정신적으로 해석하여, 마음이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으면 족하다고 말할 줄 알게 되었다. 따라서 몇 년 전까지도 교회를 박해하던 부자들과 재산 소유자들이 교회 한복판으로 들어왔다. 황제는 부유했으며, 그 황제가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이교도들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을 해방시킴으로써 그의 부유함도 정당화 되었다.

이제 교회에서는 황제의 지원으로 새 건물이 세워지고 값비싼 계획이 추진되었으므로 ‘빈자를 옹호하고 부자를 비판하시던 분’을 기억하기도 어려워졌다. 이 시대에 수도원 운동이 시작되었으나, 수도원도 교단으로 발전하면서 큰 재산과 부를 소유하게 되었다. 가난은 매력적인 이상에 머물고 말았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하느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라고 선포하였으나 새 질서 아래서는 가난한 이들에게 자선을 베푸는 자들이 복되었다. 국가종교는 제국의 이익을 위해 일해야 했다. 따라서 교회 지도자들은 황제의 측근이나 자문관이 되었다. 그들은 황제에게 무엇을 하라고 조언했는가? 가진 것을 모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라고 조언했을까? 무기를 두들겨 쟁기로 만들라고 하였나?

몇 년 전만 해도 박해의 표적이 되었던 주교들이 이제 공무원이 되어 교회의 지붕을 고쳐주는 황제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었다. 예수님이 팔레스티나의 먼지 나는 길을 걸었던 아득한 시대에 그 지도자는 추종자들의 발을 닦아주는 분으로 인식되었다. 첫째가 모든 이의 꼴찌이며 종이었다. 그러나 이제 새로운 제도 아래서 지도자는 그렇게 인식되지 않았다. 그런 비천한 행동은 황제 식솔들의 품위를 손상시키는 것이었다.

세례자 요한의 거친 옷은 신앙이 요구한 소박한 삶과 헌신을 상징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무엇을 보러 광야에 나갔더냐?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냐? 아니면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이냐?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은 왕궁에 있다”(마태 11,9) 그러나 이제 로마의 주교는 라테라노 궁전을 사용하게 되었고, 값비싼 의복을 입고 ‘왕궁 같은 집’에서 사는 그리스도인들도 볼 수 있게 되었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님은 하느님께로부터 나오는 권위에 의존하여 헤로데 왕가를 비판하였으나, 이제 교회 지도자들은 황제로부터 나오는 명령계통을 통해서 권위를 행사하였다. 예수의 권위는 종으로 행동하도록 이끌었으나, 궁정에 사는 이들은 자기 밑에 있는 자들을 다스리는 데 권위를 사용하였다. 궁정에 사는 주교들은 조만간 ‘교회의 제후’라 불리게 되었으며 사람들은 그들 앞에 무릎을 꿇고 충성을 서약했다. 이 모델은 그리스도교의 모델이 아니라 제국의 모델에 따른 것이다.

 

맨발로 물 위를 걸어

예수님이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을 보이신 후에 군중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추대하려고 웅성거렸다고 요한복음은 전한다. 그러나 왕의 모델은 예수님에게 걸맞지 않는 것이었으며,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어그러뜨리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스스로 약한 자가 되심으로써 약한 이들이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을 이루도록 원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그들을 피해 혼자서 산으로 올라가셨다(요한 6,15). 여기서 산은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모든 왕들은 평지의 도시에서 살며 백성을 다스렸다. 그러나 산은 모세가 야훼 하느님을 만났던 장소이고,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처음 공동체를 꾸렸던 곳이며, 예수님이 기도하시던 장소였다. 예수님은 평지의 사람이 아니라 ‘산 사람’이셨다. 도시가 아니라 시골의 정서를 나누어 갖고 계시며, 굶주린 이들을 배불리시되 자신은 거친 음식을 먹으며, 권력 없이 무력한 자로 남아 세상의 무력한 자들을 사랑하셨다.

예수님 없이 제자들끼리 건너는 바다는 “거센 바람이 불고, 물결이 사나웠다.”(6,18) 어둠이 짙게 깔리고 제자들은 불안하였다(6,17). 마치 뒤쫓아오는 이집트 기병들을 보고 놀란 히브리 백성들이 홍해 바다의 거친 물결을 앞에 두고 불안스레 서 있는 듯한 광경이다. 이때 예수님께서 마치 홍해가 갈라지고, 히브리 백성들이 맨땅을 걸어갔듯이 맨발로 물 위를 걸어오신다. 그분은 병거와 함선으로 제자들의 불안을 없애려 하시지 않고 맨발의 기적을 보이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권력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려 하시지 않았고, 엄청난 재산과 군대의 힘으로 백성을 해방시키려고 하시지 않았다. 그런 뜻에서 그분은 정치적 메시아는 아니었다. 그분은 십자가를 통해 인류를 구원하신다. 그 제자들도 이 사실을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경험한 후에야 깨달았다. 그러나 콘스탄틴 황제 이후의 교회는 황제의 권력과 군대에 의존하기 시작했고 부유함과 화려한 궁정에 유혹당했다. 고통과 박해를 부르는 십자가를 버리고 황제의 십자가를 선택함으로써 예수님의 흙먼지 날리는 거리는 기억에서 사라졌다.

우여곡절 속에서 20세기 중반에야 요한 23세 교황은 즉위식 때 스스로 삼중관을 벗어버리고 걸어서 교황의 계단에 올랐다. 그리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리고 다시 맨발의 그리스도가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게 되었으니 다행스러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아직도 교회는 맨발의 그리스도에게 어울리지 않으니 우리의 고민은 여기서 시작된다. 제자들이 탔던 배는 어느새 목적지에 닿았는데, 아직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왕좌에 모시려고 분주하니 말이다.

 

마무리 기도

우리는 세상의 빛이며
소금이랍니다.
세상과 다른 그 무엇이랍니다.
정말 그런가요, 하느님.
내 안에 있는 또 다른 내가
아니다 아니다
마찬가지 마찬가지 하기에
울컥 화가 나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합니다.
그래도 나는 열심히 산다고 살았는데
어느 악마가
나 모르게 내 안에 들어와
분탕질 치고 달아난 모양입니다.  
내 안에 언제나 황제도 들어 있고
떼부자도 들어앉고
장군도 간신배도 들어앉아
주인 행세 하는 줄 몰랐습니다.
내 안에 들어 있는 이 모든
시정잡배를 들어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느님.
그러면 내 영혼의 무게로 
물 위를 나도 따라 걸을 수 있을 텐데.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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